시 적 주체의 전이: 토마스 와이엇의 연애시에 대한 고찰

전 양선 (이화여대)




본 논문의 목적은 와이엇이 번안한 소네트를 중심으로, 타자(시적 대상이 되는 레이디, 사랑의 신)와의 관계 속에서 와이엇의 시적 주체의 특징적인 면을 밝히고, 그 특징적인 면에서 비롯되는 효과를 검토해보는 데 있다. 본 논문의 분석 대상은 「그들이 나에게서 달아난다」(They  flee  from  me), 「오래된 사랑」(The  long  love), 「도대체 누가 사냥을 열망하는가」(Who se  list to hunt)이며, 이 중에서도 「오래된 사랑」과 「도대체 누가 사냥을 열망하는가」는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를 번안한 것이기 때문에, 와이엇이 구현하는 시적 주체의 특징적인 면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이들 시의 모태가 되는 페트라르카의 시들과의 비교 분석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시 적 주체의 내면성에 관해서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점을 마련한 평자로는  스티븐 그린블랏(Stephen Greenblatt)을 들 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르네상스 자아형성」((Renaissance Self-Fashioning) 은 시인이 “옷을 걸치듯” 스스로를 “연출”해내는 자아의 역할 놀이에 주목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다. 그에 의하면, 텍스트는 내면화된 당대의 이데올로기에 준거하여 담론들의 역학 작용을 통해 시적 주체의 내적 갈등을 연출하며 그 주체성을 구성해낸다. 이에 게리 월러(Gary Waller)는 그린블랏의 논의를 상당 부분 수용하면서, 16세기의 텍스트가 보여주는 자아의 모습은 확립된 자아의 반영이기 보다는, 당대 문화의 행위 규범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며, 그런 이유로 자아는 유동적이고 불확실하며 나아가 탈중심적이라고 설명한다(82-4).1) 특히 소네트는 14행으로 완결되는 짧은 시형식이기 때문에, 이러한 불안정한 자아의 우발적 욕망을 표출하기에 적합한 양식으로 간주된다. 소네트는 마치 시적 화자의 직접적인 고백, 즉각적인 대화와 같은 인상을 남기며, 텍스트 위에서 자아의 순간적인 창출을 이루며 전개된다는 점에서, 다양한 자아들의 놀이 공간이라고 집약할 수 있다(Spiller 5-6).

소 네트의 시적 주체성은 구체적으로 욕망의 대상이 되는 레이디와의 관계 속에서 구축된다. 특히 페트라르카는 대상의 숭고화를 통해서 시적 주체의 창조성을 완성해내는 전형을 창출한다.2) 페트라르카는 주체와 대상 간의 넘어설 수 없는 거리를 상정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로라의 절대적 타자화를 통해서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트라르카는 시적 화자의 남성적 욕망의 특권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와이엇의 시에는 이렇게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분리된 형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우선, 와이엇의 레이디는 관념적인 존재들이기 보다는 구체적인 물성을 지닌다. 그들은 지상에 발 닿아 있으면서, 시적 주체에 의해 소외되기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구체적인 힘을 행사한다. 오히려 와이엇의 시적 화자는 궁정의 여성들에게 동화되거나 보다 적극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타자의 존재에 동화되는 와이엇의 독특한 감수성은 종국에는 페트라르카적인 형식을 수용하면서도 그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해체성으로 이어진다. 와이엇은 타자와의 근접성을 통해서 서로의 입장을 용인하며, 나아가 권력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본고의 이러한 해석의 틀은 젠더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역할 놀이를 창출하는 주체성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3)

*

「그 들이 나에게서 달아난다」에서 와이엇은 전통적인 성 역할, 즉 남성의 능동성과 여성의 수동성의 구분을 뒤집는다. 이 시의 남성 화자는 내실이라는 작은 공간에 예속되어 있어, 수동적이고 무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반면에, 여성은 변덕스럽고 부박하면서 상대적으로 운신의 폭이 넓다. 이러한 여성의 모습은 남성들의 전형적인 여성 혐오감의 반영임과 동시에, 남성적 특질로 간주되어 온 성적인 적극성이 전유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They flee from me that sometime did me seek

With naked foot stalking in my chamber.

I have seen them gentle, tame, and meek

That now are wild and do not remember

That sometime they put themself in danger

To take bread at my hand; and now they range

Busily seeking with a continual change.


Thanked be fortune it hath been otherwise

Twenty times better, but once in special,

In thin array after a pleasant guise,

When her loose gown from her shoulders did fall

And she me caught in her arms long and small,

Therewithal sweetly did me kiss

And softly said, 'Dear heart, how like you this?'


It was no dream: I lay broad waking.

But all is turned thorough my gentleness

Into a strange fashion of forsaking.

And I have leave to go of her goodness

And she also to use newfangleness.

But since that I so kindly am served

I would fain know what she hath deserved.4)


이 시에서 여성은 남성 화자의 교착지5)에 위치한다. 여성은 당대의 문화적 규범을 벗어나 “새로운 유행”(newfangleness)을 사용하며, 남성 화자의 규범적 시각을 벗어나 있다. 마지막 행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성의 행위는 시적 화자의 인과론으로는 추정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의 여성은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그녀의 “마음에 흡족한가요”라는 질문은 남성의 보수적인 욕망을 조롱하는 전복적인 힘을 지닌다. 그녀는 남성의 성적 능동성을 모방하고 있다. 이처럼 와이엇은 여성에게 물리적인 성성(sexuality)을 부여함으로써, 여성의 가시적 영역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와 이엇의 시에서 흥미로운 점은 여성의 물리적인 성성은 시적 주체의 언어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페트라르카적인 시학이 도치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에서는 여성의 존재가 천상에 머물러 있다는 점, 다시 말해서 여성이 비가시적인 영역에 있다는 점이 시적 화자가 언어 행위를 지속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와이엇에서는 여성이 지나치게 성적이기 때문에 남성 화자가 언어적 무능에 빠지고 마는 역형식이 성립한다. 위 시에서 이러한 형식의 전환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느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존재는 시적 화자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곳에서 시적 화자를 동화해 들이고 있음을 밝힐 필요가 있다.

이 시에서 여성의 물리적 재현은 시적 화자가 의존하는 유일한 형식으로, 시적 화자의 정서를 구조화하는 물적인 토대로서 작용한다. 늘어진 가운, 드러난 맨 어깨, 길고 가는 팔 등의 육체적 현존을 바탕으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다. “연인이여, 이것이 그대의 마음에 흡족한가요?”(Dear heart, how like you this?) 여기에서 우리는 “이것”(this)의 구체적인 지시 대상을 확언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시적 화자에게 제공한 성적 쾌감을 “이것”이라는 지시 대명사로 표현함으로써, 표현의 영역을 넘어서는 의미의 동공 상태를 재현해낸다. “이것”은 여성과 남성 화자 사이에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미 공유되어 있는 어떤 지식 체계가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낸다. 여성은 이미 시적 화자가 갈망하던 그 무엇인 “이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가 어떠한 대접을 받았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시적 화자의 그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지식은 이미 시적 화자를 압도한다. 그녀는 남성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이것”을 가졌으며, “이것”을 통해서 남성 화자의 성적 정체성을 동화해 들인다. 그리하여 충족된 욕망의 뒤끝에서 남성 화자는 언어를 상실한다. 그녀의 질문에 대해서 시적 화자는 답변하지 못한다. 이는 페트라르카의 시에서 볼 수 있는 글쓰는 자아의 서정적 균형이 깨어지는 순간이다.6) 와이엇의 시적 자아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대상인 여성에게로 함몰되며, 동화된다. 과거의 그녀의 “온화한”(gentle) 속성은 시적 화자의 “온화함”(gentleness)으로 전이되며, “그 온화함을 통해서 모든 것은 변하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남성 화자는 자신의 언어를 잃으며 그에 동반되는 지식 체계 또한 상실한다.

여 성과 남성 화자가 동화되는 현상은 “like”라는 단어의 복수적 의미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like”는 “좋아하다”는 의미로 남성 화자의 성적 만족을 의미하는 동시에,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지시한다. 이처럼, 와이엇이 선별하는 어휘의 모호성은 곧 시적 주체가 성적 경계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같은 예로, “dear heart”라는 어구도 그 자신의 양가적 속성을 통해서 성적 경계를 허물어낸다. “dear”는 “deer”로, “heart”는 “hart”와 동음이의어를 이루면서, 시적 화자와 여성 사이의 성적 경계는 모호해진다. 여성이 시적 화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dear heart”하고 불렀을 때, 저변의 동음인 “deer hart”는 텍스트의 저변인 오비드를 동시에 환기한다. 와이엇의 사슴은 오비드의 「변신」 중에서 악테온의 비극적 변신과 다이애나의 가혹한 금지령을 강하게 인유한다. 다이애나는 신성을 지닌 자신의 육체를 보았다는 이유로 악테온에게 “말하지 말 것”을 명하며, 사냥의 주체였던 그를 사냥의 대상인 사슴으로 전환시킨다. 다이애나와 악테온의 관계는 시각적 경험과 언어 행위를 상치된 영역으로 문제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와이엇이 하위텍스트를 통해서 제기하는 바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응시와 시적 주체로서의 발화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와이엇의 시적 주체는 그녀의 나신과 그녀의 “이것”을 보았으므로, 그 응시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악테온이 주체에서 객체로 전이되는 동안 언어를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와이엇의 시적 화자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상실한다. 그녀의 긴 팔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그녀 속에 함몰되어, 그녀의 형상이 곧 그의 존재 양식을 형성해낸다. 즉 그녀는 그의 존재 형식인 시와 언어를 규율하는 준거틀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시 적 화자는 이러한 여성의 존재를 통제하거나 규율하지 못한다. 그녀는 이미 그를 넘어서서 그의 형식을 동화해 들인 까닭이다. 과거에는 “온화하고(gentle), 길들여져 있고(tame), 유순(meek)”했던 그녀는 지금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wild)” 존재로 변화하였다. 그러므로 “야생”은 현재의 시적 화자를 드러내는 존재 양식이 된다. 왜냐하면 사슴이 된 와이엇은 여성의 존재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린블랏이 지적한 바 있듯이, 중세적 전통 안에서 “wild”라는 단어는 “파악하거나 표현하기 어려움”(elusiveness)이 암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불가사의한 위협”(uncanny menace)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147). 이 단어는 인간적인 유대감, 그리고 문명의 상태 외면에 존재하는 불가해의 영역을 내포한다. 이 영역에 동화된 시적 화자는 이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만한 적절한 언어 형식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는 그녀의 존재를 포괄해낼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것”(this)에는 여성이라는 존재 형식의 불가해함과 대상의 지시성을 상실한 언어로 인해서 교착 상태에 빠져버린 시적 화자의 감정이 반영되어 있다. “사슴”이 되어 야생의 세계와 교통을 이룬 시적 화자는 표현의 힘을 잃은 채, 그녀가 “어떤 대접을 받아야 마땅했는지”, 그 앎에 대한 “열망”만을 느낀다. 즉 시적 화자는 새로운 열망은 얻었을지언정, 그 표현은 잃어버렸다.7)

판 자(Shormishtha Panja)는 2연의 여성의 포옹에는 포식성의 분위기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강조한다. 여성은 파리를 가두어 들이는 거미와도 같이 남성을 붙잡아 들이는데, 이러한 여성의 모습은 노련한 요부와도 같다는 것이다. 여성이 “공격자”로 “가장”하듯이, 시적 화자는 남성적인 공격성을 여성적인 수동성으로 가장한다. 판자의 분석은 와이엇의 시적 화자와 여성은 성역할에 있어서 상당히 상호 교환적이라는 것을 재확인해준다. 1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이미 시적 화자의 내실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으며, 2연에서의 그녀의 대담한 질문은 그녀가 이미 시적 화자의 쾌락의 원천이 어디인지를 그 내밀한 곳까지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은 시적 화자는 가장 내밀하고 은밀한 ‘사적 공간’마저 공개되어, 자기 수호의 공간이 상실되었으며 그만큼 취약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시적 화자의 수동성은 이후 자기 파괴적인 공격성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것은 이 시의 전반에 흐르는 냉소적이고도 풍자적인 어투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녀의 동물적 속성은 곧 시적 화자 자신의 동물적 속성이기도 하다. 시적 화자는 1연의 불특정 다수를 나타내는 “그들”(they)에서 2연의 “그녀”(she)로 그 범위를 좁혀가며, 공격의 대상이 되는 대명사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 다닌다”(range). 그 움직임은 사냥감 노리는 맹수의 신중함과 닮아 있다. 또한 그는 과거의 “특별했던 한 순간”(once in special)을 현재의 상습적인 사건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실추와 더불어 여성의 상습적인 “교태”(newfangleness)를 공격한다. 과거에는 “특별했던” 한 순간이 이제는 같은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경박한 변덕의 속성으로 변질된다. 사랑은 일상적이고 진부한 것으로 격하되고, 그 과정에서 시적 화자의 위신 또한 실추한다.

이 시는 가학성과 피학성의 양극단 사이에서 그 경계를 허물어낸다. 시적 화자와 여인은 그 양가적 속성을 내면화하면서 서로의 모습을 반향해주는 거울이 된다. “이것”은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시적 완결성에 저항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와이엇의 시에서 “나”와 “그녀” 사이의 관계는 페트라르카적인 재현 체계에서 벗어난다. 이러한 탈주를 가능하게 해 주는 적극적인 동인은 여성이다. 힐(Elizabeth Heale)이 지적하고 있듯이, 와이엇의 여성은 유혹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관음적 시선의 대상이다. 또한 여성은 “길들여져 있지 않은” 반문명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신의 궁정 양식, “새로운 유행”(newfangleness)을 내면화하면서 문명의 극단을 체화하는 존재이다. 즉 그녀는 길들여지지 않았으면서도 길들여져 있고, 유혹과 소유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의 된다(52). 이처럼 언어의 양극단 사이에서 명명되기를 거부하는 그녀는 시적 재현에 도전하며 모호성의 영역을 통해서 시 형식을 파괴하는 행위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요컨대, 그녀의 육체가 풍겨내는 동물적인 체취는 시적 화자의 무력함과 직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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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자의 존재에 쉽게 동화되는 와이엇의 시적 주체는 ꡔ오래된 사랑ꡕ(The long love)에서도 나타나는 바, 그 특성은 원문이 되는 페트라르카 소네트 140번과의 비교 속에서 확연해진다. 소네트 140번에서 페트라르카의 시적 화자는 사랑의 신과 자신을 분리해냄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구성해주는 언어 영역을 확보한다.

Love who lives and reigns in my thought and keeps his principal

seat in my heart, sometimes comes forth all in my armor into my

forehead, and there sets up his banner.


She who teaches us to love and to be patient, and wishes my

great desire, my kindled hope, to be reined in by my reason, shame,

and reverence, at our boldness is angry within herself.


Wherefore love flees terrified to my heart, abandoning his every

enterprise, and weeps and trembles; there he hides and no more

appears outside.


What can I do, when my lord is afraid, except stay with him

until the last hour? For he makes a good end who dies loving well.8)


시 적 화자의 내면적 심리극인 이 시는, 시적 화자의 말하지 못하는 사랑과 여성의 말없는 분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시에서 비겁한 장군인 사랑의 신은 자신의 대의를 시적 화자에게 떠넘기며 화자의 “마음 속”으로 숨어, “더 이상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를 통해서 시적 화자와 사랑의 신 사이에는 공간적인 간극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 거리감은 오히려 시적 화자의 비장한 충성심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한다. 그 충성의 대의는 곧 사랑의 신이 저버린 “모든 과업”, 그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의 신은 “그저 울면서 떨고” 있으니, 그 열정의 표현은 오로지 시적 화자의 몫으로만 남는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욕망의 언어적 형식화는 이미 시인이 이제껏 성실하게 수행해온 일의 연장이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의 의지와 사랑의 신이 표방하는 의지는 사실상 동일하다. 이들 사이의 의지의 동일함은 사랑의 표현 행위가 곧 신적인 과업임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시인의 언어 행위는 신성을 담지하는 것으로 승화된다. 이러한 시인의 언술 행위는 사랑의 신이 주관하는 영토의 보전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시인에게 “잘 사랑하는 것”(loving well)은 그 욕망의 형식인 언어를 “잘 사랑하는 것”과 동일하다. 행위적 실천으로 드러낼 수 없는 시적 화자의 사랑은 잘 다듬어진 언술 행위로 승화될 때, “훌륭한 종말”(good end)로서 완결될 수 있다. 사랑의 물리적인 표현이, 이를 테면, “시적 화자의 이마가 붉어지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랑의 거절을 강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적 화자는, 스스로를 사랑의 담론적 행위에 예속시킨다. 이 시에서 사랑은 군사적인 이미지를 동반한 남성적인 과업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내면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담을 수 있는 수사적 무기, 시 형식에 천착하게 된 계기를 재현한다. 시는 시인의 정체성을 담아낼 수 있는 “무장”(armor)이며, 시인은 자신이 몰두하는 전장인 언술의 가치를 재확인한다. 

한 편, 와이엇의 「오래된 사랑」에서는 대상과의 경계가 모호해짐으로써 시적 화자의 주체성 성립 또한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The long love that in my thought doth harbour

And in mine heart doth keep his residence

Into my face presseth with wild bold pretence

And therein campeth, spreading his banner.

She that me learneth to love and suffer

And will that my trust and lust's negligence

Be reined by reason, shame, and reverence,

With his hardiness taketh displeasure.

Wherewithal into the heart's forest he fleeth,

Leaving his enterprise with pain and cry,

And there him hideth and not appeareth.

What may I do when my master feareth,

But in the field with him to live and die?

For good is the life ending faithfully.


첫 행에서 와이엇은 원문에는 없었던 “long”이라는 형용사를 “사랑/사랑의 신” 앞에 덧붙임으로써 사랑의 의미를 이원화한다. “long love”는 첫째, “오랜 동안 계속되어온” 사랑을 의미한다. 그 사랑은 시적 화자의 내면에서 그 기간을 연장하며 거듭되어온 사랑이다. 둘째, 그것은 “간절히 열망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랑의 신은 그 축적된 강렬함으로 자기 터전의 경계 밖으로 분출된다. 3행의 “presseth”라는 동사의 사용은 그 힘의 불가항력을 강하게 암시한다. 요컨대, 1행의 “long”은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정서의 격렬함을 지시하는 것이다. 또한 “long”은 욕망에는 끝이 없다는 것과, 그러니 그 욕망은 충족되지도, 경감될 수도 없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러한 “long”은 페트라르카의 시에서 볼 수 있었던, 언술행위로 매개되는 억압된 자아와 표현된 자아 사이의 공간적 거리감을 소멸시킨다. “long”을 통해서 시적 화자의 욕망은 언제나 충족되지 못하였으며, 그 욕망의 발화 행위는 반복적으로 좌절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표 현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와이엇의 자아는 물리적인 장소의 이동을 반복한다. 와이엇은 원문에는 없는 “harbour”와 “forest”를 덧붙임으로 감정을 물리적 전경으로 전환한다. 이에 시적 화자의 마음/사랑의 신은 “항구”(harbour)에서 “숲속”(forest)으로, 즉 “은신처”(harbour)에서 “황무지”(wildness)로 공간화되며 이동한다. 이러한 장소의 이동은 오히려 드러나는 곳과 드러나지 않는 곳의 경계를 소멸시킨다. 페트라르카의 시에서 사랑의 신은 화자의 “마음”으로 안전하게 도피하여 드러나지도 않지만, 와이엇의 사랑의 신은 그 속성의 강렬함으로 인해서 그 어느 장소도 안전하게 숨겨주지를 못한다. 사랑의 신은 이미 공간적 한계를 “비집고 나왔기”(presseth) 때문에, 사랑의 신이 후퇴한 “숲속”(forest)도 그다지 안전한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숲속과 “전장”(field)의 구분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미 두 장소는 이성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내면적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페 트라르카의 시적 화자에게는 사랑의 신에 대한 충성 행위에 합당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와이엇은 마지막 행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그 보상을 지연시킨다. 와이엇은 “사랑을 잘 한다는 것”(loving well)을 삭제하는데, 이는 시인의 생명인 언어를 삭제하는 것과 동일한 행위이다. 그는 시적 화자를 침묵시키며, “good”에 반어적 의미를 불어 넣는다. 시적 화자의 죽음/침묵은 언술의 진행을 막으며, 언술의 방향은 다시 원점으로 귀환한다. 화자의 내적 전투는 그 출구가 되는 형식을 창출하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과 눈물” 속에서 남아 있음으로 해서, 그 사랑의 신은 다시 “오래된 사랑”이 된다. 이는 곧 형식의 실패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와이엇의 시적 화자는 사랑의 신에 대한 훌륭한 대변자가 되지 못한다. 와이엇의 시적 화자는 그 넘쳐나는 정서 속에 오히려 동화된다. 그리하여 언술 행위를 가능케 하는 주체와 대상과의 거리는 사라진다. 다시 말해서 공간적 경계의 사라짐은 언어의 무능력으로 연결된다. 언어는 의미를 생성하는 차이 위에 기반한다. 마찬가지로 페트라르카의 시작의 동력은 대상과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와이엇의 시적 화자는 사랑의 충실한 포로일 수는 있으나 그를 대변할 수 있을 만큼의 적절한 거리감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무기력한 복종, 즉 감정에의 함몰 상태이다. 감정의 범람은 담화의 틀을 벗어나려고 하며, 시의 형식조차 와해시키려 한다. 사랑의 신과 동화된 와이엇의 시적 화자는 내파된 정서로 시의 결말을 명징하게 내리지 못한다. 이것은 페트라르카가 “잘 사랑하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형식화해내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와이엇에게 “마음의 숲”은 자신의 통제를 넘어서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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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대체 누가 사냥을 열망하는가」(Whose list to hunt)는 성차를 넘나드는 시적 화자의 심리적 전이 과정을 가장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는 시이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을 타자인 여성의 존재와 동일시함으로써, 즉 주체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통해서 그녀가 부여받은 권력의 속성을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의 궁극적인 결론은 세속적 인간이 누리는 경험이 상대적이면서 동시에 무력하다는 지극한 현실적 인식을 동반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현실적 인식의 바탕에는 오비드의 변신이라는 시적인 상상력이 작용한다. 오비드가 보여주는 변신의 미학은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의 자유로움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와이엇은 이 시 속에 악테온의 신화를 들여와 사냥꾼이 사냥감이 되는 변화, 즉 가학의 주체가 피학의 대상이 되는 심리적 전이과정을 극화함으로써, 주체와 객체 사이의 완전한 일치-비록 그것이 순간적일지라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치 속에서 절대 권력의 권위가 그 힘을 상실하는 시적 환영을 또한 생산해낸다.  


Whose list to hunt, I know where is an hind,

But as for me, helas, I may no more.

The vain travail hath wearied me so sore,

I am of them that farthest cometh behind.

Yet may I by no means my wearied mind

Draw from the deer, but as she fleeth afore

Fainting I follow. I leave off therefore

Sithens in a net I seek to hold the wind.

Who list her hunt, I put him out of doubt,

As well as I may spend his time in vain.

And graven with diamonds in letters plain 

There is written her fair neck round about:

“Noli me tangere for Caesar's I am,

And wild for hold though I seem tame.”


와 이엇의 이 시는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90을 번안한 것으로, 오비드의 악테온의 신화는 이들 시의 하위 텍스트로 위치하고 있다. 르네상스시기에 악테온 이야기는 페트라르카를 통해 사랑의 복잡한 심리 탐구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써 기능하게 된다(Vickers 111). 주지하다시피, 다이아나의 신성한 육체를 훔쳐본 대가로 사슴으로 그 육체적 형상이 변화된 악테온은 다이아나가 내린 저주로 인해서 자신의 참담한 상황을 말로 표현해낼 수가 없는 운명에 처한다. 그리하여 침묵을 강요당한 채 자신의 사냥개의 추적을 받으며, 결국은 사지가 찢어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페트라르카는 이러한 악테온의 신화를 로라를 향한 자신의 욕망, 그 욕망을 발설하는 언술의 주체로서 사용하였으며, 이후의 시인들이 시적 화자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시적 형식을 구성하는데 공헌한 바가 크다.

와 이엇의 악테온은 페트라르카가 마련한 욕망의 형식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변용한다. 이를 테면, 오비드의 악테온은 말하기를 금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와이엇의 악테온은 그 표현에의 노력이 이미 무용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와이엇은 페트라르카식의 한숨(“helas”)을, 그 한숨을 공유할 수 있는 동료집단에서 스스로를 추방시키는 데 따르는 심리적 부담감으로 변용한다. 그린블랏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 시의 “한숨”은 시적 화자의 “거리감과 우월감”(detachment and superiority; 147)의 표현이다. 거리감은 시적 화자가 고의로 동료 집단에게서 스스로를 추방시키는 것을 의미하고, 시적 화자의 우월감은 동료집단과 차별되는 인식의 깊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의 깊이는 시적 화자가 이미 사냥이 시작되면서부터 “사슴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뒷받침된다. 이것은 시적 화자와 사슴/여성 사이에는 동료 집단을 따돌리는 은밀한 공모가 존재함을 암시한다. 시적 화자는 동료들의 노력이 “헛된 수고”(vain travail)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무리에 앞서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온다”(leave off). 왜냐하면 그가 이미 “사슴이 되었기”(cometh be-hind) 때문이다. 시적 화자의 그녀와의 동일시는 시어의 교묘한 배열 방식을 통해서 드러나며 강화된다. 화자의 “마음”(mind)은 “hind / behind / mind / wind”의 운율과 병치됨으로써 이들 사이의 유사성이 무의식적으로 강조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여기에서 사슴과 바람은 그녀를 드러내는 객관적 상관물로서 기능하고, 화자의 마음은 다시 이들의 등가물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화자의 자기 소외는 그 자신이 사냥감/그녀로 심리적 전이를 일으킨 까닭으로 설명된다. 그러한 전이 속에서 시적 화자는 희생자가 권력의 폭압 앞에서 느끼게 되는 좌절감을 공유하며, 사냥꾼의 집단과는 다른 인식의 깊이를 갖춘다.

오 비드의 악테온은 와이엇과는 달리, 완전한 변신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정신과 육체의 분열상을 보여준다는 데 그 비극성이 있다. 오비드에서 악테온의 변신은 육체적 형상에 국한되어 있어, 그의 정신은 그 이전의 인간인 상태로 머물러 있다. 악테온은 육체와 정신이 분열된 상태이기 때문에, “궁전인 왕가로 되돌아가고”(Go home, back to the palace) 싶은 욕망과 “숲 속에 숨어있어야 할”(stay in hiding in the forest) 필요성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갈등을 일으킨다(Ovid 57). 그러나 와이엇의 마음(mind)은 “사슴”(deer / hart)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사슴의 운명에 순응하며 사냥꾼의 무리에서 벗어난다. 오비드에서, 사슴이 된 악테온은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곳으로 가야할 지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교착상태(impasse)에 빠지지만, 와이엇의 사슴은 자기 심경의 표현에 대한 욕망을 내세우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욕망이 소진된 상태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와이엇은 자기 내부에 잠재된 “악테온의 목소리”(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침묵시킨다. 마비된 악테온의 침묵은 그녀/여성이 언어에의 욕망과 강요당한 침묵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교착상태의 반향이다.9) 오비드에서 다이애나가 악테온의 말문을 막으며 육체적 신성이 인간의 언어 행위에 포섭되는 것을 금하듯이, 와이엇은 이러한 금기를 자신의 시 속으로 내면화해 들인다. 따라서 그의 시는 전진하지 못하고, 정지해 있거나 후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 를 들어, 페트라르카적인 소네트 양식은 총 14행으로, 8행의 옥텟(Octet)과 6행의 세스텟(Sestet)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소네트의 균형은 논증의 일관성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각행은 논증의 인과론에 따라 그 진술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스필러는 이러한 소네트 양식의 특징을 “직선성”(straightforwardness; 49)으로 요약한다. 그러나 와이엇은 페트라르카의 시를 번안하는 과정에서 옥텟과 세스텟의 순서를 도치시킨다. 와이엇의 소네트에서는 전반부 옥텟에서 시적 화자의 감정이 먼저 표현되고, 후반부 세스텟에 와서야 그 감정이 유발된 계기가 밝혀진다. 그러므로 옥텟은 오히려 세스텟의 결과로서, 이는 페트라르카적인 소네트의 논리적 인과 관계가 역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원인에서 결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의 근원자리로 회귀한다. 다시 말해서 와이엇의 시는 감정의 적절한 형식을 찾지 못하고, 논리를 뒤집으며 반복한다. 이것이 와이엇이 처한 교착지점으로, 그 바탕에는 페트라르카적인 시 형식으로는 더 이상 변화된 상황을 담아내지 못하는 좌절과 상실감이 깔려 있다.

페 트라르카의 시는 근본적으로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도대체 누가 사냥을 열망하는가」의 원문이 되는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90번은 그 좋은 예이다.


A white doe on the green grass appeared to me, with two golden

horns, between two rivers, in the shade of a laurel, when the sun

was rising in the unripe season.


Her look was so sweet and proud that to follow her I left every

task, like the miser who as he seeks treasure sweetens his trouble

with delight.


"Let no one touch me," she bore written with diamonds and

topazes around her lovely neck." It has pleased my Caesar to make me free."


And the sun had already turned at midday; my eyes were tired

by looking but not sated, when I fell into the water, and she

disappeared. 


위 소네트의 기본적인 얼개는 모순형용과 이항대립이다. 이 시의 심리적 전경은 이항의 극단 사이, 즉 “흰 사슴”의 범접할 수 없는 순결과 시적 화자의 세속성 사이에 있다. 특히 “둘로 갈라지는” 시냇가에서 홀연히 등장하는 사슴의 “둘로 갈라진 황금 뿔” 등은 이원론적 우주관에 대한 시각적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시적 화자에게 이 세상은 “설익은 계절”의 “고된 노동”이지만, 사슴에게는 그 설익음을 초월하는 자유와 권능이 주어져 있다. 여기에서 “나를 만지지 말라”는 금기는 시적 화자의 성적/시적 좌절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사슴의 초월적 매력을 배가하는 역할을 한다. 이 시에서 시저는 자비로운 권능자, 유일신으로, 신의 금기를 통해 사슴은 신성을 획득한다. 사슴, 시저의 세계와 시적 화자의 세계는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페트라르카의 이원화된 세계에서 성지와 속세 사이의 가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페 트라르카의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그의 시간관념에서도 반복된다. 페트라르카는 과거의 자아와 새로운 자아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그 간극에 대한 인식이 곧 시를 쓰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10) 이 시에서 시간적 간극에 대한 인식은 마지막 행의 “when”에서 표현된다. “when”은 시적 화자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분기점이다. 이 분기점은 욕망의 대상이 “그녀”에서 “나”로 전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사라지고, 나는 수장됨으로써 재생한다. 물은 신이 약속하는 세례로서, 세례는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킨다. 자아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통해서, 페트라르카는 “when” 이전의 자아, 만져볼 수 없는 사슴을 응시하던 그 자아 “밖”에서 자신의 비전을 형성한다. 로라가 상징하는 절대 순수의 영역과 시적 화자가 몸담고 있는 세속 사이의 간극은 로라의 사라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결코 좁혀질 수 없다. 페트라르카는 세계의 이원화를 영속화하며, 그 세계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구조화한다.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는 형식의 파편화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시적 화자의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공고해진다. 페트라르카의 타자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시인의 주체성에 대한 확증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와이엇은 욕망의 기원이면서 동시에 욕망의 철회를 야기하는 대상물에 대해서 그 접근 가능성을 허용함으로써, 페트라르카의 시가 기초하고 있는 이원론적 세계를 부정하고, 그로 인해 그의 시는 균형을 상실한다. 시적 대상은 더 이상 밤하늘의 “별/로라”와 같은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근원조차 파악할 수 없는 “바람”으로 변한다. 

와 이엇의 시에서 여성/사슴은 곧 “바람”으로 인식된다. 바람은 그 속성상 가시화될 수 없으며, 감촉으로만 전달된다. 그러나 그 감촉 또한 시저가 금하고 있으므로 허용되지 못한다. 결국 그녀의 존재 방식은 목에 달려 있는 언어적 표지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며, 그녀의 권력은 바로 이 담화 형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권력의 담론적 재현은 그 권력의 절대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와이엇에 와서 상당히 세속화된 권력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시저는 마지막 행, “길들여져 있는 것 같지만 붙잡기에는 길들여져 있지 않는”(wild for hold though I seem tame)의 양가적 의미로 인해서 오히려 그 권위가 실추된다. 시저의 권력은 그 담화에 대한 접근가능성으로 인해서 언제나 오용과 오해의 소지에 열려 있다. 언어를 통해서 표현되는 권력은 환영의 숙명을 피해갈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11) 시저의 권력의 담화는 시가 존재하는 양식과 유사하다. 언어적 표지를 통해서 사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시저의 욕망은 여성을 통제함으로써 시 형식을 창출하는 시인들의 욕망과 동일선상에 있다. 이 시에서 사냥은 이러한 페트라르카적인 욕망이 집단적으로 표출되는 문화적 형식이다. 사슴을 잡으려는 사냥꾼들의 욕망은, 벗어나려 하는 여성을 시라는 남성적 욕망의 형식 속에 가두어 두려는 욕망과 일치한다. 이러한 욕망은 여성에 대한 이상화, 추상화로 표출된다.  

그 러나 와이엇은 여성에게 동화됨으로써 여성의 포착불가능성을 모방한다. 시적 화자는 그녀/바람(wind)을 좇아, “숨을 헐떡인다”(winded). 여기에서 그의 숨결은 곧 바람이 된다. 시적 화자의 “마음”(mind)은 “바람”(wind)과 마찬가지로 형식의 구조화를 불허한다. 이것은 곧 담화의 휴지 상태로 이어진다. 이 시는 그 전체 구도에서 미결정 상태로 남는다.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여성은 외관상 길들여져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문명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녀의 실재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면이 그녀를 위험한 존재로 만든다. 그녀는 권력의 허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녀를 붙잡으려는 모든 욕망의 형식은 그 근거를 상실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냥은 그 시작부터가 이미 가망이 없는 사냥이었다. 와이엇은 이들이 허상을 쫒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다 앞서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들에게서 물러설 수 있다. 시저가 발생시키는 권력의 효과로서 기능하는 그녀는,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역으로 시저의 권력도 격하시킨다. 사슴으로의 변신을 자초하는 와이엇은 이미 오비드의 악테온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희생은 애초부터 노정되어 있었다. 권력의 희생자라는 와이엇의 인식은 권력의 또 다른 희생자인 여성과 교감할 수 있는 주된 계기로서 작용하고 있다.

시 적 화자의 여성과의 교감은 곧 금기를 깨려는 욕망의 형식이다. 와이엇과 여성은 자신들을 넘어서는 권력에 예속된 자들로서, 그 예속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권력의 허상을 바라본다. 이러한 인식은 숙명적인 고독을 동반한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오비드의 악테온과는 달리, 과거의 자아로 돌아가고자 열망하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지금까지 따라왔던 사냥을 다른 이들에게 넘기면서, 스스로를 이들의 맹목적 추구에서 분리시킨다. 시적 화자는 사슴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여성과 동화됨으로써, 시적 화자 자신 또한 길들여져 있는 것 같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그 불확정적인 세계를 누비며, 따라서 감히 만져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 전이의 과정을 통해서 시적 화자는 아직은 문명이 길들이지 못한 야생의 세계를 감지할 수 있다. 요컨대 와이엇의 시적 화자는 여인으로의 전이과정을 통하여 권력의 금기에서 비롯되는 절대적인 고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획득할 수 있다. 

타 자와의 교통, 그 시적인 변신의 과정은 신적인 힘의 모방과도 같다. 시인은 상상력을 통해서 타인의 자아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며, 또한 자신의 인식을 독자와 공유한다. 와이엇이 가진 권력이란 바로 이러한 능력이다. 그는 시를 통해서 스스로를 벌하기도 하고, 또한 자신을 구속하는 어떠한 형태의 권력에서도 순간적이나마 자유로워 질수 있다. 하나의 자아에서 빠져나와 다른 존재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의 숙명적 유한성을 벗어나 새로운 번식을 갈구하는 행위이다. 예술가는 현세의 죽음을 소거함으로써, 신적인 변신의 모방자가 되는 것이다. 와이엇은 이러한 모방을 통하여 자신이 처해 있는 당시 궁정의 문명 세계가 지닐 수밖에 없는 유한성으로부터 순간적인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그것은 같은 권력의 희생자인 여성과의 교감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그는 여성이 화자의 입장에 서도록 만드는가 하면, 자신이 여성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이 과정은 남성 화자가 존재해 왔던 기반의 파괴라는 또 다른 모순형용을 동반한다. 와이엇의 오비드와 페트라르카의 전유 과정은 곧 형식에 대한 회의라는 자기 모순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욕망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와이엇의 시는 항상 미결정 상태로 남아 있다.12) 이것은 페트라르카를 모방하면서도 그 틀로는 담아낼 수 없는, 헨리 왕조 시대의 새로운 감수성의 발현이라 할 것이다.



주 제어: 와 이엇, 소네트, 주체(성), 전이, 페트라르카, 젠더, 언어의 불확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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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Metamorphosis of the Poetic Subject in Wyatt's Love Poems


                                               
  Yangsun Chun


This article examines Wyatt's poetic subjectivity in the context of Petrarchanism. Unlike the Petrarchan lyric that maintains the unbridgeable distance between the poetic subject and the poetic object by silencing and objectifying the woman, Wyatt creates a unique poetic persona who is so mobile, so responsive to the other. He formulates shifting subjectivities by annihilating the distance between "I" and the poetic objects. Through this performative poetic fantasy in which exchangeable selves evenly exist, Wyatt's poetry, however, has to deal with the poetic "impasse", the self-annihilation of language. Crossing over the boundary of gender, this reformulation of Petrarchanism results in the indeterminacy of language, which is  especially made explicit in these poems: "They flee from me," "The long love," "Whose list to hunt."

In "They flee from me," "she" not only mirrors male behavior, but also demonstrates her knowledge about male pleasure. The lady in this poem, not as the passive recipient but as the active model, possesses the "I." She shapes the form of his body and measure of his language. This overlapping of gender is suggested by ambivalent poetic words, such as "dear heart," "this," and "like." Refusing to be the sexually inaccessible woman Petrarch illustrates, Wyatt's overtly sexualized ladies overtake the "I." He thereby loses hold of language. In "The long love," Wyatt likewise dislocates the "I" and his poetic subject remains unarticulated. In this sonnet, Love's distension reveals the sameness of field and forest and identifies the impotence of language in terms of the blurred borders. Unable to define difference, the poetic subject is unable to articulate. Finally, in "Whose list to hunt," the poetic subject emerges as the object when the hunter is transformed into the hunted, like Ovid's Actaeon. Petrarch's perception of the object always returns to an affirmation of the subject and the subjectivity of the poet, while Wyatt's transformation into the object functions as a vehicle of poetic doubt. If Petrarchanism idealizes the woman as idolator, Wyatt's "I" imitates the lady's elusiveness, a resistance to formulation, which ends the discourse that previously empowered the "I." In terms of becoming, his transformed self recognizes the illusion of the power represented by Caesar. However this new sensibility remains uncontainable. What Wyatt's poetic subject shares is the women's deconstructive impulses.


Key Words

Wyatt, Sonnet, Subject(ivity), Transformation, Petrarch, Gender, Indeterminacy of language


1)  와이엇의 시적 자아의 내면성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서로는 스티븐 그린블랏(Stephen Greenblatt)의 ꡔ르네상스 자아형성ꡕ(Renaissance Self-Fashioning: From More to Shakespeare) 외에도, 앤 페리(Anne Ferry)의 ꡔ내적인 언어ꡕ(The "Inward" Language: Sonnets of Wyatt, Sidney, Shakespeare, Donne), 엘리자베스 힐(Elizabeth Heale)의 ꡔ와이엇, 서리, 그리고 초기 튜더 왕조의 시ꡕ(Wyatt, Surrey, and Early Tudor Poetry) 등이 있다. '근대 초기'(early modern)라고 재명명되는 르네상스시기에 과연 '자아'라고 논할 만한 사적인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시기를 사적인 내면성에 대한 관심의 증폭과 아울러 근대적 의미의 자아가 태동하는 시기로 바라보는데 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자아의 발달 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할 때, 로이 포터(Roy Porter)가 편집한 ꡔ자아 다시 쓰기ꡕ(Rewriting the Self: Histories from the Renaissance to the Present) 가 도움이 될 수 있다.


2)  페트라르카의 로라는 시적 화자의 욕망에 의해서 이상화된 여성의 전형이다. 언어의 영역을 금지당한 로라는 그 부존의 속성을 통해서 시의 현존에 힘을 실어주는 역설적인 존재로서 기능한다. 언어는 그녀의 부재를 통해서 시인의 욕망과 결탁한다. 로라는 그 존재의 숭고함으로 인해서 오히려 생명력과 역사성이 희생되는 대가를 치른다. 그녀의 절대적 타자화는 시적 화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러한 궁정식 연애에 대해서, 라깡은 궁정식 연애는 여성을 불가능의 위치, 즉 'the Thing'의 위치에 둚으로써 고의적으로 ‘쾌락 원칙’을 위반하려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쾌락 원칙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욕망하는 것 자체의 쾌락을 연장하려는 “에 두른 길”이 다. 욕망은 근원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은 예술적 형식으로 승화된다. 라깡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근간을 이룬다. 여성의 숭고화 속에는 사회적으로 금기된 것들에 대한 심리적 규율이 내재되어 있다(152). 그 외의 ‘궁정식 연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접근방법을 사용한 분석으로 지젝과 이스트호프의 논의 참조. 또한 로라는 시적 주체의 완성을 위해서 자신의 신체는 파편화된다. 로라의 신체에 대한 파편화, 물신화에 대해서는 존 프레체로(John Freccero)와 낸시 비커스(Nancy J. Vickers)의 통찰을 참조할 것. 이들의 주 논지는,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파편화된 시 형식 속에 로라의 파편화된 육체를 기입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시적인 주체성을 구성한다는 것, 즉 남성 주체의 시적 자율성은 여성의 파편화된 육체를 대가로 확립된다는 것이다.


3)  본고의 이러한 주장에는 성과 젠더의 자연적인 특질을 부정하는 최근 페미니즘의 논쟁이 뒷받침되어 있다.  최근의 논쟁은 성과 젠더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현실이 아니라, 일종의 ‘행위 공연’으로서 특정한 모방으로 연출되는 것이라는데 초점이 주어진다. 그 모방은 사회적으로 이상화된 성에 대한 모방이지, 실제 성에 대한 모방이 아니다. 이렇게 젠더화된 이상에 대한 모방은 결코 고정된 안정성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 공연 때마다 반복되는 것이다. 특히 쥬디스 버틀러와 최근의 페미니즘 논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다이앤 엘람 참조.  


4)  본고에서 사용하는 와이엇의 텍스트는 Sir Thomas Wyatt: The Complete Poems. ed. R. A. Rebholz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78)에 의거한다.  


5)  이 시에 나타나는 시적 화자의 수동성, 그 ‘교 착지점’에 대해서, 그린블랏은 시적 화자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공격성이 위장된 형태라고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시적 화자가 이렇게 수동성을 가장하는 이유는 남성의 공격적인 성욕은 수동적인 상태로 변질되고 나서야 비로소 만족될 수 있기 때문이며, 아울러 이것은 집단적인 정신 구조인 문화적 가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그린블랏이 상대적으로 간과하는 부분은 문화적 가정이 개별적인 정서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그 표현불가능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여성의 존재이다. 특히 여성의 입장에서 그린블랏을 반박하는 논의로는 마구리에트 월러 참조.


6)  ‘페트라르카적인 자아’는 정서와 사고 사이의 균열, 과거의 자아와 현대의 자아 사이의 균열 등의 안티테제가 갈마들며 등장한다. 특히 소네트 양식을 통해서 각기 진술된 경험은 불연속적으로 나열되는데, 이러한 페트라르카 시의 불연속성은 궁극적으로 시를 쓰고 있는 현재의 ‘나’, 그 주체성을 형성하는데, 통일적으로 기여하는 수사적인 장치이다. 스필러는 경험의 조각들에 대한 페트라르카의 장악력을 높이 평가하며, 특히 소네트는 순간적인 균형을 완성시키는 형식이라고 말하고 있다(49).   


7)  토마스 그린은 필자와는 다른 입장에서 얻어진 결론이기는 하나, 이 시의 마지막 행, 나는 그녀가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지 알고 싶다”(I would fain know what she hath deserved)가 의미하는 것은 나는 어떤 언어가 적합한지를 알고 싶다”(I would fain know what language is appropriate), 나아가 “내가 어떠한 시를 써야 하는지를 알고 싶다”(what poem I ought to write)라고 분석한다(256-7). 그만큼 의미론적 위기 자체를 주제화하는 것은 와이엇 시의 골간을 이루는 중요한 문제이다.


8)  페트라르카의 서정시는 Petrarch's Lyric Poems: The Rime Sparse and Other Lyrics, trans. Robert M. Durling (Cambridge: Harvard UP, 1976)에서 인용하였다.


9)  이 시에서 문제화되는 시적 화자의 교착 상태는 대부분의 평자들에 의해서 남성 화자의 문제, 즉 시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을 남성 화자의 성적 욕망을 풀어내는 대상, 내지는 주물로 고착시킴으로써 비로소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남성 주체의 폭력성에 관한 문제로 해석되어 왔다. 예를 들어 그린블랏은 이 “시 전체가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진행하는 통로에 서서 일련의 미결정(suspension) 상태에 빠져 있다”(147) 고 말한다. 그는 시적 화자가 사냥에서 물러나 스스로를 분리시키려 시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물러서서 사냥을 포기하지도 못하는, 서로 상반된 의도의 강렬한 병치 상태에 주목한다. 이 때, 난국에 처한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다시 처음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9행에서 시는 다시 처음의 어구를 되풀이한다. 와이엇은 사냥에서 자신을 제외하려는 시도를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는 그의 지속적인 강박관념을 보여주는 바, 이것이 바로 시인의 “거 대한 함축의 힘”(immense power of implication; 146)에 의한 시적 효과이다. 그린블랏의 견해에 따르면, 시인이 이러한 교착상태에서 빠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시저로 대변되는 세속자의 절대 권력에 있다. 시저는 시적 화자가 성적 대상, 즉 여성을 전유하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을 가로막는 강력한 힘으로 존재한다. 그린블랏이 말하는 와이엇의 자아 형성(self-fashioning)은 따라서 절대 권력인 시저와 욕망의 대상인 여성 사이의 관계의 지배를 받으며, 그 성격은 시인의 좌절과 상실이라는 내면세계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린블랏의 이러한 읽기는 그 분석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시저의 절대적인 권력은 이미 고정되어 있으며, 그 절대 권력의 재현 속에서 시적 자아가 누릴 수 있는 상대적 자율성이 간과된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마구에리트 월러(Marguerite Waller)는 바로 이점을 지적한다. 그녀에 의하면, 그린블랏의 논의는 와이엇의 시가 “수 사적인 권력 놀이의 행위”(rhetorical power playing)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고, “기 존의 권력 놀이의 결과물”(the results of a preexisting power play)로만 파악한다는 데 그 문제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와이엇의 시는 “수행적인 몸짓”(perfomative gesture)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럴 경우 절대 권력으로 비춰지는 시저와 시인의 대결구도는 “거 짓 전투”(fake combat)로서, 시저는 어디까지나 와이엇이 만들어낸 권력임을 주지해야 한다는 것이 월러의 주장이다. 따라서 절대 권력의 담론화는 시인의 수행적 글쓰기를 통해서 시가 의미화 작용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기반으로서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구에리트 월러의 해석은 시적 환영 안에서는 시저의 권력이 상당히 우발적인 사건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월러는 시적 자아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는 와이엇의 시적 자아가 여성의 “비 동일성”(non -identity)을 배경으로 삼아 구축되고 있다는 논지를 펴면서 결국은 시적 화자와 시저의 공모관계 속에서 여성은 “구 조적 필요에 의해서 요청되는 존재일 뿐,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멸시되고, 오용되고 있다”(178) 는 결론을 내린다. 그녀의 이러한 결론은 지금까지의 권력의 상대성에 대한 정치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시라는 허구적 형식을 통해 시적 화자의 자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중요성을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린블랏과 월러는 그 상이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와이엇이 직면한 난국을 사냥꾼의 입장에서, 다시 말해서 기성 권력에 속한 남성 화자의 입장에서만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본고의 주장은 이들 평자의 장점을 인정하지만, 궁극적 주장은 와이엇의 교착 상태가 근원적 측면에서 여성의 입장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10)  페트라르카의 「시편들」(Rime Sparse) 은 그 첫 번째 시에서부터 “젊 었을 때의 실수”로 점철된 “과 거의 나”(when I was)와 현재 이 시를 쓰고 있는 “현 재의 나”(what I am now)를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그 시간적 간극이 이 시집을 이끌어가는 주요 모티프임을 밝히고 있다.


11)““Noli me tangere for Caesar's I am”이 인유하는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20:17에서 예수가 승천할 당시 마리아 막달렌에게 했던 말과, 또 하나는 마태복음 22:21의 “시 저의 것은 시저에게 주라”는 것이다. 특히 “Noli me tangere”는 불가타 성서(Vulgate)의 라틴어를 와이엇이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구리에트 월러에 의하면, 와이엇이 인유하고 있는 성경 구절은 시저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예수가 “나 를 만지지 말라”고 말한 순간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모호한 순간이다. 승천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는, 아직 역사, 즉 인간의 의미화작용의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여전히 오용과 오해의 소지에 열려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사슴이 의지하고 있는 시저의 권력도 언제나 오용과 오해의 소지에 열려 있는 것이다. 한편, “시 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주라”는 단락을 환기시켜 볼 때도, 시저는 금전적 유통과 같은, 가치의 유통, 변화와 연결된다. 따라서 시저의 권력은 교환 가치라는 환영에 의거하는, 또 하나의 허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시저의 금지는 인용과 근접을 허용하기에 언제나 변형될 수 있다. 언어를 통해서 나타나는 권력은 그 실체는 알 수 없는 환영으로 존재한다. 특히 언어는 공동의 자산이기에 그 권력의 기원은 더욱 모호해지고, 언어를 통한 담화 형식에는 또한 최종적인 결론이 있을 수 없다(170-2).


12)  토마스 그린은 와이엇의 시에 나타나는 의미의 불확정성, 즉 의미론적 위기 현상을 모더니티의 등장으로 봉건적 사회 질서가 상실되어 가는 과정과 연결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와이엇의 시를 모더니티가 야기하는 불안정성을 해결하려는 “안 정화의 과정”(a process of stabilization; 260)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와이엇의 시에 나타나는 모더니티의 문제는 긍정과 부정 사이의 가치 판단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적 화자를 압도하는 무언의 내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즈는 “정 서의 구조”(structures of feeling)를 설명하면서, “무 언가 충분히 발화의 형태로 나타날 수는 없으나, 활동적이면서 압력을 행사하는”“전 -창발성”(pre-emergence)의 문화구조를 상정한다. 와이엇의 시가 표출하는 정서는 오히려 윌리엄즈의 이러한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