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스런 상징”과 “천상의 처녀”:

" 선녀여왕"의 레드크로스와 가이언*




임 성 균





  "선녀여왕"(The Faerie Queene) 제2권의 첫 부분에서 절제의 기사 가이언 (Guyon)이 레드크로스(Redcross)와 대적하는 장면은 단순한 주인공끼리의 임무 교대 이상의 의미가 있다. 아키마고(Archimago)는 레드크로스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 못 이겨 그 “기사와 비슷한 덕과 결점을 가진 자”(as vertues like mote vnto him allye) (II.i.23)1)를 찾아 서로 싸우게 하는데, 그가 바로 가이언이다. 두 기사는 서로를 향해 돌진하지만 격돌하기 바로 직전에 서로의 방패에 새겨진 그림을 보고 싸움을 멈춘다. 가이언은 레드크로스의 방패에서 “성스런 상징”(The sacred badge)인 십자가를 보았고, 레드크로스는 가이언의 방패에서 “천상의 처녀”(heavenly Mayd), 즉 선녀여왕을 본 것이다. 스펜서가 두 기사의 위치를 대립구도로 설정하고 서로에 대하여 창을 겨누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김호영은 두 기사의 화해가 서로 대립되는 듯이 보이는 성스러움(holiness)과 절제(temperance), 즉 기독교적 윤리관과 고전적 윤리관이 실제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하고 있다(308). 과연 작품에서 레드크로스는 기독교적 윤리관을 대변하고 있으며, 가이언은 고전적 윤리관을 대변하고 있다면, 두 기사가 각각 제시하고 있는 가치는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인가? 특히 스펜서가 랄리(Raleigh) 경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선언한대로 작품의 목적이 “도덕적이고 예의바른 훈련을 통해서 신사, 또는 고귀한 인물을 키워가기”(to fashion a gentleman or noble person in vertuous and gentle discipline) (737) 위한 것이라면, 두 기사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가? 이 논문은 "선녀여왕" 제2권을 통해서 가이언이 대변하는 덕목이 무엇이며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러한 덕목의 특성이 레드크로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봄으로써 작품의 의미에 접근해보려는 시도이다.

   절제의 기사, 가이언은 고전적인 가치와 개신교적인 이상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는데 있어서 시인의 어려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쩌면 그러한 어려움은 시인이 이교도적인 구조를 가지고 개신교적인 윤리를 제시하려는 데에서 기인하는 듯이 보인다. 우선 작품이 내세우는 이상적인 덕목은 개신교와 어울리지 않는다. 스펜서의 편지에 나타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한 열두 가지 개인적인 덕목”(the twelve private morall vertues, as Aristotle hath devised) (737)은 분명히 고전적인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시인이 작품의 여러 일화에서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오비드(Ovid)와 버질(Virgil)은 종종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드러내 보이는데 방해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2)

   제1권에 등장하는 레드크로스 기사는 가이언에 비해서 좀 더 쉽게 이러한 어려움에서 비껴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대변하는 성스러움이라는 덕목은 (그것이 과연 엄밀한 의미에서 윤리적 덕목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레드크로스는 적어도 작품의 외형적인 구조 안에서는 성스러움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그가 선택받은 기사이고 결국에는 성스러움의 덕을 성취하여 잉글랜드의 수호기사인 성 조지(St. George)라고 불리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텍스트 안에서 그는 교만-죄-타락-절망-회개-속죄-구원의 길을 걷는 전형적인 기독교적 인간이다. 에러(Error)와의 대면으로 시작해서 작품 안에서 그가 겪는 모든 모험들은 모두 그가 성급하고 교만하며 야심만만하고, 육욕적이며, 유혹에 약하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자신이 수호해야 하는 우나(Una)를 버린 것, 산스포이(Sansfoy)와의 결투, 자만의 집(House of Pride)을 방문한 것, 두엣사(Duessa)를 향한 구애, 그리고 절망(Despair)과의 논쟁 등은 모두 레드크로스가 이미 성스러움을 성취한 기사라기보다는 신의 은총을 받아 그것을 성취해야 하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나가 상징하고 있는 진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적들을 물리칠 수 없었을 것이며, 신의 은총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용을 무찔러 상징적인 에덴동산을 회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용에게 승리를 거둔 후에도 우나의 도움이 없었다면 레드크로스는 자신이 기사의 진정한 배우자라고 선언하는 두엣사와 전령으로 변장하고 갑자기 결혼식장에 뛰어든 아키마고(Archimago)의 실체를 드러내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개신교적인 만인(everyman)으로서 레드크로스는 끊임없이 신의 간섭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의 구원은 자기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달려 있다.

  하 지만 가이언의 덕목은 고전적인 것으로서 반드시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루이스 밀러(Lewis H. Miller, Jr.)는 레드크로스가 타락하지만 필연적으로 신의 은총에 의해서 구원을 이루는 신실한 기독교도라면, 가이언은 절제라는 내부적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끝없이 자신을 단련하여야 하는 “자연적”(natural) 인간이라고 지적하면서 제2권이 제시하는 덕목이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Secular" 161). 또 다른 곳에서 밀러는 성스러움과 절제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 . . 속죄만 완벽하다면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성스러움의 덕목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절제라는 덕목의 본질은 그처럼 신성한 용서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절제란 내부적인 조정을 가정하고 있는 자연적인 덕목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아무것도 그 속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신의 은총은 무절제한 인간을 절제심이 있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구제해주지는 않는다. 인간은 그 자신이 스스로 절제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Phaedria" 38)


매 들론 골키(Madelon S. Gohlke)는 "선녀여왕"에서 고전적인 절제를 통하여 궁극적인 덕을 완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제2권이 다루고 있는 것은 절제라는 덕목 그 자체라기보다는 “타락한 인간의 현실과 타락하지 않은 자연적인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 도덕관 사이의 갈등”이라고 제안하고 있다(124).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레드크로스 기사가 제1권의 마지막에서 자신이 성취한 결실을 즐기게 되는 반면 절제의 기사 가이언은 마지막에도 편안함이나 만족함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결말에 도달할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사랑과 전투 사이에서 분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33). 그렇지만 만일 절제가 실제로 제한된 덕목이어서 그를 소유한 사람이 구원은 차지하고라도 궁극적인 성취감이나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기독교적인 도덕관 안에서 그러한 덕목을 칭송해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더구나 우리가 성스러움을 제외한 "선녀여왕"의 모든 덕목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쿠스 윤리학"(The Nichomachean Ethics) 에 근거를 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작품이 과연 기독교가 이방 덕목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쓰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캐롤 캐스키(Carol V. Kaske)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2권은 제1권이 부정했던 전형적인 기독교 인문주의의 방식, 즉 이방 문화의 가장 우수한 점이 얼마나 기독교와 가까운 것인지를 확언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절제라는 덕목이 가지는 혼합적인 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43). 비록 절제라는 덕목이 명확히 인문주의적이라 할지라도 스펜서는 그것을 개신교적 도덕률과 통합하여 인문주의적 이상과 개신교의 이상, 자연과 은총, 그리고 어쩌면 시적인 미학과 종교적인 진리 사이의 관계를 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스펜서에게는 절제라는 덕목이 인문주의적 기원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도덕률과 반드시 상치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절제는 모든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도덕적 원칙 중 하나인 것이다. 제2권의 서두에서부터 스펜서는 이성(Reason)의 목소리를 통해서 가이언을 인도하여 “과업을 잘 마치고 소망하는 하늘나라에 / 그대의 지친 쪽배를 도착시킬 수 있도록”(well to end thy warke, / And to the wished hauen bring they weary barke) (i.32) 하는 존재가 바로 신의 섭리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성인들 중의 한 명”(a Saint with Saints)으로 자신의 자리를 이미 확보한 레드크로스도 자신의 성취가 모두 신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제 손을 자신의 권세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여

이 공적을 이루어내신 그분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선 한 의지 외에는 제게 아무런 공로도 없습니다.

제 가 한 모든 것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His be praise, that this atchieu'ment wrought,

Who made my hand the organ of his might;

More then goodwill to me attribute nought:

For all I did, I did but as I ought. (i.33)


가 이언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제부터 새로 출발하여 달려갈 길을 가야” (Must now anew begin, like race to runne) (i.32) 하는 것뿐이다. 그는 자신이 신의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인문주의적 도덕은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기독교도로서 그는 절제의 덕을 실천해야 하며, 앞으로 그의 앞에 펼쳐질 모험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도덕적 훈련이 언제나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스펜서는 전투적인 캘빈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적 성향에는 당대의 영국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다분히 가톨릭적인 면이 보인다. 그의 "양치기 달력"(The Shepheardes Calender) 은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중세 후반에는 사람들의 삶이 성모의 날(Lady Day), 라마스(Lammas), 마이클마스(Michaelmas), 사순절기(Lent) 같은 종교적인 축일이나 기념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며, 1493년 프랑스에서 처음 시작된 양치기 달력은 엘리자베스 시대까지 가장 대중적인 출판물 중 하나였다(Duffy 41, 50).3)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 종교개혁가들은 교회에서 가톨릭의 흔적이라고 여겨지는 우상적 잔재들을 모두 몰아내기 위하여 힘을 기울였으며, 그리스도의 일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모든 축일들과 성자들을 교회 밖으로 쫓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스펜서의 작품에서 우리는 여전히 레드크로스가 성스러움의 집(House of Holiness)에서 목격한 것처럼 많은 성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I.x.57), 결국 주인공 자신도 영국의 수호성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대 자신도 지금 보고 있는 저 성인들 중에 끼어서

성 인이 될 것이고, 또 그대의 고국에 대해 친구이자

수 호자가 될 것이다. 그대는 성 조지라고 불리우며

승 리의 상징, 행복한 땅 영국의 성 조지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For thou emonst those Saints, whom thou doest see,

Shalt be a Saint, and thine owne nations frend

And Patrone: thous Saint George Shalt called bee,

Saint George of mery England, the signe of victoree. (I.x.61)


비 록 스펜서의 작품에 등장하는 성인들이 신과 인간들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시인의 태도는 전투적인 캘빈주의와는 상반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선녀여왕" 제2권을 포함하여 그 이후에 스펜서가 내세우는 고전적인 덕목들은 그의 전투적 개신교의 이상과 어떻게 어우러지는가? 적어도 작품은 결코 절제라는 덕목이 이방적인 것이어서 기독교적인 것으로 대체되거나 덧씌워져야 한다고 암시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이언이 대변하는 덕목이 고전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선녀여왕"에서는 인문주의적 덕목인 절제가 다른 세속적인 덕목들과 함께 진정한 기독교 귀족을 양성하기 위한 중요한 교육적 목표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맘몬의 동굴(Mammon's Cave)에서의 사건이나 희락의 소굴(Bower of Bliss)을 파괴하는 것을 포함한 가이언의 모험을 인문주의적 도덕과 기독교적 도덕의 대립구도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떤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 예컨대 밀러(Miller)는 가이언이 제7칸토에서 은총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을 때 제2권이 표방하는 고전적 우주관이 기독교적인 우주관으로 대체된다고 주장하고 있다(“Secular" 160). 또한 김호영은 제2권에서 드러나는 “고전적 윤리관과 기독교적 윤리관의 역동적인 관계”에 주목하면서 고전적 윤리관을 대변하는 가이언이 제7칸토 이후에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진정한 기독교적 윤리관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309-19). 한편 골키는 가이언이 궁극적으로 고전과 기독교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제1권 이후에 스펜서는 고통스런 인간적 경험을 영원에 대한 기대로 흡수, 승화할 수 있는 영구불멸의 도덕적 질서를 성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140). 그러나 "선녀여왕" 제 2권에서 “영구불멸의 도덕적 질서”―만일 이 영구불멸함이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라면―를 찾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과도한 것이다. 왜냐하면 개신교적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적인 그 어떤 것도 영원하거나 참되거나, 심지어는 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 안에서 가이언의 임무는 궁극적인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아크레시아(Acracia)를 굴복시킴으로써 세속적인 유혹의 집합체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타락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개신교적 만인으로서 가이언은 파머(Palmer)에 의해 형상화된 이성의 통제 하에서 절제라는 자신의 덕목을 사용하여 인생의 노정을 마칠 때까지 여러 가지 형태의 유혹과 싸워야 한다.4) 그리고 나서 그가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을지 아닐지는 신의 섭리에 달린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에서 절제의 기사는 누구에게 명령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떠맡는다는 사실이다. 스펜서가 랄리 경에게 보내는 1589년의 편지에 의하면 가이언이 선녀여왕에게서 임무를 하사 받는 것으로 설정 되어 있다.


둘 째 날에는 한 파머가 두 손이 피로 물든 아기를 안고 들어왔는데, 파머는 그 아기의 부모가 아크레시아라고 부르는 마녀에게 살해당했다고 하소연하면서, 이 과업을 담당해줄 기사 한 사람을 자신에게 지정해 달라고 선녀여왕에게 간청했습니다. 그 일은 가이언 경에게 부과되었고, 그는 곧바로 그 파머와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738)


그 러나 막상 7년 후에 출판된 작품에서 가이언과 팔머는 숲에서 “우연히”(as chaunst) 아기의 어머니인 아마비아(Amavia)의 비명소리를 듣고, 죽어가는 그녀에게서 아크레시아와 희락의 소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는다. 가이언은 폭압적인 열정 앞에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누구도 그것을 해제할 수 없는 한 신성한 맹세를 하였다”(Bynempt a sacrred vow, which none should aye release) (i.60).

   어째서 실제 작품은 시인의 원래 계획과 달라진 것일까? 이에 대한 설명은 가이언의 상황을 레드크로스의 경우와 비교해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레드크로스의 임무는 그에게 부여된 것이다. 즉 선녀여왕이 그에게 임무를 하사하였고 우나가 가져온 갑옷이 그에게 꼭 맞음으로써 그가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격자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용을 무찔렀을 때, 우리는 그가 주어진 과업을 완수하였으며 이후로는 점차 성스러움이라는 덕목을 성취하여 성인이 될 것이라는 타당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성스러움이나 구원의 성취와는 달리 절제라는 덕목의 성취는 외부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의 처음부터 가이언은 그 스스로 어떤 모험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여야 하며, 그에게는 힘을 다하여 이루고 나서 그 성취에 대한 보상을 받으며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있는 그 어떤 임무도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가이언이 맘몬의 동굴을 방문한 후에 졸도하는 사건은 그동안 많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아왔다.5) 또한 제2권에서 이 사건의 위치가 마침 제1권에서 레드크로스가 최대의 위기를 맞는 중간부분, 즉 칸토 7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이언이 여기서 실제로 유혹에 패배한 것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구조적으로도 절제의 기사가 작품의 중간에서 패배한 후 “알마의 집”(House of Alma)에서 절제로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서, 마침내 모든 육체적인 유혹의 원천인 “희락의 소굴”을 쳐부순다는 순서가 매우 타당한 듯 보인다. 제1권에서 레드크로스 기사는 정확히 같은 순서를 밟고 있다. 주디스 앤더슨(Judith H. Anderson)은 가이언의 잘못이 페드리아(Phaedria)와 맘몬의 유혹을 둘 다 지나치게 냉혹하게 거절한 점에 있다고 보고 이성의 도움이 없이 홀로 있는 가이언이 중용을 지키지 못한 채 성욕과 편안함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도한 거부의 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거절은 진공상태 밖에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175).6)

   그러나 작품에서 화자가 페드리아를 거절한 가이언을 칭송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화자는 제6칸토의 첫 번째 연에서 “극심한 괴로움”(grieuous paine)보다 “신나는 즐거움”(joyous pleasure)에 있을 때 중용을 유지하기가 더욱 어렵다고 설명한 후, “하나 도덕심은 그 둘 다에게 승리를 거두고, / 가이언은 두 가지 모두에서 훌륭한 자제력을 보인다”(vertue vauntes in both their victories, / And Guyon in them all shewes goodly maisteries)(vi.1)고 선언하고 있다. 페드리아의 유혹에 맞서 절제의 가사는 “잘 절제하면서, 어리석은 욕망을 눌렀으며”(fairely tempring fond desire subdewd) (vi.26) 성공적으로 그 섬을 떠난다. 심지어는 아틴(Atin)의 비난과 마주쳤을 때도 가이언은 “강력한 이성을 가지고 연약한 감성을 다스리며”(with strong reason maistred passion fraile)(vi.40) 유혹을 극복한다. 따라서 가이언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거나, 앤더슨의 말대로 그가 “자신의 본성을 거절했다”(175)고 그를 책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기사가 맘몬의 동굴에서 겪은 경험에 대해서도 그와 똑같은 진단을 내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동굴에서의 그의 행동이 어쨌거나 그 직후의 실신을 가져오게 했기 때문이다.

   맘몬의 동굴―“땅속 깊숙이 아래를 향해 뚫린 구멍”(That deepe descended through the hollow ground) (vii.20)―에서 가이언이 사흘 동안 겪은 경험은 예수가 죽은 후 사흘 동안 죽음과 지옥의 세력을 물리친 사건과 비교할 수 있거나, 또는 밀턴(Milton)의 "복낙원"(Paradise Regained) 의 소재가 된 광야에서 예수가 겪은 세 번의 유혹과 비교할 수 있겠다. 컬린의 주장대로 맘몬의 유혹 뒤에 숨겨져 있는 죄악들은 탐식(gluttony), 허영(vainglory), 그리고 허욕(avarice)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157). 그런데 가이언은 모든 유혹의 실체를 이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친다. “그러나 기사는 시종일관 신중하고 현명했으며, / 그 자의 기만적인 흉계를 잘 간파하고 있었기에, / 육욕이 자신의 안전을 해치도록 허용치 않았다”(he was warie wise in all his way, / And well perceived his deceiptfull sleight, / Ne suffred lust his safetie to betray) (vii.64). 그러나 그는 맘몬의 유혹을 성공적으로 이겨내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혼절하고 말았으며, 그로 인해서 자신의 목숨과 아크레시아를 파괴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이언에게 부족했던 점은 과연 무엇인가?

   기사의 졸도가 음식과 휴식의 부족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러한 음식과 휴식은 맘몬이 유혹의 절정에서 “황금의 과일”(gruit of gold)과 “은빛 의자”(siluer stoole) (vii.63)라는 형태로 그에게 제공했던 것들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가이언의 졸도가 자신의 몸에 필요한 것들을 성공적으로 거절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캐스린 윌리엄즈(Kathleen Wiliams)는 가이언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맘몬에게 빠뜨릴 수도 있었던 음식과 수면을 거절해야 하는 꼭 필요한 값”(61)을 지불한 것이라고 설명하며 가이언은 맘몬의 동굴에서 실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의 졸도를 성공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비록 우리가 그의 졸도가 자신의 육체적 필요를 억제한 결과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기절을 유도한 그의 행동을 도덕적인 탁월함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비평가는 이것을 신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고전적, 자연적, 또는 세속적 도덕의 한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컬린에 의하면 “비록 자연적인 인간이 처음에 아담이 빠져들었던 죄악의 삼대 요소를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연적인 인간은 ‘인간인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체적인 연약함을 혼자 힘으로 극복할 수는 없다”(168). 어쩌면 인문주의적 도덕인 절제를 대변하는 기사가 자신의 육체적 필요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은 채 세속적인 유혹을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가이언의 한계라고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맘몬의 동굴이 대체로 고전적인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플루토의 문”(the gates of Pluto), “스타이지언의 법”(Stygian lawes), “아라크네”(Arachne), “타이탄의 족속”(Titans race), “야망”(Ambition)의 “거대한 황금사슬”(a great gold chain), “필로티메” (Philotime), 소크라테스의 죽음, “헤라클레스”(Hecules), “이데아의 여인들”(Idaean Ladies), “코키터스”(Cocytus), 그리고 “탄탈러스”(Tantalus). 그런데 가이언이 맘몬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선택한 것은 세상에 대한 기독교적인 태도이다. 그 는 악마의 첫 번째 유혹에 대해 자신은 재물이란 것이 “모든 혼돈의 근원”(roote of all disquietnesse)이라고 여긴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세속적인 것의 무상함을 강조한다: “왕국도 그대의 것이 아니고, 왕권도 아니오. / . . . 성스러운 왕권이 조각조각 쪼개지는가 하면, / 자줏빛 두루마기는 많은 상처로 피가 엉기고, 성이 기습받고, 큰 도시들이 격파되고 불타오”(Ne thine be kingdomes, ne the scepters thine. / . . . the sacred Diademe in peeces rent, / And purple robe gored with many a wound) (vii.13). 인간 타락의 역사에 대한 가이언의 해석도 또한 고전적인 황금시대보다는 에덴으로부터의 타락에 의존하고 있다:


옛 적에는, 세상이 처음 피어나던 어린 시절에는,

창 조주의 은총에 아무런 오점도 찾아볼 수 없었고,

모 든 사람들이 주권자가 하사하신 풍요로운 선물을

기 쁜 감사함과 나무랄 데 없는 진실로 받아들였오.

그 때는 인간들의 행복함이 천사들의 삶과 같았오.

그 런데 후대의 오만함이, 옥수수로 기른 가축처럼,

자 신들의 풍족함을 악용하고, 비계가 부풀어 온통

방 종한 육욕에 탐닉하게 되어, 절제된 중용의 도와

처 음에 자연스럽게 필요했던 수준을 지나치기 시작한 것이오.


The antique world, in his first flowring youth,

Found no defect in his Creatours grace,

But with glad thankes, and unreproved truth,

The gifts of soveraigne bountie did embrace:

Like Angels life was then mens happy cace;

But later ages pride, like corn-fed steed,

Abusd her plenty, and fat swolne encreace

To all licentious lust, and gan exceed

The measure of her meane, and naturall first need. (vii.16)


가 이언이 인문주의적 영웅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는 기독교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유혹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맘몬이 자신의 딸인 필로티메를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가이언은 자신이 “연약한 육신을 가진 세상사람”(fraile flesh and earthly wight) (vii.50) 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스펜서는 고전적인 절제를 대변하고 있는 가이언을 통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교도의 행실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이언이 유혹을 단지 거절하는 것만으로는 죄악에 대해 승리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맘몬의 유혹은 거부되었으나, 파괴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사가 혼절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이러한 관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동굴에서 그의 행동은 사실상 모든 기독교인들이 따라가야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가이언의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처음에 자신의 처소를 방문해보라는 맘몬의 제안을 수락한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제7칸토의 요지(argument)에서 스펜서는 가이언이 맘몬에게 “유혹”(tempted) 당하여 “그 자의 비밀 저장품을 보려고 / 밑으로 안내되어 내려간다”(led downe, / To see his secret store)고 선언하고 있다. 가이언은 “믿음직한 안내자를 잃고”(lost his trusty guide) “자기 자신의 도덕심과 칭송할만한 업적을 / 생각하면서 가면서 내내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evermore himselfe with comfort feedes, / Of his owne vertues, and prayse-worthy deedes) (vii 2). 자의에 따라 진리를 버린 레드크로스와는 달리, 가이언이 이성과 헤어진 것은 그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사실상 그는 “자신의 안내자를 뒤에 남겨두기는 싫었지만”(loath to leaue his guide behind) (vi.20),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었기에”(might not backe retyre) (vi.20) 어쩔 수 없이 홀로 여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온전히 자신의 도덕심에만 의지한 채, 하데스(Hades)의 막강한 유혹을 마주치게 되자 그의 숭고한 도덕적 정신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육체와 세속적인 본성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가이언이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 한 행동은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피해야 할 실수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행동은 모든 인간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간적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 화자가 제8칸토의 서두에서 선언하고 있듯이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악하기”(wicked) 때문에 항상 신으로부터의 “도움” (succour)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후에 아서도 역시 말레거(Maleger)와 싸울 때 은총이 필요했으며, 화자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처럼 인간의 처지는 약하고 목숨은 위태로워, / 이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해체되기 전까지는, / 결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So feeble is mans state, and life vnsound, / That in assurance it may neuer stand, / Till it dissolued be from earthly band) (xi.30).

   분명한 것은 스펜서가 심증적으로 가이언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문주의적인 도덕에 대한 시인의 태도는 천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신의 대리인으로 나타난 천사는 파머에게 기사의 안위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라고 하면서도 자신이 끝까지 기사를 돌보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는다:


하 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이 친애하는 이의

안 전에 대한 책임을 이제 그대에게 양도합니다.

하 지만 나는 떠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끝까지

기 사를 돌봐줄 내 책임을 잊지도 않고 있으니,

영 원히 이 기사를 도울 것이며, 그와 나 자신의

원 수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The charge, which God doth unto me arret,

Of his deare safetie, I to thee commend;

Yet will I not forgoe, ne yet forget

the care thereof my selfe unto the end,

But evermore him succour, and defend

Against his foe and mine. (viii.8)


신 이 천사에게 맡긴 임무가 가이언의 안전이라는 사실은 절제라는 덕목이 사실상 기독교와 상치되는 덕목이 아니고 신에 의해서 보호되는 덕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제2권이 드러내 보이는 핵심적인 사상은 몇몇 비평가들이 주장하듯이 고전적인 도덕의 부족함을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관점을 통해서 그러한 도덕을 장려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이언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덕목 때문에 구원을 성취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가이언이 결국 성인이 된다고 보기에는 작품 안에 있는 증거가 불충분하고, 그가 상징적인 의미의 “축소판 그리스도”(microchristus)라는 컬린의 제안(174)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스펜서는 기사가 구원을 성취할지 아닐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가이언의 자리는 바로 이 세상이기 때문이며, 그가 싸워야 할 곳도 모든 기독교인들이 지나가야만 하는 자연적인 인생의 범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가이언은 알마의 집(House of Alma)으로 인도되어 거기서 절도 있는 육체란 무엇인지 배운다. 그러나 그가 받는 교육은 레드크로스가 성스러움의 집에서 겪은 것과 같은 회개의 과정이 아니다. 가이언은 이성과 함께 있으며 그가 배우는 것은 도덕(ethics), 생물(biology), 신체 심리학(faculty psychology), 역사(history), 예술(arts) 등, 모두 인문주의에 바탕을 둔 것들이다. 팔머라는 인물에 투영되어 있는 이성은 욕망(appetites)과 감정(emotions)을 상대로 끝없이 싸우는 가이언을 구원할 수 없다(Anderson 172). 그러나 기사가 위험할 수도 있는 상태에 빠지는 것을 미리 방지해 주는 것은 바로 이성인 것이다. 두 사람이 희락의 소굴을 향해 가면서, 가이언이 “방황하는 섬”(wandering Islands)이나 “나약한 허약함”(fraile infirmity)(28), “허영”(vanity)(34), 또는 “방황하는 눈빛”(wandring eyes)(69)에 의해서 유혹을 받을 때마다, 파머가 끼어들어 기사의 감성을 통제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파머의 역할은 가이언이 유혹에 빠지기 전에 유혹과 맞닥뜨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일이다. 이러한 파머의 행동은 가이언이 처음 맘몬과 마주쳤을 때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을지 암시해준다. 페드리아(Phaedria)를 신랄하게 꾸중하는 파머의 모습은 6칸토와 7칸토에서 페드리아와 맘몬에게 가이언이 어떤 행동을 취했어야 했을 지를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이언이 마지막에 희락의 소굴을 파괴한 사건에 대해서 많은 비평가들이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스펜서가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한 희락의 소굴은 단 하나의 연에서 가이언에 의해 무참히 파괴된다. 이 곳이 단순히 무절제의 상징이기 때문에 절제의 기사에 의해서 파괴되어야 할 장소라면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다는 말인가? 골키는 이 장면을 가이언의 “내부적인 저항의 압박”(internal pressure of resistance)이 “자기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을 파괴하는 왜곡된 성적 에너지의 상태”로 발산되는 예라고 설명하고 있다(137). 또 다른 비평가는 이 장면이 로망스라는 장르와 개신교적 열정 사이에서 스펜서가 일종의 “문화적 혼란의 위기”(crisis of a cultural dislocation)를 겪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Sinfield 37). 이 장면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 종교개혁이 교회 안에 있던 우상적 형상들에 대한 공격을 알레고리 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Greenblat 192). 가이언의 행동에서 고전적인 도덕과 개신교적인 열광이 갈등을 일으킨다고 보고 있는 수잔 워포드(Susanne L. Wofford)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스펜서는 여기서 단순히 자신이 물려받은 문학적 유산이 가진 위험과 폭력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또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리가 그러한 전통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축하하고 있다”(122-23). 작품은 과연 고전적인 미학적 가치가 아무리 매력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거부하는 시인의 기독교적인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예술이 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이유를 가지고 자연을 모방한다면 그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하는 원칙과 위배되며, 따라서 언제든지 극복되고 억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캘빈주의자였던 스펜서의 신은 선택된 기사들의 구원을 미리 예정하고 있는 존재이며, 그들의 행동이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든지 없던지 간에 은총을 부여한다. 제1권에서 성스러움을 대변하는 기사 레드크로스는 신의 은총에 힘입어 결국 모든 악의 집합체인 용을 죽임으로써 자신이 구원을 받도록 선택받은 자임을 증명하였다. 그가 저지른 죄악은 이미 속죄와 회개를 통하여 모두 말소되었으며, 이제 그는 주어진 과업을 성취하고 선녀여왕에게로 돌아가 나머지 삶을 산 후에 성인이 될 것이다. 가이언은 자신의 처음에 맹세한 것을 이루었지만, 그의 승리는 레드크로스의 경우처럼 최종적인 승리가 아니다. 인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절제의 덕을 상징하는 기사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도덕적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성스러움이 은총이라면 절제는 행동양식이며, 성스러움이 신의 예정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면 절제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가이언은 어쩌면 무엇인가를 성취했다는 만족감을 가지고 그 섬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제라는 덕목은 끊임없이 실행되어야 하는 도덕이며, 그가 이 세상에서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이성의 도움과 안내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그 누구라도 “무절제한 삶”과 “달콤한 행복”(xii.85)의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숙 명여대)


주 요어: 가이언, 레드크로스, 파머, 아크레시아, 절제, 인문주의, 맘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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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sacred badge" and "heavenly Mayd":

Redcross and Guyon in The Faerie Queene


Sung-kyun Yim


Spenser's Knight of Temperance in Book II of The Faerie Queene appears to reflect the poet's difficulty in coping with harmonious balance in value between the Protestant ideal and what is obviously classical.  Perhaps, the difficulty, if it exists, lies in his attempt to present Protestant ethics in the pagan frame.   In a sense, Redcross in Book I may escape from this difficulty more easily, for the virtue of holiness he represents, although whether it may indeed be called a virtue in a strict sense is doubtful, has little to do with Aristotle. The virtue Guyon embodies, however, is classical, and not necessarily Christian.  And Spenser has to find a way to manifest his Protestant moral vision through the hero whose ideal virtue is pagan.

Although the virtue of temperance is obviously humanistic, however, Spenser incorporates it into Protestant morality, so as to dramatize the relationship between humanist ideals and Protestantism, between nature and Grace, and perhaps between poetic aesthetics and religious truth.  To Spenser, the virtue of temperance, in spite of its humanistic origin, does not necessarily incompatible with Protestant morality.  In fact, it does constitute an important moral principle that all true Christians must practice while they are living in this world.  Guyon does not have to prove that he is worthy of Grace; his humanist virtue is irrelevant to the accomplishment of his own salvation after all.  Nevertheless, as a true Christian, he has to exercise the virtue of temperance, and his moral training is not always easy as his adventures ahead eventually disclose. And for Spenser, as well as for other Renaissance humanists, temperance is apparently an admirable virtue, one of the best that human beings may achieve, and Guyon's task is to maintain it to the end of his journey. 

It is, therefore, difficult to view the virtue in Book II in dichotomy between the classical and the Christian.  At least, the text never implies that the virtue of temperance is pagan and so must be replaced or superimposed by Christianity.  This does not mean, of course, that the virtue Guyon represents is not classical.  Rather, it means that in The Faerie Queene the humanist virtue of temperance, as well as other secular virtues, is an important educational discipline to fashion a true Christian gentleman.  Any attempt to explain Guyon's adventures, including Mammon's Cave and the knight's final destruction of Bower of Bliss, in terms of the opposition between the humanist virtue and that of Christian, or the inferiority of one to the other, is not satisfactory.  For the poet, who has shown how to achieve salvation in Book I, is to manifest how to lead Christian life in this world through Guyon and the knights following.




Key words: Guyon, Redcross, Palmer, Acrasia, temperance, humanist, Mammon


* 본 연구는 숙명여자대학교 2004년도 교비연구비 지원에 의해서 수행되었음.

1) The Faerie Queene으 로부터의 인용은 Edmund Spenser, The Faerie Queene, ed., A. C. Hamilton (New York: Longman, 1977)에 의함.


2)  스펜서가 "선녀여왕" 제2권에서 오비드와 버질을 사용하는 예를 보려면 Burrow 217-36을 볼 것.


3)  대먼 더피(Damon Duffy)에 의하면 "양치기 달력"은 1493년에 처음 프랑스에서 출판되어 1503년에 스콧틀랜드 영어를 사용했던 프랑스 인에 의해서 영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그 후 1506년에 리처드 핀슨(Richard Pynson)의 번역본이 나왔고, 1508, 1518, 1528년에 각각 새로운 판이 출간되었는데 이러한 출판의 유행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까지 계속되었다(50).


4)  나는 앞서 레드크로스 기사가 개신교적인 만인(everyman)으로서 끊임없는 신의 은총으로 마침내 구원을 성취한다고 언급하였는데, 가이언은 은총과 구원의 문제가 아닌, 행위와 윤리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또 다른 개신교적 만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5)  가이언의 기절이 인간적 도덕의 한계라든지, 은총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거나, 정신적인 죽음에 대한 경험, 또는 교육의 과정이라고 하는 견해, 또는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는 등 다양한 관점들은 패트릭 컬린(Patrick Cullen)의 논문 “Guyon Microchristus: The Cave of Mammon Re-examined"에 소개되어 있다.


6)  밀러(Miller)도 비슷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Phaedria"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