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유시인들의 사랑가
강 충 룡
1.
서론
제 1차 십자군 전쟁(1096-1099) 전까지, 프랑스 귀족들의 유일한 수입원은 전쟁에서 탈취한 전리품이나 포로의 몸값 또는 사냥에서 잡은 짐승과 가죽이 주였다. 또한 교회는 특정한 날에 전쟁을 금하는 이른바 “신의 휴전”을 모든 영주들에게 강요했다. 몇몇 축일과 매주 수요일 저녁에서 월요일 아침까지 휴전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나 파문 의식을 비켜갈 수 없었다. 게다가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클레르몽(Clermont)에서 십자군 전쟁의 불을 지폈고, 1146년에 성 베르나르가 베즐래(Vézelay)에서 꺼진 불을 다시 지피면서 이들은 이처럼 서양에 만연한 전쟁을 “이교도에 대한 투쟁, 정의”(une juste cause, la lutte contre les infidèles)로 바꿀 수 있다고 여겼다(Le Goff 100). 전쟁과 명예 그리고 모험에 굶주린 귀족은 이에 힘입어 프랑스 밖으로 눈을 돌렸고 이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무덤을 구해내야 한다는 성스러운 임무를 느꼈다. 이후 200년 동안 8차까지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간헐적인 승리만 얻었을 뿐 전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뜻밖의 소득도 있었다. 십자군은 동방의 풍요, 호사, 문명에 물들었고 전리품과 재산을 약탈해 프랑스로 귀국했고 동방의 생활방식을 모방하는데 전력했다. 적어도 프랑스가 중심이 된 2차 전쟁 1147-1148년까지는 그렇다.
이 때부터 마르크 블로크가 ��봉건 사회��에서 말하는 “제 2 봉건시대” (deuxième âge féodal)로, 봉건 영주는 과거의 단순한 목조 건축물이 아니라 아름다운 석조성에서 살게 됐고 생활 방식도 이전과는 달리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을 본받아 화려해졌다. 연이은 손님 접대와 방문은 흥겨운 모임의 구실이 됐고, 여자의 역할이 우위를 점하게 됐다. 여기서 궁정문화가 생겨났고, 이는 남녀간의 빈번한 교제에서 나온 특성과 완벽한 기사의 전형을 이르는 모든 자질을 가리켰다(Delort 171-74). 또한 기사는 여성에 대한 우아함, 예의바름, 정중함과 너그러움을 실천함으로써 궁정사랑을 할 자격을 얻게 된다. Courtiser 또는 cortejar도 자신보다 지위가 높거나 자신과 동등한 영주의 성을 방문하는 것이고, 모든 것이 방문의 구실이요 방문은 축제의 구실이다. 즉 결혼, 기사 서임, 복종의 서약, 사절 그리고 협정.
Cortejar,
c'est aussi visiter la cour de son supérieur ou d'un de ses
égaux; tout est prétexte à visites, et celles-ci
à fêtes: mariage, adoubement, préstation d'hommage,
ambassade et accords. (Marrou 62)
이 런 사회생활은 상대적으로 세련된 예의범절을 수반하고, 여기서 궁정문화가 나왔고 이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것이 앙드레 신부의 ��애정론��이다. 라틴어 제목은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때로는 De arte honeste amandi, Tractatus amoris(15 세기), Erotica seu amatoria(17 세기)로 나타나지만 19세기 말에 와서는 De amore로 고정됐다.1)
이 몸을 그대에게 이끌리는 가신으로 보아주세요. 이 몸은 오로지 그대를 섬기는데 전념했기에 나의 행동은 그대한테서 바라는 보상을 얻게 해주소서. (101)2)
궁 정문화는 필연적으로 궁정사랑과 연관이 있고, 궁정사랑은 극도로 정제된 궁정문화라 할 수 있고 12세기 중반부터 귀족의 삶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기사 계급은 이미 세습체제로 바뀌었고(Delort 166) 행동 방식도 규범화되었다. 예전 기사의 이상은 오로지 전투뿐이었다. 무훈시는 전사(戰士)만을 위한 것이었고 그 안에 사랑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궁 정문화가 프랑스 남부에서 먼저 생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롤랑의 노래��도 잠시 이런 이상을 언급하고 있다.
오 베르뉴 사람들이 가장 궁정풍이다.
Icels d'Alverne i sont li plus curteis. (3796행)
문 학 작품으로 눈을 돌리면 궁정문화는 남부에서 가요(chanson)의 형태로, 북부에서 이야기(roman)의 형태로 나타나고 세 가지 기본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1) 기사도 정신에는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의 용맹과3) 패자를 살려주고 약자를 보호하는 너그러움, 희생정신, 고통과 죽음의 초연 그리고 탐욕과 인색의 반대인 아량의 이상이 있다.
(2) 그리스·라틴 문화의 영향. 중세의 지식인, 사제들은 고전의 주인공들을 궁정풍으로 각색했고 귀족들도 스스로를 이처럼 동일시했다.
(3) 여성의 영향. 성과 궁전에는 반드시 귀부인들이 있었고 남자들에게 세련된 말투와 예의범절을 강요했고 남자는 이에 따라 여성에게 경의를 표했다.4)
결 국 궁정문화는 이 세 가지 넓은 의미 외에도 좀 더 명확하고 엄격하고 순수한 의미로 축소되었고, “궁 정사랑”이라는 개념은 남부에서 만들어졌고 북쪽으로 전파된 문화 현상이었다(Frappier 93-94).
여
기서 우리는 프랑스 남부의 주요 음유시인들과 이들의 사랑가를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2.
음유시인과 사랑가
정 형화된 중세의 음유시인은5) 한 손에 비올라를 들고 이 성 저 성을 떠돌아다니면서 성주부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노래하는 모습으로 그릴 수 있겠다.
중 세의 방랑시인6)은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아다니면서 공공장소나 성문에서 노래를 부른 방랑가수이자 악사이었다. 이들은 곡예사, 곰 조련사나 훈련받은 개와 함께 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은 후 청중들이 좋아하는 곡을 낭송하거나 악기로 반주하면서 노래했다. 11세기의 무훈시와 후의 사랑가가 이들의 애창곡이었고 또한 축제, 마상시합 그리고 기사 서임식에서 양념과도 같은 존재였다. 대부분은 남들이 작곡한 가사를 노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런데 특히 프랑스 남부에서 몇몇 방랑시인들은 재능이 아주 뛰어나서 자신들이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몇몇은 아예 평소의 방랑시인과 어릿광대짓을 그만두고 가사와 음악을 곁들인 자신들만의 시를 쓰기까지 했다.7) 자신들의 노래를 스스로 지을 수 있는 방랑시인들은 남쪽과 북쪽에서 음유시인8)이 됐다. 음유시인들은 따라서 사회적으로나 지적인 면에서 방랑시인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일부는 영주이기도 헸다. 아키텐느 공작 기욤 9세가 대표적인 경우로 최초의 음유시인이었다.
어 떻게 음유시인들은 애정시만 쓰게 됐을까? 사실 남부의 시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제는 사랑인데. 이유는 단지 환경, 기후, 태양 게다가 남부인의 기질의 영향만은 아닐 것이다. 음유시인들은 같은 성에서 또는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유력자의 궁정에서 가능한 한 오래 지내고 싶어했다. 그런데 성의 생활은 평화 시 아주 느슨했고 성주의 부인과 딸들은 자수를 놓기도 했지만 권태에 빠지기도 했다. 젊은 남자들도 사냥이나 무기 손질에 바쁘지 않을 때는 부인들과 함께 성주부인을 찾아가곤 했다. 이 남자들 가운데 시인도 있었기에, 이들이 이 부인들의 아름다움과 덕성을 노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 와 같은 사랑이 진지하든 아니든 간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모든 시인들의 감정은 다 같고 상황이나 주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유사성은 적어도 이 시에 있어서 인위적이고 상투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들이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동일하다. 사랑과 이를 노래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봉건시대의 가장 기이한 제도에 직면하게 된다. 기사는 말할 것도 없이 영주에 속하고 영주는 그 대신 도움과 보호를 제공한다. 음유시인도 전적으로 부인에 속하고 부인의 ‘가신’이 된다. 부인 또한 애정 봉사의 보답으로 도움과 보호를 제공하고 미소는 최고의 “보상”이 된다. 보상을 받은 사람에게 “사랑의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보상은 충분하고 이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가짐에 신경 쓰고 자기 부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한다. 순수하고도 이상적인 이런 사랑, 이런 궁정 사랑이 모든 음유시인들에게 충분하지는 않았다.
음
유시인 중 최초의 작품을 보자. 아키텐느 공작 기욤 9세는 1100년과 1127년 사이에 시를 썼다. 지금까지 전해진 11편의
시 가운데 6편은 음란하고 외설스럽다. 이는 돈주앙 같은 이 시인의 충격적인 풍속을 반영했기에 기욤 9세는 파문까지 당했고
방탕한 도반들과 즐겨 시를 낭송하곤 했다. 이 방탕자는 상스러운 어조로 여성을 말했다. 그래서 전문가들조차 민감한 부분은
현대불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사랑가 중 하나는 두 명의 정부(情婦)를 이름까지 밝혀가면서 말 두 마리와
비교하고 있고 다른 노래에서 여인의 부정은 본능이라 모든 감시가 불필요하다고 단언한다. 여인은 사랑을 끊느니 차라리 감시원에게
몸을 내맡기겠다고 하면서 “전투마를 가질 수 없다면 온순한 말에 만족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한다.9) 다른 시에서도 외설은 더욱 진해져간다.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시를 일부 인용해보자.
내 말안장에는 두 마리의 말이 있어 아주 좋다.
둘 다 훌륭하고 전투에 잘 길들여졌고 용맹하다.
그 런데 두 마리 다 지킬 수 없다. 하나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Dos cavalhs ai a ma selha ben e gen;
Bon son e adreg per armas e valen;
Mas no·ls puesc amdos tener que l'us l'autre non cossen.
(Chansons de Guillaume 1.9)
기 사들이여, 고통 받는 이 몸에게 충고 좀 해주시오!
이 몸은 곤경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했소.
아 녜스 부인이나 아르센 부인 중 누구를 택할 지 전혀 모른다.
Cavallier, datz mi cosselh d'un pessamen!
Anc mais no fuy issarratz de cauzimen :
Ges
non sai ab qual mi tengua de N'Agnes o de N'Arsen. (1.22-24)
이
보다 더 노골적인 시도 있다. 리무쟁 지역에 사는 두 부인이 어느 날 길에서 시인 자신으로 추정되는 한 남자를 만났는데, 이
남자는 말더듬이 흉내를 냈다. 두 여인은 그래서 이 가짜 벙어리를 집으로 데려다놓고 일주일 이상씩이나 온갖 사랑의 유희를
즐겼다. 시인은 이런 긴장을 고양시켜 아주 노골적인 표현으로 사랑의 유희, 입맞춤, 애무, 포옹 그리고 부인의 사생활 장면을
묘사하고 또한 꿈을 꾸면서 이 장면에 참여하기도 한다. 벙어리의 말을 들어보자.
그 대가 들은 대로 나는 두 여자를 박았지.
백 팔십팔 번이나.
이 때문에 내 장구(裝具)와
물 건이 거의 끊어질 정도라서
그 대한테 그 고통을 말할 수 없네.
엄 청나게 커서.
Tant las fotei com auzirets:
Cen e quatre vint et ueit vetz,
Q'a pauc no·i rompei mos corretz
E mos arnes;
E no·us puesc dir lo malaveg,
Tan gran m'en pres. (5.79-84)
그 러나 사랑가의 다른 부분에서 기욤은 반대로 크게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고 나머지 다섯 편의 시는 놀랍게도 나무랄 데 없는 품위를 보여준다. 시인은 미인에게 자신을 매정하게 대하지 말도록 요청까지 할 정도로 이 여인을 갈망한다. 그러나 기욤의 사랑은 단순히 플라톤식 사랑은 아니고 정숙이 그의 전유물도 아니다. 그가 바라는 사랑은 본래의 결말을 맺는 사랑이다.
다
음 시인 세대에는 이 감각적 사랑의 흔적만 있을 뿐이다. “블라이아 왕자”(princes de Blaia) 조프레 뤼델도 정숙한
시인은 아니다(Hamlin 91). 이 시인은 자신이 모시는 부인과 함께 있었는데 질투하는 남편에게 들켜 매맞지 않으려고 아담
복장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노래한다(Lafitte-Houssat
85).
그러나 곧 회개한다. “이 모두가 허무한 것”처럼, 시인은 다른 노래에서 “진정한 사랑에만” 헌신하고 싶다고 한다. 시인의
사랑은 “먼거리 사랑”이 되고 '머나먼 공주'의 노래는 일약 전설이 된다. 시인의 전기 작가는 다음처럼 기술하고 있다.
안 티옥에서 온 순례자들한테서 들은 덕행 때문에 시인은 본 적도 없는 트리폴리 백작부인에 홀딱 빠졌다.
Et
enamoret de se la comtessa de Tripol, ses vezer, per lo ben qu'el
n'auzi dire als pelerins que venguen d'Antiocha. (Hamlin 91)
어 쨌든 이 “먼거리 사랑”(amor de lonh)은 한순간 사라진 부인을 위한 사랑에 불과할 수 있지만, 시인은 부인을 볼 수 없고 접근할 수도 없어서 고통을 느끼고 위험과 불안을 감내한다. 이 먼거리 사랑은 채워지지 않은 사랑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완벽한 사랑”(fin'amor)은 부인의 육체에 대한 불타는 욕망을 표현하기에 정의상 실패할 수 없고, 시인한테 이런 긴장 상태, 이런 환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최후의 보상으로 나타나는 괘락은 어쨌든 실현되지는 않을 것인데, 실현되면 사랑은 끝나기 때문일 것이다.
육 체의 소유는 완벽한 사랑의 개념과는 다르다. 시인은 위에서 말한 사랑의 고통, 위험, 불안을 감수함으로써 사랑의 흥분을 유지하고 정확히 색정적 의미에서 부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육체적 욕망은 찬양에서 살짝 드러날 정도이다.
정
신적 사랑은 진정 베르나르 드 방따도르부터 시작한다. 이 시인은 12세기 음유시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완벽하다고 할 정도로
진정한 시인, 시인의 전형으로 나타난다. 방따도르 성에서 난로를 때우던 시종의 아들인 어린 베르나르는 성주(城主)인 후작의 눈에
띄어서 교육을 받게 됐다. 그다음 후작의 문학 모임에 들어가게 됐다. 음유시인이 된 후 후작부인을 사랑했다 해서 성에서 쫓겨나는
대가를 치르게 됐다. 그래서 시인은 알리에노르 다키텐느한테 갔다. 알리에노르가 영국왕 헨리 2세 플랜태지넷의 왕비가 되자
영국까지 따라갈 정도였다(Bec 131). 그래서 정말 사랑의 시인이 되었고 진정한 궁정 사랑의 확립자라 할 수 있다.
이 자리서 나는 사랑과 결별하고 사랑을 버린다.
여 인이 나의 죽음을 원했기에 나는 죽음으로 답한다.
그 리고 나는 간다. 여인이 나를 붙잡지 않아서
불 쌍한 이 몸은 어딘지 모르는 유배지로.
트 리스탕. 그대는 이제 나한테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불 쌍한 이 몸은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노 래를 포기하고 버린다.
즐 거움과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나는 숨는다.
Aissí'm part d'amor e'm recré:
Mòrt m'a per e mòrt li respòn,
E vau m'en, pòs ilh no'm reté,
Caitius en eissilh, no sai on.
Tristans, ges non auretz de me,
Qu'eu m'en vau caitius, no sai on:
De chantar me gic e'm recré,
E
de jòi e d'amor m'escòn. (Bec 134)
여 기서 트리스탕은 senhal,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여인을 가리키는 비표라는 것은 확실하다. 미지의 여인은 이 말 자체의 문법성인 남성 속에 가려지고 시인만 아는 익명으로만 지칭된다. 이것이 상상의 이름이든 진한 은유이든 간에, 특히 프랑스 남부의 음유시인들에 있어서 비밀 엄수는 언제 어디서나 지켜야 하는 불문율이다. 부인은 Bel Rai (Beau Rayon), Bel Vezer (Belle Vue), Mon Desir, Fin Joi (Pure Joie), Bel Esper (Espoir), Bel Paradis, Bon Vezi (Beau Voisin) 또는 Midons10) (Madame)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것이 궁정사랑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음
유시인의 유일한 행복은 사랑, 정말 그리고 확실히 말하자면 육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자신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다. 부인이
냉혹하거나 가혹한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반대로 이런 불만족 자체에서 궁정 사랑은 평민이 다다를 수 없는 최상의 즐거움을
찾는다. 이 사랑은 정의상 귀족적이고 정신적이라서 생활에 여유가 없는 평민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낙은 연인의
가치를 더욱 올려주는 세련미로 귀결된다. 베르나르 드 방따도르가 그렇다.
그 래서 [베르나르 드 방따도로는] 자기 주군의 부인인 방타도르 자작 부인에 반했고 . . . 더욱이 이성을 잃어 자신의 욕정을 따랐다.
나 는 사랑의 즐거움을 생각하고 격정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 래서 이성을 잃고 내 욕정을 따른다.
Et [Bernart de Ventador] enamoret se de la vescomtessa de Ventador, moillir de so seingnor. . . . mas fugi son sen e seget sa voluntat . . .
Consir lo joi et oblit la foudat
e fuc mon sen e sec ma voluntat. (Hamlin 100)
부 인이시여! 그대의 사랑 쪽으로
나 는 두 손을 모아 찬양합니다.
싱 그러운 안색을 지닌 아름다운 육체
그 대는 이 몸을 얼마나 괴롭혔던가!
. . . . . . . . . . . . . . . . . . . .
전 령은 뛰어가서
최 고의 미인에게 말하라.
아 픔과 고통
그 리고 그녀를 위해 이 몸이 겪는 희생을.
Dòmna vas vòstr'amor
Jonh mas mans et ador.
Bel còrs ab fresca color,
Gran mal me faitz traire!
. . . . . . . . . . . . . . .
Messatgièr, vai e cor
E di'm a la gensor
La pensa e la dolor,
Qu'eu
trac e'l martire. (57-60, 73-76; Bec 138-39)
연 인들의 사랑가는 앙드레 신부가 정립해놓은 사랑의 모든 규칙에 정확히 부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의 규칙은 총 31개이지만 중 일부만 인용하겠지만 주제는 모두 같다.
“사
랑의 시인”(poète de l'amour)으로 불리는 베르나르 드 방타도르의 고백부터 들어보자.
내 가 다른 시인들보다 노래를 더 잘 부르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사 랑에 마음을 활짝 여는 사람은 나이고,
그 명령에 가장 잘 순종하는 사람도 나다.
내 마음과 육신, 내 지식과 감각, 내 힘과 능력 모두를 사랑에 바쳤다.
사 랑의 고삐가 나를 붙잡아서 나는 다른데 한눈 팔 수 없다.
마 음에 사랑의 진미를 모르는 자는 진정 죽은 자다.
사 랑 없는 삶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이 런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권태가 아니라면.
Non es meravelha s'eu chan
melhs de nul autre chantador,
que plus me tra·l cors vas amor
e melhs’ sui faihz a son coman.
Cor e cors e saber e sen
e fors’ e poder i ai mes;
si·m tira vas amor lo fres
que vas autra part no·m aten.
Ben es mortz qui d'amor no sen
al cor cal que dousa sabor;
e que val viure ses valor
mas
per enoi far a la gen? (Berry 34-35)
또
는 앙드레 신부는 사랑의 규칙 20에서 말하고 있다. 자기 여인 앞에서
사 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걱정한다
Amorosus
semper est timorosus. (André 183; Andreas 185)
이 런 것이 음유시인의 태도이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시키고 하물며 소원을 보이고 단순한 사랑의 희망을 감히 요청할 경우, 수줍음이 진지하든 꾸몄든 간에 연인은 제약을 받고 곤란에 빠지게 된다.
솔
직담백한 부인이여! 그대 없이는 나는 행복의 어떤 희망도 없소이다. 애정을 바쳐 그대를 이처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
마음이 그대 멀리 떨어져 있어 번민하고 신음만 하기 때문이오. 그대를 바라보는 매혹을 맛보는 이 행복한 순간에도 이 몸은 이렇게
흥분했고 당황해서 그대만이 나에게 불어넣어준 감정을 그대에게 감히 표현하지 못한다. (Laffitte-Houssat 88)
사 랑의 규칙 15조와 16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모 든 연인은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창백해져야 한다.
연 인은 사랑하는 여인을 갑자기 알아보면 그 마음은 떨기 시작해야 한다.
Omnis consuevit amans in coamantis aspectu pallescere.
In repentina coamantis visione cor contremescit amantis.
베
르나르 드 방따도르의 시에 또 한 예가 있다.
내
여인을 알아보는 순간 공포가 갑자기 나를 사로잡는다. 내 눈은 희미해지고 내 얼굴은 창백해진다. 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떨고 있다. 나의 분별력은 어린아이 같지 않다. 그만큼 사랑은 나를 불안케 한다. 아! 그렇게 온순하게 복종한 자는 부인의
너그러움을 얻을 자격이 있을 것이다.
여
기서 음유시인들은 ‘여인 앞에서의 겸손’을 주저 없이 과장하고 있다. 여인과 떨어진 거리를 측정하면서 음유시인들은 여인의 마음에
들 자격이 없다고 마음껏 부르짖는다. 그래서 조그마한 것에 만족하게 된다. 미소, 응시 그래서 시인들은 행복의 최고점에 이를
것이다.
3.
결론
궁 정사랑과 연관이 있는 음유시인들의 사랑가를 두 명의 시인 (기욤 다키텐느와 베르나르 방따도르)를 중심으로 살펴본 바 궁정사랑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이 사랑은 결혼과 부합할 수 없다. 사랑하는 여자는 결혼한 여자이고 부인을 노래하고 사랑을 원하는 남자는 부인의 남편, 즉 시인이 모시는 영주이다.
(2) 따라서, 헌신적으로 온 몸을 바쳐 사랑하는 여인은 시인보다 신분이 높고 사랑의 봉사는 봉신이 영주에게 바치는 봉건 서약과 같다.
(3) 궁정사랑이 여인에 대한 절대적 감정이라 하더라도 맹목적이고 숙명적 열정은 아니다. 부인은 모든 여인 가운데서 육체·정신적 장점과 가치 때문에 선택되고, 시인은 여인에게 헌신함으로써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된다.
(4) 이 사랑은 끈질기고 스스로 만족해하고 고통을 먹고 살고 좋아서 즐긴다.
(5) 또한 근본적으로 볼 수 없고 장애물에 가로막힌 “먼거리 사랑”이다.
(6) 궁정사랑은 앙드레 신부 덕택에 규칙으로 발전했다.11)
(고 려대학교)
주 요어: 음유시인, 사랑가, 궁정사랑, 서정시
◈
참
고 문 헌
André le Chapelain. Traité de l'amour courtois. Trans. Claude Buridant. Paris: Klincksieck, 1994.
Andreas Capellanus. The Art of Courtly Love. Trans. John Jay Parry. New York: Columbia UP, 1990.
Bec, Pierre. Anthologie des troubadours. Paris: 10/18, 1979.
Berry, André. Anthologie de la poésie occitane. Paris: Stock, 1979.
La Chanson de Roland. Ed. G. Moignet, Paris: Bordas, 1969.
Delort, Robert. La Vie au Moyen Âge. Paris: Seuil, 1982.
Frappier, Jean. La poésie lyrique française aux XIIe et XIIIe siècles: Les auteurs et les genres. Paris: Centre de Documentation Universitaire, 1966.
Hamlin, Frank R., Peter T. Ricketts, and John Hathaway. Introduction à l'étude de l'ancien provençal. 2nd ed. Genève: Droz, 1985.
Jeanroy, Alfred. Chansons de Guillaume IX, duc d'Aquitaine (1071-1127). 2nd ed. Paris: Champion, 1972.
Lafitte-Houssat, Jacques. Troubadours et cours d'amour. 5th ed. Paris: PUF, 1979.
Le Goff, Jacques. La Civilisation de l'Occident médiéval. Paris: Arthaud, 1972.
Marrou, Henri-Irénée. Les Troubadours. Paris: Seuil, 1974.
Stendhal.
De
l'amour.
Ed. V. Del Litto. Paris: Gallimard, 1996.
◈ RÉSUMÉ
Love poems by the troubadours
KANG
Chung-Ryong
L'occident d'après la première croisade (1096-1099) est ce qu'a appelé Marc Bloch dans sa Société féodale, “le deuxième âge féodal”. Et à partir de ce moment-là, les moeurs du seigneur féodal devenaient moins hardies, plus raffinées et plus galantes que l'époque précédente. Ce fait nouveau s'associe avec l'apparition d'abord des jongleurs ambulants, puis des troubadours résidents dans un château de l'un des seigneurs puissants du Sud de la France. Ces troubadours étaient auteurs-compositeurs-interprètes de nos jours comme Georges Brassens et chantaient la beauté d'une Dame mystérieuse, inconnue d'eux, qui se trouvait au-delà de la Méditerranée. C'est le fameux “amor de lonh”, “amor de terra lonhdana”, amour lointain, amour de terre lointaine que chantait Jaufré Rudel sans l'avoir vue, sur la foi des pélerins d'Antioche qui lui avaient dit du bien d'elle.
Cet amour est obsédant, mais il se complaít en lui-même, se nourrit et s'enchante de ses tourments, C'est en principe un amour courtois qui se fortifie par l'absence et par l'obstacle. Et l'amour courtois suivant l'Ars amatoria d'André Le Chapelain s'est constitué en 31 règles d'amour, dont il est analysé ici quelques-unes, bien que sporadiquement.
De plus, la dame aimée est presque toujours une femme mariée, mais celui qui désire son amour et qui la chante est le poète courtois, tels Bernard de Ventadorn, Bertrand de Born, excepté Guillaume d'Aquitaine qui pousse l'amour en un amour charnel, obscène. L'amour donc n'est pas compatible avec le mariage.
Tout en se présentant comme un sentiment absolu pour la Dame, l'amour courtois n'est pas une passion aveugle ni fatale. Il repose sur un choix et comporte une part de volonté. La dame est élue entre toutes pour ses qualités physiques et morales, pour sa valeur, et l'amant augmente la sienne en méritant la dame par ses belles actions et par un service d'amour.
Tels
sont des traits caractéristiques de l'amour courtois.
Key Words: troubadours, chanson d'amour, amour courtois, poésie lyrique
1) Andreae Capellani regii Francorum De Amore libri tres, ed. E. Trojel (Copenhagen: Gadiana, 1892). 이 모두 오비디우스의 Ars amatoria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 De amore의 텍스트로는 Buridant이 번역한 프랑스어판을 사용하였다.
3) “Rollant est proz e Oliver est sage” (Chanson de Roland 1093행).
4) 남자는 귀부인 옆에 앉아서 말을 걸고 싶으면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한다.
5) Marrou 22, 126의 그림을 참조할 것.
6) 불어 jongleur: the Norman French term (technically used by modern writers) for an itinerant minstrel, who sang and composed ballads, told stories and otherwise entertained people; 영어 juggler: one who entertains or amuses people by stories, songs, buffoonery, tricks, etc. (OED).
7) 오늘날 말하는 작사·작곡·노래를 혼자 다 하는 예술가, 예를 들어 조르쥬 브라셍스(Georges Brassens)가 그렇다.
8) Troubadour: one of a class of lyric poets, living in southern France, eastern Spain, and nothern Italy, from 11th to the 13th centuries, who sang in Provençal (langue d'oc), chiefly of chivalry and gallantry, sometimes including wandering ministrels and jongleurs (OED). Marrou. 9 참조.
9) “Si non pot aver caval . . . compra palafrei” (Chansons de Guillaume 2.18).
10) 전부 다 남성이라는 것에 주목하자.
11) Stendhal 318-33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