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양각색으로 이야기했노라”: ꡔ캔터베리 이야기ꡕ 번역 검토




강 지 수 ․ 최 예 정





I


‘번역이냐, 반역이냐’ 하는 유명한 명제가 드러내듯이 문학작품의 번역은 언제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다. 더욱이 그것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언어적 차이뿐 아니라 문화적 차이 때문에 ‘반쯤은 외국’인 것처럼 느껴지는 중세의 영어로 씌어진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라면 그때의 어려움이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영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것 자체가 한 가지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면, 중세영문학 작품을 현대의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하나하고도 또 다른 절반어치의 외국’을 지니고 있는 작품을 번역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세 영문학 작품을 현재의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외국, 그것도 현재와는 너무나 다른 역사와 문화, 배경을 지니고 있는 중세 영국의 작품의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현대의 한국 독자들에게 읽히고 이해될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 영어와는 매우 다른 중세 영어로 씌어졌기 때문에 전공자가 아닌 일반 한국인 독자들로서는 오직 번역물에 의존해야만 중세 영문학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중세 영문학 번역물이 한국 독서 시장에서 갖는 중요성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현재 한국의 출판시장에서 유통되는, 혹은 한국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번역물들이 믿을만한 번역물인가, 중세 영문학의 본래의 의미와 가치를 온전히 전달하고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학생들과 잠재 독자들에게 이 번역물들을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은 당연한 의문이기도 하거니와 또 전공자로서 책임을 갖고 답해야 하는 질문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에 중세 영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인 ꡔ캔터베리 이야기ꡕ에 대한 최초의 번역이 나온 지 벌써 40여년이 지났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번역본에 대한 검토를 시도하면서 앞으로 중세 영문학 번역이 지향해야 할 바와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사실상 이미 뒤늦은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동안 중세 영문학 번역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한국 중세 영문학회에서는 몇 차례 학회 발표를 통해서 ꡔ캔터베리 이야기ꡕ의 번역본에 대한 검토를 시도한 바 있으며 김진만 선생을 초빙하여 그의 번역 작업의 배경과 원칙에 관한 발표를 들은 바도 있다.1) 이러한 시도들은 값진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이 보다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검토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안고 있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중세 영문학 작품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일 뿐 아니라, 실제 학부나 대학원에서 가장 많이 강의가 되고 있고 또 대중들에게 다가가기에도 가장 적합한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ꡔ캔터베리 이야기ꡕ의 번역본들을 검토하여 각각의 번역본의 공과를 살펴보면서, 일반적으로 외국문학 작품을 번역할 때 발생하는 어려움들 뿐 아니라 특히 중세 영문학, 그 중에서도 초서의 작품을 번역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앞으로 중세 영문학 번역이 나아갈 바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II


현재 한국에서의 외국 문학 번역이 우려할 정도의 난립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문제이다.2) 다행히도 한국에서의 중세 영문학 작품 번역은 다른 시대의 작품들의 번역물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은 상황에 있다. 현재 출판시장에서 유통되고 있거나 혹은 과거에 번역되었던 영미 문학작품들이 천차만별의 수준차를 지니고 있고 사실상 많은 번역물들이 중복출판이거나 표절본이거나 추천할만한 번역본이 별로 없는 현실과 비교해 보면 중세 영문학 작품의 번역물은 그 양이 상대적으로 적은 반면 질적으로는 비교적 고르게 나은 수준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고대나 중기영어를 번역해야 한다는 언어적 어려움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 영어로 씌어진 작품들과는 달리 중세 영어를 번역하려면 일단 중세 영어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이 요구되기 때문에 전공자가 아니면 착수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현재 번역되어 있는 중세 영문학 작품은 매우 대표적인 몇 작품에 국한되어 있고 그 종류 또한 많지 않다.3) The Canterbury Tales의 번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번역자가 한두 명에 그치는 다른 중세 영문학 작품들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출판물의 종류와 양이 많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영문학사에서 The Canterbury Tales가 갖는 중요성에 비한다면 그 종류가 많다고는 말하기 어렵다.4)

현재 The Canterbury Tales는 5명의 역자의 이름으로 9종의 번역본(출판사 기준)이 나와 있으며 초판연도를 기준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곽장현 역 『캔터베리 이야기』 창신문화사 (1962)

김진만 역 『캔터베리 이야기』 정음사 (1963)

김진만 역 『캔터베리 이야기』동서문화사 (1975)

김진만 역 『캔터베리 이야기』 탐구당 (1976)

김진만 역 『캔터베리 이야기』 범한출판사 (1982)

김진만 역 『캔터베리 이야기』 문공사 (1982)

김진만 역 『캔터베리 이야기』 학원출판공사 (1983)

송병선 역 『캔터베리 이야기』 책이 있는 마을 (2000)

이동일, 이동춘 역 『캔터베리 이야기』 한울 (2001)


원래 본 연구가 의도했던 것은 이 9종의 번역본을 모두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번역본들 중 곽장현의 번역본은, 근대 이후 일제시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의 세계문학 번역 현황을 조사, 정리한 원로 영문학자인 김병철 선생의 저서에서만 언급될 뿐 현재 역본을 구할 수 없는 상태여서 검토할 수 없었다.5) 김진만의 번역본은 현재 6종이 나와 있는데 이 중 정음사 판이 1963년 출간된 것으로 가장 빠르다. 이후의 번역본들은 대부분 이 판본을 재출간한 것이거나 선별 출간한 것이다. 1963년 첫 번역이 나온 이후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김진만 의 이름으로 번역된 것들이고 이후 다른 역자가 나타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이다. 2000년에 책이 있는 마을에서 출간된 송병선 번역의 역본은 스페인 문학 전공자가 영문학 작품의 원본과 스페인어 번역본 양쪽을 참고하면서 번역을 시도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2001년에는 도서출판 한울에서 현직 소장 교수로서 중세 전공자들인 이동일과 이동춘의 공역서가 출간되는데 이것들은 The Canterbury Tales의 전체 번역이 아니라 General Prologue와 6개의 이야기에 대한 번역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해당 분야 전공 교수진의 공역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 중 김진만의 이름으로 나와 있는 번역본은 현재 여러 종이 남아 있다. 그런데 문공사 자이언트 문고본을 제외한 나머지 번역본들은 모두 정음사 번역본을 재출판한 것이다. 예를 들어 김진만의 번역본 중 학원출판공사나 범문사의 번역본은 정음사본을 출판사만 바꾸어 전문(全文) 재출판한 것이고, 동서문화사의 번역본은 정음사본을 그대로 다시 출판사만 바꾼 상태에서 출판하되 2권으로 분권 출판한 것이고, 탐구당의 번역본은 정음사 번역본 중 General Prologue, The Wife of Bath's Prologue and Tale, The Pardoner's Prologue and Tale, The Nun's Priest's Tale, The Parson's Tale, Retraction 만을 선택하여 원문과 함께 대역본 형식으로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본 번역 점검에서는 이러한 모든 번역본의 원본인 정음사 본을 검토할 것이다.

한편 문공사 자이언트 문고본은 역자가 김진만이라고 씌어있기는 하지만 아래의 검토에서 드러나듯이 나머지 번역본들과는  완전히 다른 번역본이다. 일단 이 번역본은 The Canterbury Tales전체를 다 번역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투와 번역, 원문의 이해도, 번역의 충실도 모든 면에서 정음사 본과는 전혀 다른 번역본이어서 이후의 번역 점검에서는 새로운 번역본으로 취급하고 검토할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역자 자신의 번역본이거나 혹은 역자의 이름은 동일하나 명백히 다른 번역본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를 포함하여 김진만 정음사본, 김진만 문공사본, 송병선 역본, 이동일․이동춘 역본을 초판 연도순으로 검토하겠다.6) 본 검토 대상이 되는 4개의 번역본 중 전체를 다 번역한 것은 김진만 정음사본과 송병선 역본 2개뿐이고 나머지 두 개의 번역본은 번역된 부분이 각기 다르다. 본 연구는 전체를 다 번역한 판본의 경우에는 아래에 명기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검토한 결과를 토대로 하고 있다. 그 분량은 원본에서 각각의 이야기일의 행수 10%를 선정하되 각 이야기에서 의미상 중요하다고 생각된 부분을 주로 그 대상으로 삼았다. 번역이 선별적으로 이루어진 김진만 문공사본과 이동일․ 이동춘 한울본의 경우에는 각기 번역된 이야기들에서 해당되는 검토 대상 부분을 골라 검토하였다.


The General Prologue 1-39, 331-476

The Knight’s Prologue and Tale 1033-1186, 2987-3089

The Miller’s Prologue and Tale 3766-3854

The Reeve’'s Prologue and Tale 3921-3968

The Man of Law’s Introduction Prologue, Tale and Epilogue 134-273

The Wife of Bath’s Prologue and Tale 1-134

The Friar’s Prologue and Tale 1301-1337

The Summoner’s Prologue and Tale 1665-1708

The Clerk’s Prologue and Tale 267-392

The Merchant’s Prologue, Tale and Epilogue 2291-2418

The Squire’s Introduction and Tale 1-75

The Franklin’s Prologue and Tale 806-894

The Physician’s Tale 1-29

The Pardoner’s Prologue and Tale 329-420

The Shipman’s Tale 1-52

The Prioress’s Prologue and Tale 488-522

The Nun’s Priest’s Prologue, Tale and Epilogue 2821-2939

The Second Nun’s Prologue and Tale 119-175

The Manciple’s Prologue and Tale 104-138

The Retraction 1081-1092


본 논문에서는 번역검토의 취지중 하나가 네 개 번역본의 비교이므로 원문 인용시 편의상 Larry D. Benson이 편집한 The Riverside Chaucer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1987)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겠다.7)  김진만 정음사본의 경우에는 번역의 원본이라고 밝힌 로빈슨(Robinson)의 판본을 참고하였으나, 송병선의 경우에는 피셔(Fisher)의 판본이나 스페인어 번역본을 참고하지 못했고, 김진만 문공사본에 기록된 원본은 그 내용이 불분명하여 참고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본고에서는 The Canterbury Tales의 번역을 검토하면서 다음의 원칙들을 염두에 두면서 평가하고자 하였다. 첫째는 원문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맥락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가하는 것이다. The Canterbury Tales는 현대와는 매우 다른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중세 작품이기 때문에 이 시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다면 현대어에서는 맞게 보이는 번역이라도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가령 condition, estate, degree 등, 한국 역사에서나 현대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중세의 신분 관계 등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나올 때, 그 원문의 맥락과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번역했는지 여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둘째는 원문의 문학적 의미를 잘 살리고 있는가라는 측면이다. 가령 작가가 문학적 효과를 의도하여 일부러 반복하여 사용하는 단어를 그대로 살리고 있는가, 등장인물의 성격이 반영된 문체를 사용하는가 등 원문이 의도하는 문학적 효과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면서 원문의 분위기에 최대한 밀착된 번역을 했는지 여부를 살펴보았다.

셋째는 번역본 전체에 번역에 관한 일관된 철학 혹은 원칙이 반영되어 있는지의 여부이다. 가령 원문의 의미의 충실성을 중시하는가, 혹은 자연스런 한국어 번역을 중시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원칙이 번역에서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고 판정되면 번역에 있어 발견되는 다소간의 문제점들을 이러한 원칙에 의거하여 설명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를 특히 유념하였다.



III


정음사에서 1963년 발간된 김진만 역 ꡔ캔터베리 이야기ꡕ는 The Canterbury Tales에 대한 한국 최초의 번역본인 동시에 완역본이라는 점에서 우선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14세기의 중세 영어로 쓰여진 초서의 The Canterbury Tales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조차도 원어로 이해하고 읽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는 작품이다. 그런데도 이미 1960년대에 완역본을 완성했다는 것은 한국의 영문학 수용이 이 시기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반증함과 동시에 그 당시의 학문적 수준에 대해 재평가를 하도록 만든다고 할 수 있다. 본 번역서는 정음사 출간이후 여러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완역본 형태로, 혹은 부분 발췌 형태로 재출간되어 이후의 한국 영문학계에서의 The Canterbury Tales 수용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의 번역본 중 탐구당 판이나 동서문화사판은 운문 형식으로 출판되었기는 하지만, 사실은 이 정음사 판을 연이나 행의 구분에 맞게 적당히 배열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후대의 번역본에서 산문 번역을 운문처럼 배치해도 눈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한국어의 리듬을 잘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이 번역본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전반적으로 김진만 역 ꡔ캔터베리 이야기ꡕ는 (1)운문 형식을 중시할 것인가 혹은 의미 전달을 더 중시할 것인가, (2)번역작업에 있어서 원문(source text)을 더 중시할 것인가 혹은 번역문(target text)을 더 중시할 것인가 등의 번역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되짚어 보게 하는 번역본이다. 특히 이 번역본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옮기겠다는 역자의 소신이 번역서 전체에서 감지된다는 점이다. 이 번역본은 원문이 운문이건 산문이건 모두 획일적으로 산문으로 번역했는데, 이 때 원문의 뜻을 문자 그대로 직역하기 보다는 그 내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원어보다 과장된 것처럼 보이는 표현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원문에 단어를 추가한 것처럼 보여서 얼핏 부정확한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은 우리말의 리듬과 구어체의 상용 어구를 적절히 구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원문과 번역문과의 기계적인 일치관계보다는 자연스럽고 맛깔스런 한국어로 쓰고자하는 역자의 소신이 시종일관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인지, 산문번역이지만 운문 같은 느낌을 살리고 있다는 점은 이 번역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이다. 우리말의 적절한 리듬 구사, 원문의 성격에 따라 어려운 문자나 구어체를 적절히 배합하는 솜씨를 보고 있자면 마치 판소리 한 판을 듣고 있듯이 절로 흥이 나서 한국어 번역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문학작품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본 번역본에서 구어체의 번역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탁월하다. 예를 들어 The Miller's Tale에서 Absolon과 대장장이의 대화, The Wife of Bath's Prologue에서의 Wife of Bath의 왁살스런 분위기와 말투, The Clerk's Tale에서 Walter와 Griselda 대화 부분에서 보이는 신분에 따른 적절한 어법의 사용 등 본 번역본에서 구사하는 문체의 다양성과 그 적절성은 모두 훌륭하지만, 그 중에서도 구어체의 번역은 정말로 훌륭하다.

가령 The Wife of Bath’s Prologue의 다음 구절은 좋은 예이다.


Herkne eek, lo, which a sharp word for the nones,

Biside a welle, Jhesus, God and man,

Spak in repreeve of the Samaritan:

‘Thou hast yhad fyve housbondes’, ― quod he,

‘And that ilke man that now hath thee

Is noght thyn housbonde,’ ― thus seyde he certeyn.

What that he mente therby, I kan nat seyn; (3:14-20)


그리고 또 이런 얘기도 있지 않아요.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사마리아의 여인을 꾸짖으며 <너는 기왕에 다섯 사람의 남편을 가졌으니 지금 너를 데리고 사는 그 남자는 너의 남편이 아니로다>라고, 분명히 말씀했어요. 이 얼마나 모진 말씀입니까.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였는지 난 잘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127면)


위의 인용문은 사실상 어문 구조가 엉켜 있어서 한국어로 옮기기가 매우 어려운 부분인데 원문의 의미구조를 잘 살리면서도 구어체를 적절히 구사하여 앞뒤가 맞는 한국어로 적절히 옮긴 예이다.

한편 중기 영어의 느낌을 현대 한국인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는 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김진만 번역본은 한국어의 고어투를 시의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다. 본 번역본에는 고어투의 문구들이 자주 등장한다. 가령 The Miller's Tale에서 목수를 대목, The Knight's Tale에서의 jailor를 옥리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이 작품이 번역된 연대를 감안하더라도 좀 더 고어투의 단어들이다. 이러한 단어의 사용은 ꡔ캔터베리 이야기ꡕ가 오래전 옛날의 작품이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일깨우기 위한 문화변용의 일례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이 번역본에는 1960년대의 한국어 용례가 반영되어 현대 독자들에게 익숙지 않게 보이는 표현들이나  60년대 식 말투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현대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현대 독자가 읽을 경우 좀 어렵게 느껴지거나 어색하게 보이는 표현들이 꽤 등장한다. 가령 Manciple은 조달계로, Summoner는 소환리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러한 명칭은 이 작품이 번역되던 1963년에는 ‘―계’나 ‘―리’ 등의 표현들이 하급직의 명칭으로 익숙한 것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언어 상황에서는 잘된 번역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고어투의 문체와 아울러 설명해야 할 것은 이 번역본에 등장하는 여러 명칭들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본 번역본이 한국에서의 이 작품의 수용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40여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의 영문학자들도 이 번역본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기 때문에  인물 명칭 부분은 보다 상세한 분석이 요구된다. 주지하다시피, 전반적으로 중세 영국의 신분제도나 사회적 관계가 현재의 한국과는 매우 다르고, 따라서 중세 영국에서 통용되던 신분 명칭이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보나, 현재의 사회상으로 보나 상응할 만한 어휘를 찾기 힘들다. 더구나 이러한 신분 명칭에 대한 번역의 선례가 없는 상황에서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번역어를 찾아낸 김진만의 공은 치하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독자의 눈으로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발견된다. 가령 Nun’s Priest를 수녀시승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틀린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국어에서 잘 쓰지 않는 단어이므로 수녀원 신부, 혹은 수녀원 지도 신부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Franklin은 향반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사실상 이 영어 단어에 해당하는 적절한 국어 단어가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번역을 굳이 택한 것이 이해가 가기는 한다. 그러나 향반이라는 말을 쓴다면 한국어 독자 누구도 그 정확한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되므로, 풀어서 쓰더라도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Man of Law는 변호사로 번역되어 있는데 변호사라는 번역이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작품 속에서의 이 인물에 대한 소개를 감안할 때 법률가가 더 적절하게 보인다.

한편 Wife of Bath의 명칭의 문제는 위와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Wife of Bath는 바쓰의 여장부라고 번역이 되어 있고 이러한 번역은 한국 영문학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쳐서 현재도 많은 영문학자들이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분명한 오역이다. 중세 영어에서 wif는 부인 혹은 여성의 뜻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여장부라고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이 때의 of는 ‘---출신’이라는 뜻에 가깝기 때문에 Wife of Bath는 바쓰댁, 혹은 바쓰에서 온 여인 정도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Wife of Bath를 바쓰의 여장부라고 번역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오역이라기보다는 역자의 작품 해석이 번역에 반영된 흔적이라고 보인다. Wife of Bath를 ‘여장부’로 보고 싶어하는 번역자의 시선의 흔적은 The Wife of Bath’s Prologue and Tale의 번역문 곳곳에서 발견된다. 사실상 Wife of Bath에 대한 이러한 해석 혹은 평가는 한국의 1960년대의 여성관을 상상해 본다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Wife of Bath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이왕이면 더 방종하고 과격한 여인으로 보이도록 번역한 듯한 느낌이 확연하다. 가령  The Wife of Bath’s Prologue and Tale에서 김진만은 “Housbondes at chirche dore I have had fyve, --”(6)를 “나는 성당 문 앞에서 자그마치 다섯 사람의 남편을 맞았고”라고 번역하여 원문에 없는 ‘자그마치’라는 과장된 표현을 삽입하였는데, 이것은 번역자가 Wife of Bath의 바람기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8)

작중 인물에 대한 작가의 편견 혹은 해석은 번역에 좀 더 미묘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The Man of Law's Tale의 다음 구절은 좋은 예이다.


                       ...Cristen prince wold fayn

Wedden his child under our lawe sweete

That us was taught by Mahoun, oure prophete. (2:222-224)


어떤 기독교도 임금이 그의 딸을 우리의 예언자 마호멧트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율법의 나라로 출가시키는 것을 기꺼이 찬성하겠습니까?


이 번역에서는 “our lawe sweete”를 율법이라고만 해석하여 sweete를 빠뜨렸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단어 하나를 빠뜨렸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리아 국민들이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 갖는 관점이 바로 이 sweete라는 단어에 반영되어 있고, 그것이 작품 속에서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생각과 대비되기 때문에 이것은 본문 속에서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 자체는 작은 한 단어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큰 함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를 해석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것은 80년대 이후 정치적 똑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도록 훈련받은 독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는 문제이다. 물론 이 번역본이 60년대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마호멧교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리감이 작용하여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을 빠뜨리게 되었다거나 사소한 문제로 넘겨 버렸다고 생각해줄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문화적 편견이 번역에 작용한 예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김진만 번역본은 뒤에 검토할 다른 번역본들과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의 영국 상황을, 그와는 전혀 다른 언어적 토양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한국의 언어로 옮기는 것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부분들도 많이 발견된다. 가령 The Wife of Bath’s Prologue의 유명한 다음 첫 구절은 그 좋은 예이다.


Experience, though noon auctoritee

Were in this world, is right ynogh for me

To speke of wo that is in mariage; (3:1-3)


세상 사람들은 성경에라도 나오는 얘기라야 곧이 듣지만 나는 내 경험만 가지고도 결혼의 갖가지 어려운 문제를 논할 충분한 자격이 있어요.(127면)


위의 인용문에서 중세영어의 auctoritee를 “성경에라도 나오는 얘기”로 번역했는데, 이 경우 auctoritee에 성경이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단어의 의미를 “성경에라도 나오는 얘기”로 제한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auctoritee가 중세 문화에서 갖는 독특한 의미 때문에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가 골치 아픈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중세 문화에서 글로 씌어진 것은 저자(author)의 글로서 권위를 갖게 되고, 특히 교부나 정통적인 신학자들의 옛 글은 아주 권위(authority)있는 글로 여겨졌고 그중에서도 성경이 가장 큰 권위를 가진 글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auctoritee를 성경으로 번역한 것이 아주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Wife of Bath가 본문 중에서 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는 작품의 내적 맥락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auctoritee를 성경으로 번역하게 되면 auctoritee의 의미를 협소한 의미로 제한해버린다는 문제가 남는다. 이러한 부분들은 현대의 한국문화와 어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세 문화와 관련된 문구를 옮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중세 영국의 문학작품을 한국어로 옮기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지만, ‘문학’ 작품이기 때문에, 특히 단어 하나하나가 중의적 의미를 갖는 시이기 때문에 번역에서 어려움이 생기는 경우도 눈에 띈다. 그 좋은 예는 The Miller’s Tale의 다음 구절이다.


This clerk was cleped hende nicholas.

Of deerne love he koude and of solas;(1:3199-3200)


이 학생의 이름은 니꼴라스, 꽤 한량다운 데가 있고, 남몰래 연애하는 재미를 보고 살았다.


이 구절의 문제는 “hende Nicholas”라는 표현이다. 여기에서 한국어로 꼭 알맞은 단어를 찾기 어려운 hende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The Miller’s Tale에서 hende Nicholas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여 hende가 일종의 별칭(epithet)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도 번역상의 문제를 야기한다. 사실상 위의 인용문에서는 “남몰래 연애하는 재미를 보고 살았다”는 번역은 별칭의 느낌을 살리지 못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원문의 의미는 물론이요 그 맛을 제대로 살리면서 한국어의 자연스런 구어 표현을 제대로 살리는 번역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hende Nicholas라는 표현이 작품 곳곳에서 나온다는 점이 문제이다. 원문에서는 이렇게 동일한 hende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문에 오면 각각의 행에서 번역을 다르게 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번역을 생략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3199행에서는 “한량다운”이라고 번역을 했는가하면 3272행에서는 “난봉꾼”으로 번역했고 3386행에서는 원문과는 무관하게 “한 집에 사는”으로 번역이 되어 있고 3397행에서는 번역이 안 되어 있다. 이러한 번역들은 사실상 한국어 번역문만 읽는다면 앞뒤 문맥과 잘 어울리고 3199행이나 3272행의 경우에는 번역 자체가 크게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 hende Nicholas라는 어구는 초서가 Nicholas의 별칭처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작품 해석이나 인물 분석의 중요한 한 가지 열쇠로 작용할 수 있도록 의도하고 있는 부분이다. 작가는 ‘궁정풍의’(courtly)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hende를 Nicholas의 이름 앞에 붙임으로써 앞의 The Knight's Tale의 궁정풍의 사랑의 courtly와 대조되도록 만들게 하기도 하고, ‘손이 잰‘이라는 의미로 hende를 사용하여 Nicholas의 행동의 특징, 혹은 성격을 암시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hende의 의미가 갖는 이러한 다의성을 이용하여 단어 자체의 아이러니도 찾을 수 있게 하는 등 다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hende를 이렇게 각기 다르게 풀어서 쓴다거나, 별칭이 아닌 서술어나 기타 수식어구로 처리하게 되면 원문의 의미가 살아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상 이 번역이 무엇을 의도했는가의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번역에서 학문적 엄밀성을 더 중시하는가, 아니면 번역어의 유창성과 가독성, 그리고 번역어 문학권에서의 문학성 등을 더 중시하는가라는 번역 철학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다 갖출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면, 그리고 양자택일의 가능성 중 후자를 택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번역이 나왔다고 풀이한다면 이와 같은 번역을 흠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판단하기 어렵게 된다.



IV


문공사에서 자이언트 문고본 형태로 출간된 ꡔ캔터베리 이야기ꡕ는 번역자의 이름은 정음사 번역본의 김진만과 동일하지만 전혀 다른 번역자의 번역본임이 분명하다. 이 번역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와 오역을 안고 있다. 이러한 오역본이 제대로 된 훌륭한 번역본을 만든 번역자와 동일한 이름으로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은 한국 번역문학의 난맥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으로서 향후 번역문학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큰 문제라고 여겨진다.

본 번역본이 얼마나 부실한 번역인가 하는 것은 가령 The Canterbury Tales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인 첫 18행만 보아도 쉽게 할 수 있다. 이 부분의 번역에서 틀린 단어, 틀린 표현, 틀린 문장 구조, 생략, 변용, 정보 전달의 불충분과 왜곡, 애매성 등 부정확한 번역의 모든 경우들을 다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부정확성은 이 대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 번역본에 나타나는 모든 오역의 전형적인 예에 불과하다.


Whan that Aprill with his shoures soote

The droghte of March hath perced to the roote,

And bathed every veyne in swich licour

Of which vertu engendred is the flour;

Whan Zephirus eek with his sweete breeth

Inspired hath in every holt and heeth

The tendre croppes, and the yonge sonne

Hath in the Ram his halve cours yronne,

And smale foweles maken melodye,

That slepen al the nyght with open ye

(so Priketh hem Nature in hir corages),

Thanne longen folk to goon on pilgrimages,

And palmeres for to seken straunge strondes,

To ferne halwes, kowthe in sondry londes;

And specially from every shires ende

Of Engelond to Caunterbury they wende,

The hooly blisful martir for to seke,

That hem hath holpen whan that they were seeke. (1:1-18)


달콤한 사월의 비가 한차례 내리자 메말랐던 4월의 대지가 촉촉이 물기를 머금어 나무들은 생기를 되찾고 꽃봉오리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숲속의 나뭇가지와 무성하게 자란 관목은 서풍의 향긋한 입김으로 부드러운 작은 가지를 뻗는다. 아직 젊은 태양은 백양궁(별자리의 이름. 사월이 되면 백양궁과 금우궁 사이로 들어간다) 의 절반 들어가 있다. 밤새도록 눈을 뜬 채 잠들었던 참새는 즐겁게 조잘거리고 있다. 모든 것이 이토록 활기에 넘치는 것은 모두가 자연의 힘 덕분이다.

이 계절이 되면, 먼 지방의 영험있는 유명한 사원에 참례하거나 외국의 바닷가를 거닐어 보고 싶어진다. 특히 영국의 여러 주에서 캔터베리 사원을 찾아 순교자의 영혼을 모신 곳을 참배하려는 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9면)


위의 번역에서는 정확하게 번역한 문장을 찾는 것이 오히려 어렵다. 일단 첫 줄에서 "droughte of March"가 “4월의 대지”로 바뀌었는가 하면, 새들은 갑자기 참새로 탈바꿈되어 있다. "so priketh hem nature in hir corages"는 “모든 것이 이토록 활기에 넘치는 것은 모두가 자연의 힘 덕분이다.”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인용문에서 자연이 활기가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문에 대한 해석이나 해설을 번역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이 인용문의 번역이 오역임을 가장 명백히 보여주는 구절 중 하나는 “seken straunge strondes”를  “외국의 바닷가를 거닐어 보고 싶어진다”고 번역한 것이다. 작품 전체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가 순례인데 이러한 본래의 의미는 완전히 사상시키고 원문에는 있지도 않은 “거닐어 보고 싶어진다”를 집어 넣었다는 사실은 이 번역이 얼마나 잘못된 원문이해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잘 드러낸다. 또 이 구절에서 순교의 모티프를 설명하는 중요한 대목인 “The hooly blisful martir for to seke, That hem hath holpen whan that they were seeke”를 아예 해석하지 않은 것 역시 큰 문제이다.

너무도 유명한 The Wife of Bath’s Tale의 첫 부분 번역도 오역 투성이이다.


Experience, though noon auctoritee

Were in this world, is right ynogh for me

To speke of wo that is in mariage;

For, lordynges, sith I twelve yeer was of age,

Thonked be God that is eterne on lyve,

Housbondes at chirche dore I have had fyve ―

If I so ofte myghte have ywedded bee ―

And alle were worthy men in hir degree.

But me was toold, certeyn, nat longe agoon is,

That sith that Crist ne wente nevere but onis

To weddyng, in the Cane of Galilee,

That by the same ensample taughte he me

That I ne sholde wedded be but ones.

Herkne eek, lo, which a sharp word for the nones,

Biside a welle, Jhesus, God and man,

Spak in repreeve of the Samaritan:

‘Thou hast yhad fyve housbondes,’ quod he,

‘And that ilke man that now hath thee

Is noght thyn housbonde,’ thus seyde he certeyn.

What that he mente therby, I kan nat seyn;

But that I axe, why that the fifthe man

Was noon housbonde to the Samaritan?

How manye myghte she have in mariage? (3:1-23)


세상에는 권위자도 있고 경험에 대한 서적도 많으나 결혼의 폐습에 관해서는 권위자 못지않게 충분히 나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난 영생하시는 하나님 덕분에 열두 살에 결혼한 뒤 교회에서 정식으로 결혼하기를 다섯 번, 남편도 다섯 사람을 가진 셈입니다. 용케도 이렇게 몇 번이나 결혼한거에요. 더우기 남편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은 있었으나 저마다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리스도는 갈릴리의 가나라는 곳에서 꼭 한번 결혼식에 참석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다더군요. 그 예에서 비롯되어 결혼은 한 번만 하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신이며 동시에 사람이기도 했던 그리스도가 샘가에서 사마리아의 여자를 혼례식 일로 나무랐을 때의 말씀은 상당히 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이런 말씀이었지요. 「너는 다섯사람의 남편을 맞은 여자다. 이번에 너를 아내로 삼는 남자는 너의 남편이 아니다.」하기야 이 말의 참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다섯 번째의 남자가 어째서 사마리아 여자의 남편이 아닐까요? 그녀는 몇 번 결혼을 해야 된단 말인가요? (109-110면)


이 인용문에서는 우선 본론의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인 auctoritee를 “경험에 대한 서적”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 번역자가 작품의 기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Wife of Bath는 auctoritee를 경험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제시했던 것인데 이것을 경험에 대한 서적이라고 번역한다는 것은 작품의 의미를 완전히 반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wo that is in mariage”를 “결혼의 폐습”이라고 번역한 것도 이 작품의 주제를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절은 Wife of Bath는 결혼 생활에 내재하는 괴로움을 말하는 것으로서 중세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반여성주의(antifeminism)담론을 언급하는 셈인데 본 번역본에서는 이것이 마치 결혼이라는 제도가 갖고 있는 폐습인 것처럼 오독하게 만든다. “Housbondes at chirche dore I have had fyve”를 “교회에서 정식으로 결혼하기를 다섯 번, 남편도 다섯 사람을 가진 셈입니다”로 번역한 것도 임의로 이야기를 덧붙인 것이다. “If I so ofte myghte have ywedded bee”가 “용케도 이렇게 몇 번이나 결혼한거에요”로 번역된 것도 오역이다. 원래는 내가 그렇게 자주 결혼해도 되는 것이라면 정도의 뜻이다. 또한 “And alle were worthy men in hir degree”를 “더욱이 남편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은 있었으나 저마다 좋은 사람이었습니다”로 번역했는데 이것 역시 오역이다. 전체적으로 중세 영어 자체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부족한 것은 물론이요, 당대 문화나 The Wife of Bath's Prologue and Tale에 대한 이해가 매우 결핍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위에서 보듯이 이 번역본은 The Canterbury Tales의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구절들을 번역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이러한 예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니 제대로 된 번역을 찾기가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코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이라고 볼 수 없다.



V


송병선역 ꡔ캔터베리 이야기ꡕ는 스페인문학 전공자의 영문학 번역본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 번역본이었다. 그리고 검토해본 결과, 중세영어를 전공하지 않은 번역자가 중세영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처음의 선입견을 상당 정도 불식시킬 수 있는 번역본이기도 했다. 일단 The Canterbury Tales의 현대 영어 번역자들도 현대 독자들의 취향이나 문학적 가치 등을 고려하여 종종 누락시키는 The Tale of MelibeeThe Parson's Tale 등을 모두 포함한 완역을 해냈다는 것은 상당한 업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번역자는 가능한 한 원문의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고 내용을 충실하게 옮기기 위해서 산문 번역을 택했다고 <작품해설>에서 밝히고 있는데, 검토 결과 실제로 전체적인 내용 전달에 무리가 없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자의 주를 제공하고 있으며 번역 원본으로 채택한 판본을 명확하게 밝히는 등 형식적 온전성을 위해 책임 있는 번역자의 임무를 다하려고 노력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자가 중세영문학 전공자가 아니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작용했기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통사구조를 잘못 파악했다거나, 인물의 성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거나, 작품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의 결여가 드러난다거나 하는 등,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여러 부분들에서 골고루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중세의 작품에서 중세 영어에 대한 이해는 작품 이해의 기초이자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기반이 미약한 상태에서 시도한 번역이기 때문인지, 초서가 문학적 의미를 중첩시켜 놓는 미묘한 부분들을 번역할 때 작품의 섬세한 의미들을 스쳐 지나가거나 간과해버리는 듯한 곳들이 눈에 띠어서 아쉬운 대목들이 많았다.

우선 아쉽게도 The Canterbury Tales에서 가장 잘 알려진 General Prologue의 첫 4행에서 부정확한 번역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이 번역본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동시에 이 번역본 전체의 오역의 성격을 잘 드러내기도 한다.


Whan that Aprill with his shoures soote

The droghte of March hath perced to the roote,

And bathed every veyne in swich licour

Of which vertu engendred is the flour; (1:1-4)


은은하게 내리는 4월의 비가 3월의 가물었던 땅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고 있었다. 그 비는 꽃을 피우기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대지의 모든 나뭇가지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21면)


우선 ‘4월의 달콤한 소나기’가 “은은하게 내리는 4월의 비”가 되었고, “3월의 가뭄을 속속들이 꿰뚫고” 정도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 “땅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고 있었다”라고 오역된 것을 들 수 있다. 문장 구조에서는 더 큰 문제가 발견된다. “파고들어가고 있었다” “적시고 있었다”는 when으로 시작되는 종속절의 의미가 반영되지 않은 번역이다. 통사 구조를 잘못 파악했을 뿐 아니라,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시적인 어조를  마치 특정 사실에 대한 사실적 보고인 것처럼 바꾸어 놓았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같은 식의 오역이 when으로 연결되는 절이 끝나는 11행까지 계속된다.

또한 중대한 아이러니를 파악하지 못한 부분도 발견된다.


Boold was hir face, and fair, and reed of hewe.

She was a worthy womman al hir lyve: (1:458-59)


얼굴은 아름다웠고 이목구비가 뚜렷했으며, 우아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평생 동안 남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아온 여인이었다. (34면)


Wife of Bath의 외모를 묘사하는 이 대목에서 그녀의 성품을 짐작하게 하는 묘사인 “reed of hewe”는 해석을 안 했다. 또 어느 부분을 보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고 번역했는지 그 근거를 찾기 어려우며, 더욱이 Wife of Bath의 삶이나 외모 묘사 어느 부분에서도 그녀에게 “우아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고 말할 만한 근거는 없다. 또한 그녀를 “worthy”라고 표현할 때 이것은 비꼬는 의미가 포함되었거나 아니면 순진한 화자가 그냥 감탄하면서 말하는 ‘대단한’ 정도의 의미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존경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아이러니를 살리지 못한 것은 General Prologue의 묘사, The Wife of Bath’s Prologue and Tale 사이의 관계 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정확하고 적절한 어법, 어휘 사용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김진만 번역본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확연한 차이 중 하나이다. 가령 The Clerk’s Tale에서  Walter와 Janicular 사이의 대화를 번역하면서 김진만 정음사본은 계층, 계급간의 관계를 고려하여 어투를 선택한다. 다음은 김진만의 번역본에서 Walter가 Janicular에게 말하는 부분이다.


Janicula, I neither may ne kan

Lenger the plesance of myn herte hyde.

If that thou vouche sauf, what so bityde,

Thy doghter wol I take, er that I wende,

As for my wyf, unto hir lyves ende. (4:304-308)


제니큘라, 나는 이 이상 더 내 마음의 기쁨을 숨길 수 없다. 만일 네가 허락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저 딸을 나의 평생의 아내로 맞아 데리고 가겠다. (181면)


여기에 대해 제니큘라는 영주인 월터에게 적절하게 존대법을 쓴다.


                      “...my willynge

Is as ye wole, ne ayeynes youre likynge

I wol no thyng, ye be my lord so deere;

Right as yow lust, governeth this mateere.” (4:319-322)


영주님의 원하시는 것이 곧 소인의 소원이요, 귀하신 영주님의 뜻에 거역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영주님 마음대로 이 일을 처리해 주십시오. (181면)


동일한 부분을 번역하면서 송병선은 Walter 또한 Janicula에게 존대법을 쓰게 한다.


자니쿨라, 난 내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으며, 또한 숨겨서도 안 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당신만 허락하신다면 당신의 딸을 데려가고 싶습니다. (269면)


그러나 중세의 신분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영주가 평민에게 존대말을 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우므로 번역 또한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 적절하다.

같은 한국어 번역본인 김진만 번역본과 비교했을 때 전체적으로 정확한 어휘 사용이 안 된 부분이 많다는 점 또한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진만 번역본에서는 The Clerk’s Tale에서 transfigure, translate라는 단어가 나온 경우 치장을 하여 모습이 바뀌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으나 송병선 번역본에서는 그냥 화려하게 치장을 했다고만 한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단순히 화려한 치장의 문제를 넘어서서 신분상의 변화, 외양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라 이루어지는 역할의 변화, 그리고 인물 평가의 변화 등 다중적이고 다차원적인 의미를 갖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좀 더 섬세한 번역이 요구된다. 또한 The Miller’s Tale의 경우에는 Nicholas가 엉덩이를 창 밖으로 얼마나 많이 뺐는가를 초서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으나 번역본에서는 반영되지 않았다. 이러한 부분은 얼핏 보면 별 것 아닌 문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상 작품의 희극적 효과를 위해서나 Nicholas의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이 요구된다. 또한 The Wife of Bath’s Prologue의 경우에는 Wife of Bath가 기존의 교회의 가르침, 특히 그중에서도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녀의 성격 분석과 그녀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데 이러한 태도를 나타내는 구절 등에서 명백한 오역이 드러나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누락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부분도 있다. The Pardoner’s Tale의 경우 작품의 극적 구조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누락이 되어 있다. 가령 “lordynges, quod he, in chirches whan I preche,” (6:329)를 송병선은 “여러분, 나는 성당에서 설교할 때”라고 번역하여 원문의 “quod he”를 해석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면죄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떠벌이듯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긴 구절이기 때문에 반드시 번역하고 지나가야 한다. 이 구절이 없어지면 The Pardoner’s Prologue의 드라마적인 성격이 많이 희석되게 되거나 오해의 소지마저 생기게 된다. 누락이 중대한 결함이 되는 또 다른 예로 다음을 들 수 있다.


First I pronounce wheenes that I come,

And thanne my bulles shewe I, alle and some.

Oure lige lordes seel on my patente,

That shewe I first, my body to warente,

That no man be so boold, ne preest ne clerk,

Me to destourbe of Cristes hooly werk.

And after that thanne telle I forth my tales;

Bulles of popes and of cardynales,

Of patriarkes and bishopes I shewe

And in Latyn I speke a wordes fewe,

To saffron with my predicacioun,

And for to stire hem to devocioun. (6:335-346)


우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한 다음 내가 가진 교황님의 신임장을 모두 보여드리겠습니다. 먼저 나의 신분을 밝히기 위해 주교님의 도장이 커다랗게 찍힌 위임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성직자이건 누구이건 내가 행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업을 감히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럼 지금 교황님과 추기경, 대주교와 주교와 같은 높은 분들이 준 신임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라틴어로 몇 마디 하겠습니다. 그것은 내 설교를 멋지게 보이게 하고, 신도들에게 경건한 마음을 고양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393면)


여기에서 Pardoner는 자기가 평소에 하던 설교의 내용과 형식을 순례자 일행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본 번역문에서는 시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시작하려고 합니다” 등 마치 현재 설교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같이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원문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어서 번역문만 읽으면 독자는 면죄사가 현재 설교를 진짜로 시작하려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이외에도 마지막의 Retraction의 제목을 「초서의 고별사」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철회」라는 본연의 의미를 살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 부분이 철회의 문학 전통이라는 맥락 속에서 쓰여졌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번역이다. 철회의 전통이라는 중세 문학의 특성을 무시한 이러한 번역은 독자들에게 중세 문학의 고유성을 전달하는 데에도 실패한 명백한 오역이다.

이 번역본에서는 전반적으로 작품의 섬세한 의미를 훼손시키거나, 작중 인물의 성격이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번역들이 주로 발견되었다. 또한 문맥상의 의미를 오해하여 번역한 경우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의 의미만 전달해도 되는 곳에서는 오역이 덜 발견되었으나, 중세 문화, 중세 문학의 전통, 작품 각각의 문학적 의미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요구되는 곳에서는 오역이 많이 발견되었다.



VI


한울 출판사에서 2001년 발간된 이동일․이동춘의 공역 ꡔ캔터베리 이야기 1ꡕ는 The Canterbury Tales 의 전체 번역이 아니라 The General PrologueThe Knight’s Tale등 비교적 잘 알려진 6개의 이야기에 대한 번역이다. 현재 한국에서 출간된 The Canterbury Tales 번역본 중 유일한 공역본으로서, 각 이야기들을 역자들이 따로 맡아 번역했다는 발언이 없는 것으로 보아 번역된  작품들 7개를 함께 번역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 원본은 Larry D. Benson이 편집한 The Riverside Chaucer임을 밝히고 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수준의 간단한 해설이 붙어 있으며, 많지는 않지만 현대 한국어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어구들에 대한 간단한 주석이 붙어 있다. 이 번역본은 앞에서 검토한 김진만 정음사 번역본과 여러모로 대조되는 번역이다. 이 번역본의 특징은 원문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는 점이다. 중세 전공의 소장 교수들이 시도한 번역답게 원문의 종교적 의미나 문화적 의미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번역되었다. 이들이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단어 선택에 있어서도 한국어로 얼마나 매끄럽게 읽힐 것인가 보다는 원문에 얼마나 더 충실하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고심한 흔적이 여실하다(4-6면). 중세 영어나 중세 문화 전반에 걸친 체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고 있고, 중세 문화나 기독교, 사회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필요로 하는 번역 부분에서 고르게 일정 수준 이상의 번역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이 번역본의 가장 큰 장점이다. 따라서 본 번역본은, 전반적으로 오역이 드물며 원문을 읽을 수 없는 독자라 하더라도 번역본만을 읽고 원문의 의미를 크게 왜곡됨이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번역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 번역본은 최근의 번역이기 때문인지 현대 독자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문구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중세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들이 읽어도 어렵지 않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들은 다시금 단점이라 해석할 여지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원문의 ‘의미’에 충실한 번역을 만들려고 하다보니 오히려 원문이 가진 흥과 재미, 각 화자들에 따라 다르게 구사되는 문체적 특징들이 사상되면서 번역이 밋밋하게 되는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다. 물론 번역에 있어서 원문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면서 원문이 가진 문체적 특성이나 개성있는 말투를 고스란히 옮겨달라고 주문하는 것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처럼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김진만 번역본이 생동감있게 화자의 특징이나 문체적 특성을 포착하는데 있어서 장기를 보인다면 본 번역본은 그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미흡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문제로서, 본 번역의 큰 특징이자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운문과 산문 번역의 기준이 일정치 않다는 것이다. 원래 ꡔ캔터베리 이야기ꡕ에서 산문은 The Tale of MelibeeThe Parson’s Tale 이렇게 두 개의 이야기밖에 없는데 본 번역에서는 The Knight’s Tale, The Franklin’s Tale은 산문으로 번역하고 The Clerk's Tale은 산문과 운문의 중간 형태로서 연(stanza)정도로만 구분된 번역이 등장하고 나머지 General Prologue, The Miller’s Tale, The Wife of Bath’s Prologue and Tale, The Pardoner’s Tale은 운문으로 번역이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역자들은 “이야기의 특성상 운문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는 운문으로, 산문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는 산문으로 번역하였다. 원 작품에 흐르는 운율의 의미와 구수한 이야기체의 깊은 맛을 운문과 산문체 혼합으로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역자로서 더없는 기쁨이겠다”(6쪽)라고 밝히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선별의 기준이 애매하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전형적인 로맨스인 The Knight’s Tale은 산문으로 번역하고, 기존의 종교적 가르침에 반박하며 변론하고 자신의 전기적 사실을 늘어놓는 The Wife of Bath’s Prologue는 운문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원문의 특성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근거를 찾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영어의 운문을 한국어의 운문으로 옮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일이므로, 원문의 산문/운문을 그대로 한국어의 산문/운문으로 옮기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되었다면 오히려 일관되게 산문으로 번역하는 것이 독자들의 불필요한 오해나 혼란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 외에도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어떤 이야기들은 문단 구분의 원칙이 불분명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가령 The Franklin’s Tale 같은 경우에는 어떤 때에는 Larry D. Benson의 문단구분을 따르고 있지만 어떤 곳에서는 Benson의 문단 구분과 상관없이 문장 하나마다 새로운 문단으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직접적인 번역문의 정확성 여부와는 별도로 독자에게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정이 요구된다.

본 번역본에서 번역된 7개의 작품의 전체 분량이 총 7992행이어서 검토 대상은 그것의 1/10에 해당하는 900여 행으로 잡았다. 다만 본 검토에서는 이 900여행을 기계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검토대상 이야기들 각각에서 10%씩을 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 10%를 선택할 때에도 각각의 이야기에서 특히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많은 비평가들이 인정해왔던 부분을 선별하여 검토해보려고 노력하였다.

본 검토에서 번역의 대상으로 삼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총 행수)

The General Prologue 1-39, 331-476 (184)

The Knight’s Prologue and Tale 1033-1186, 2987-3089 (255)

The Miller’s Prologue and Tale 3188-3232, 3339-3369 (72)

The Wife of Bath’s Prologue and Tale 1-134 (134)

The Clerk’s Prologue and Tale 344-448 (114)

The Franklin’s Prologue and Tale 806-894 (88)

The Pardoner’s Introduction, Prologue, and Tale 329-422 (93)

즉 총 940여행을 검토하였는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실상 본 번역본은 분명한 오역의 예는 매우 적다.

다만 김진만 번역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세의 영문학 작품을 현대의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야기되는 문제들이 다시금 발견된다. 김진만의 번역에서도 지적했던 것처럼 현대에는 없는, 혹은 한국의 역사상에는 없었던 개념을 표현할 때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번역들이 가끔씩 등장한다. 가령 신분에 관련된 단어들을 번역하는 경우에 이런 예가 많이 발견되는데 General Prologue에서 Franklin(1:331)을 시골 유지로 번역한다거나 a Persoun of a Toun (1:478)을 시골 사제로 번역한다거나 하는 경우가 그 예이다. Franklin을 시골 유지라고 표현하면 한국어의 어감으로는 시골의 지도층 인사라는 의미가 포함되는데 이렇게 되면 Franklin이 귀족이 아니라는 점이 잘 드러나지 않게 된다. 또 a Persoun of a Toun (1:478)을 시골 사제로 번역한 것은 ꡔ캔터베리 이야기ꡕ에서의 묘사나 맥락을 본다면 틀리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parson이라는 단어 속에는 ‘시골’의 뜻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교구 신부, 혹은 본당 신부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General Prologue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명칭을 제외하더라도 본문의 번역 중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나타난다. 가령 The Knight’s Tale에서 “And though he were a povre bacheler,”(1:3085)를 “비록 그가 가진 것 없는 수습기사라 할지라도”로 번역하고 있는데 bacheler를 수습기사라고 하면 정식 기사가 되지 못한 squire로 혼동될 우려가 생기기 때문에 젊은 기사라고 번역하는 것이더 나을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생긴다.

  신분을 가리키는 용어 말고도 현대에는 없는 개념을 번역하는 것 역시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가령 중세의 ‘gentil’ 혹은 'gentility'와 같은 개념은 좋은 예이다. 김진만 번역본을 검토할 때도 논의했던 것처럼, 특히 초서가 동일한 단어를 같은 이야기 내에서 반복하여 사용하면서 이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여러 연관된 의미들을 활용하는 경우에는 이 단어를 시종일관 같은 단어로 번역해서 원문이 의도하는 바를 전달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말로는 각각의 문맥에 맞게 차별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풀기 어려운 숙제로 남아 있다. 가령 The Knight’s Tale에서 이동일․이동춘은 “For gentil mercy oghte to passen right” (1:3089)를 “숭고한 자비가 엄격한 공정을 압도하는 것이니라”고 번역하여 gentil을 “숭고한”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And he hire serveth so gentilly,” (1:3104)을 “팔라몬은 에멜리를 알뜰히 섬겨서”라고 번역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문장에서 gentilly는 이들의 신분이 귀족이며 이들의 사랑은 그 신분에 걸맞는 고결성을 지니고 있음을 함축하는 단어인데, 이것을 ‘알뜰히’라고 번역하면 지나치게 구어체화시킨다거나 혹은 일상생활적인 의미인 것처럼 느껴지게 될 뿐 아니라, 귀족으로서의 신분과 관련된 이들의 궁정적 사랑의 특성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일한 단어가 여러번 사용되면서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갖게되는 좋은 예는 앞의 김진만 번역본에서도 논한 것처럼 The Miller's Tale의 hende Nicholas처럼 hende가 별칭으로 사용된 구절들이다 (3199, 3272, 3386 등). 그런데 이동일․이동춘 번역본에서는 이것이 동일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다르게 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번역을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이것을 초서가 별칭으로 의도했다는 점을 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오역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 번역본은 앞서도 지적한 것처럼 명백한 오역의 예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는데 다음의 번역만은 예외라고 할 수 있으므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The Wife of Bath's Prologue에서 “Ye shul have queynte right ynogh at eve.”(332)를 “틀림없이 밤마다 내 음경은 고스란히 당신의 것이니”라고 번역했는데, 음경은 남성의 생식기이지 여성의 생식기가 아니다.


VII


이제까지 김진만(정음사), 김진만(문공사 자이언트 문고), 송병선(책이 있는 마을), 이동일․이동춘(한울)의 번역본을 검토해 보았다. 이 4종의 번역본들은 모두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이 중 2종의 번역본, 즉 김진만(정음사)과 이동일․이동춘 번역본이 신뢰할만하다는 평가를 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김진만 정음사본은 원문의 맥락 이해, 문학적 의미의 재생, 번역본 전체에 일관된 번역 원칙 등 모든 면에 있어서 대단히 우수하다고 생각된다. The Canterbury Tales 총 20,000여 행 중 약 10%에 해당하는 1750여 행을 검토한 결과 명백히 잘못된 번역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맛깔스럽고 감칠맛 나게 한국어를 구사한 솜씨가 빼어났다.  또한 다소 부정확하다는 의심이 드는 부분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원문의 의미를 오해해서라기보다는 원문의 분위기를 한국어로 보다 잘 전달하고자 고심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생각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은 원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문에 대한 충실성에서도 우수하며 한국어로 읽었을 때 의미와 분위기 전달이라는 가독성 측면에서도 매우 훌륭하다. 김진만의 이 번역본은 매우 훌륭한 번역본임에도 불구하고 원 번역본이 절판되었고, 또한 구할 수 있는 판본도 구식의 세로쓰기 편집 체제로 출간된 것이어서 현대 독자들이 읽기가 어렵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독자층의 수요에 맞게 글자쓰기도 가로판으로 바꾸고 현대 독자들에게는 어려운 몇몇 단어들은 교체하여 새롭게 발간된다면 현재의 독자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이고 또 추천할만하다고 생각된다.

이동일․이동춘의 번역 또한 원문의 맥락 이해, 문학적 의미의 재생, 번역본 전체에 일관된 번역 원칙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우수하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총 8000여 행을 번역하였으며 이중 950행을 검토했는데, 이중 원문을 명확히 오역한 경우는 드물었다. 이 번역본은 원문의 충실한 의미전달을 가장 중시한 번역본으로서 신뢰할만한 번역본이다. 본문의 편집 또한 보기 좋게 되어있다는 점도 이 번역본의 미덕 중 하나이다. The Canterbury Tales 전체에 대한 번역으로 확대하면서 차제에 현재 각각의 Fragment에서 두서없이 선택된 이야기들을 각 Fragmetn 순서에 맞게 재배열하여 명실상부한 The Canterbury Tales 완역본으로 자리 잡게 되기를 기대한다.

송병선의 번역본은 번역의 수준 자체를 따지자면 중세영문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학자가 아닌 사람의 번역본치고는 비교적 믿을만한 번역이나, 전공자가 아니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작용했기 때문인지 원문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의 번역에서는 오역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김진만 문공사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와 오역을 안고 있었다. 이 번역본은 더 이상 읽혀져서는 안 되는 번역본이다. 그런데 이 번역본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번역이 오역 투성이라는 점이라는 것보다는, 이러한 오역본이 제대로 된 훌륭한 번역본을 만든 번역자와 동일한 이름으로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자의 혼동은 한국 번역문학의 난맥상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예로서 이것은 앞으로의 한국 번역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숙제라 여겨진다.

이와 같이 The Canterbury Tales의 번역본을 검토해본 결과 한국의 중세 영문학 연구의 발전과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좀더 다양한 번역본의 출간이 요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문번역 혹은 산문번역 등으로 번역 양식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고, 일반 대중 혹은 문학연구자 등 목표 대상에 따라 차별화된 번역이

나와 한 가지 종류의 번역만으로 온전히 전달하기 어려운 원문의 향취와 의미를 담아내야 할 것이다. 특히 주석 등을 통해 현대 한국독자들에게 생소한 중세 영어 특유의 단어나 관습을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번역본도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인하대학교 ․ 호서대학교)




주요어: 초서, ꡔ캔터베리 이야기ꡕ, 문학적 번역, 가독성, 정확성, 한국어.






인 용 문 헌


김병철. 『한국현대번역문학사연구』. 상․하권. 을유문화사, 1998.

김진만 역. ꡔ캔터베리 이야기ꡕ. 정음사, 1963.

김진만 역. ꡔ캔터베리 이야기ꡕ. 자이언트문고, 문공사, 1982.

송병선 역. ꡔ캔터베리 이야기ꡕ. 책이 있는 마을, 2002.

이동일․이동춘 역. ꡔ캔터베리 이야기ꡕ. 한울, 2001.

Benson, Larry D. ed. The Riverside Chaucer.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1987.


ABSTRACT


“Diverse folk diversely they seyde”: Korean Translations of The Canterbury Tales


Yejung Choi ․ Ji-Soo Kang


Since the early 1960’s Geoffrey Chaucer’s Canterbury Tales has been translated in parts or in its entirety into Korean. The four published translations chosen for the purpose of this review paper ― the translations by J. Kim, B. Song, and Dong-il Lee and Dongchoon Lee ― are examined according to three criteria: (1) Was the work translated with a historical, cultural and religious understanding of the medieval text?; (2) Does the target text reflect the literary aspect of the source text?; and (3) Does the target text as a whole reflect a consistent philosophy or principle of translation? J. Kim’s translation, first published in 1963, is by far the best complete translation yet with its faithfulness, readability and equivalence. The translation by Dong-il Lee and Dongchoon Lee covers 7 tales. It is also a highly accurate rendering with considerable readability even though some critical judgements the translators made seem rather random. These two translations are highly recommended for readers who seek a reliable guidance to a Middle English work they may not be able to read in its original language but would like to appreciate in its closest approximation. B. Song’s translation comes short of those two translations in terms of faithfulness to the source text even though it is reasonably readable.  The fact that the translator is not a medieval English literature specialist by training may be detected in inaccurate or inappropriate rendering of some heavily ironic or syntactically complicated passages. Another translation that unfortunately claims for its translator the same name as the first translator, J. Kim, has no justification to be on the market or on a school library shelf. It is an utterly inaccurate translation that only does violence to the original work.




Key Words: Chaucer, The Canterbury Tales, literary translation, faithfulness, readability, equivalence, Korean


1) 2001년 6월 8일 경희대에서 열린 한국 중세영문학회(현재의 한국 중세르네상스학회의 전신)의 봄 정기 학술대회에서 2001년 발간된 이동일․이동춘의 번역본 ꡔ캔터베리 이야기 Iꡕ에 대해 역자인 이동일, 이동춘 선생이 발표하고 정인주, 윤민우 선생이 토론을 한 바 있다. 또한 동 학회가 주관한 2000년 11월 18일 정기 학술대회에서도 김진만 선생이 그의 번역에 관한 발표를 한 바 있다.


2) 이 문제와 관련하여 2002년 영미문학연구회에서는 한국에 번역된 영미문학 고전작품들의 번역물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연구를 시작하였다. 본고의 저자들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영미문학연구회의 이 번역점검사업의 일부로 초서의 The Canterbury Tales의 번역물 검토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본고는 이 연구사업의 결과물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3) 현재 중세 영문학 작품의 대표적인 작품 중 번역된 것은 Troilus and Criseyde를 번역한 김재환의 ꡔ트로일루스와 크리세이드ꡕ(까치, 2001), Beowulf를 번역한 김석산의  ꡔ베오울프ꡕ(탐구당, 1976), 그리고 이동일의 ꡔ베오울프ꡕ(문학과 지성사, 1998)정도를 들 수 있다.


4) 본고에서는 영어의 번역 자체를 문제삼아 검토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논문형식에서와는 달리 작품명이나 등장인물 등의 표기와 본문 인용 시 영어원문만을 기재하기로 하겠다. 번역문 표기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번역원문 표기 방식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겠다.


5) 김병철. 『한국현대번역문학사연구』 상․하권 (을유문화사 1998), 199면.


6) 송병선의 경우 이 논문을 위해 사용한 검토본은 2002년도에 출간된 초판4쇄본임을 밝혀둔다.


7) 역자들이 자신의 번역의 원본을 밝힌 것은 다음과 같다. 김진만 (정음사)의 번역본의 경우에는 F. N. Robinson ed, The Works of Geoffrey Chaucer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1957)를 번역의 원본으로, 송병선 번역본은 John Fisher ed., The Complete Poetry and Prose of Geoffrey Chaucer (New York 1977)와 Cuentos de Canterbury (Madrid, Catedra, 1991)로 밝히고 있다. 이동일, 이동춘의 번역본은 Larry D. Benson ed., The Riverside Chaucer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1987)을 번역 원본으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는 반면, 김진만(문공사 자이언트 문고)의 경우에는 단순히 ‘Great Book 《캔터베리 이야기》원문 완역본에서 정선 발췌’했다고 밝히고 있다(221).


8) 이 외에도 등장인물의 명칭에 관련하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그것은 이 번역본의 목차에서 The Tale of MelibeeThe Prologue and Tale of Sir Thopas를 모두 「초오서의 이야기」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이야기의 화자가 초서인 것은 틀림없지만 목차에서는 원문에 충실하게 「멜리비의 이야기」, 「토파즈경의 서문과 이야기」 식으로 쓰는 것이 합당하다.


9) 다만 1963년에 김진만 선생의 완역본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송병선 본은 책 표지에서 국내 최초 완역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은 중대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