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 연구
- ꡔ신의 전사들ꡕ(Warriors of God)을 중심으로
이 현 주
I. 들어가는 말
ꡔ신의 전사들ꡕ의 저자인 제임스 레스턴(James Reston)은 미국의 저널리스트이며 퓰리처상 수상 작가이다. 그는 주로 기록 역사 소설을 썼는데 그 대표작으로는 갈릴레오를 현대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한 ꡔ갈릴레오ꡕ(Galileo), 유럽 역사를 독특하게 보여 주어 큰 호평을 받았던 ꡔ최후의 계시ꡕ(The Last Apocalypse) 등이 있다. 가장 최근작인 ꡔ신의 전사들ꡕ은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이 작품이 호평을 받은 이유는 워싱턴 포스트 책 세상(The Washington Post Book World)에서 “편견에서 벗어난 신선한 시각”이라고 평한 것처럼 기존의 서구 중심적 시각, 즉 기독교 전통의 관점으로 이해되어온 십자군 전쟁에 대해 아랍인1)의 관점도 포괄하여 객관적으로 조명하려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레스턴이 십자군 전쟁에 대해 완전히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묘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서구 기독교 전통의 문화 속에서 낳고 자란 저자가 얼마만큼 객관적으로 십자군 전쟁을 기술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논자는 ꡔ신의 전사들ꡕ에 나타난 저자의 객관성 문제를 두 가지 측면에서 논해 보고자 한다. 먼저 그 발발 동기에 대한 분석이다. 전통 기독교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십자군 전쟁은 이교도의 손에서 성지를 탈환하려는 종교전쟁이다. 그러나 레스턴은 이런 기독교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기독교, 이슬람에게 모두 동등하게 명분이 있는 전쟁, 즉 ‘한 종교의 영광이 다른 종교에겐 그만큼 치욕이며 불명예인’(117) 전쟁으로 십자군 전쟁을 간주한다.
레스턴에 따르자면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된 예루살렘은 기독교나 이슬람 모두에게 중요한 성지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예수가 입성하여 많은 말씀을 선포한 곳이고, 성십자2)가 모셔진 성묘교회가 있는 곳이며 또 솔로몬의 신전이 위치한 곳이다. 그리고 대선지자 아브라함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무슬림들에게도 예루살렘은 메카3)와 메디나4) 다음으로 신성한 도시이다. 이곳은 아브라함5)이 살던 곳이며 예언자의 고향이고, 신성한 계시가 내려온 곳이었다. 쿠란에 의하면 583년 전에 예언자 무함마드는 부라크라는 아름다운 날개 돋친 말을 타고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예수6)를 포함하여 과거의 선지자들이 후한 향연을 베풀어 그를 환영했으며 그 후 그는 천국에서 유래했다는 바위(‘바위의 돔’)에서 천상의 사다리를 타고 승천하였다. 이런 전설을 생각하여 볼 때 예루살렘은 무슬림들이 숭배하는 ‘바위의 돔’, 오마르 모스크 등 기독교의 성묘교회에 버금가는 대사원이 위치한 장소이다. 따라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에게 예루살렘은 중요한 성지이며 이곳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렇게 레스턴은 십자군 전쟁을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에게 똑같이 명분이 있는 정당한 전쟁이라는 명제를 갖고 글을 서술해가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십자군 전쟁의 발발 동기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하면서 이 과정에서 이슬람의 시각도 강하게 투영한다.
ꡔ신의 전사들ꡕ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 잉글랜드와 이슬람의 영웅 사자(심)왕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7)와 살라딘(Saladin)을 서술하는 작가의 시각에 대해서도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레스턴은 중세 십자군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주 초점을 3차 십자군 전쟁에 맞추었다. 십자군 원정의 가장 정점에 이루어진 이 3차 십자군 원정은 다른 어느 십자군 원정보다 그 규모나 참여국에 있어서 대단했고 특히 여기에는 독일의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왕(Frederick Babarossa),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Richard I),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Philip II Augustus), 이슬람 왕국의 술탄8) 살라딘 등 용감하고 위대한 영웅들의 전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스턴은 이들 인물들 중에 잉글랜드와 이슬람의 대표적 영웅 사자왕 리처드와 살라딘을 중심으로 3차 십자군 전쟁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는데, 과연 레스턴이 이 두 인물을 정말로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기술했는지 이 논문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자신의 선조인 사자왕 리처드와 과거에는 전쟁의 상대였던 다른 문화와 종교 세계의 영웅을 저자가 동등하게 편견 없이 그릴 수 있는지는 많은 의문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II.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에게 서로 다르게 이해되는 십자군 전쟁
중세의 십자군 전쟁에 대해 기독교적인 관점과 아랍인의 관점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중세의 십자군 전쟁은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 II)가 “이교도”의 손에서 성지(聖地)를 구한다는 고귀한 종교적 목적 하에 시작한 종교 전쟁이다. 3세기부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해왔다. 이 당시 순례자 중의 하나였던 성 헬레나는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성십자가:True Cross)라고 믿었던 것을 발견했고 그녀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I:약 274-337)는 이곳에 성묘(聖墓)교회를 세웠다. 이후 7세기에 이슬람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복하기 전까지 비잔티움과 서방의 많은 순례자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위한 성유물을 얻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물론 순례는 위험한 일이고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었다. 특히 팔레스타인이 무슬림9)의 수중에 있었기에 그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지만 하룬 알 라시드(Harun-al-Rashid: 763-809)가 시작한 관용정책으로 인해 순례자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예루살렘 순례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11세기 초 이집트의 칼리프10) 자리에 오른 하킴(Hakim)은 자신을 성육신이라 부르며 성묘교회를 파괴하고 기독교인과 유대인, 그리고 순례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1071년 예루살렘이 셀주크 투르크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그리고 거대해진11) 투르크 제국의 내분으로 인해 예루살렘 순례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자 셀주크인을 무찔러 안전한 순례길을 확보하려는 비잔틴의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Alexius Comneus: 1081-1118)의 요청으로 1096년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어 근 200년간 여러 차례12) 이루어졌다
1950년대 초 십자군 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해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양차 대전이 끝난 후 전쟁을 분석하려는 노력이 활성화되고 이와 더불어 중세의 가장 대표적인 전쟁인 십자군 전쟁에 대한 관심도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에는 역사학자들이 주로 '법률적 접근방법(constitutional approach)’을 선호하였는데, 이는 1100년경의 예루살렘 지역의 판례 모음집인 ꡔ예루살렘의 재판들Assises de Je'rusalemꡕ을 주근거로 삼아 십자군 전쟁을 분석한 접근 방법이었다. 1970년대에 이르자 이 ‘법률적 접근방법’ 보다 왕들의 실제 통치방법을 중심으로 십자군 전쟁을 이해하는 ‘제도적 접근방법(institutional approach)'이 유행하였다(Jonathan Riley-Smith 6). 또한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십자군 전쟁을 이해하려 하기도 하였다. 십자군 원정의 실제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이 이루어졌고 또 이제까지는 무시되었던 중세의 다양한 전술서(戰術書)에 대한 관심도 살아났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 발발 원인에 대한 분석은 다양하다. 그 대표적 동기가 바로 유럽 귀족들의 ‘호전성’의 전환이다.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와 기사들은 쟈크 르 고프가 ‘풍토병’이라 지칭할 정도로 대부분 전투에 열광했다(94). 따라서 이런 호전성을 하나의 정당한 대의명분, 즉 이교도에 대한 투쟁으로 바꾸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교회와 교황권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끼리 싸우는 추잡함을 기독교 세계로부터 추방하고 봉건 세계의 호전적 열정에 대해 바람직한 출구를 제공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이제까지 결여되었던 정신과 행동의 통일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원대한 목표와 계획을 기독교 세계에 제시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또 다른 ‘십자군 원정의 진짜 속셈은 셀주크 투르크가 지배하고 있는 소아시아와 오리엔트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물자를 약탈하겠다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동기였다’(이희수 6). 11세기의 유럽은 봉건 영주들이 자신들의 영토확장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봉건 시대의 영토 확장이란 부의 확장이고 이 부의 확장은 바로 권력의 확장으로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십자군 전쟁은 바로 영토를 확장하기에, 즉 식민지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런 경제적 목적은 기사 계급에게도 적용된다. 중세에는 일반적으로 장자 상속제였다. 집안의 영토는 장자가 상속하게 때문에 다른 아들들은 영토를 소유할 기회가 없었다(하우저 290). 이런 귀족이나 기사들 그리고 유럽 국가에서 문제를 일으켜 영토를 소유할 수 없는 귀족이나 기사들에게 십자군 원정은 자신들의 영토를 가질 절호의 기회였다. 3차 십자군 원정의 주요 인물인 뤼지냥의 기(Guy of Lusignan)13)나 샤티옹의 레지날드14)도 이런 인물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십자군 전쟁이 발발했던 11세기에 교회와 교황권은 종교의 권위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 당시 유럽 곳곳에서 교황권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대표적인 사건이 캔터베리의 토마스 베켓(Thomas a' Beckett) 시해 사건이었다. 이는 왕권을 준수하기 보다는 교황권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켄터베리의 주교 베켓을 헨리 2세 휘하의 귀족 4명이 살해한 사건으로 결국 헨리 2세의 공개적인 사과15)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교회와 교황권은 자신의 권위를 다시 세울 획기적인 사건이 필요했다. 이런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바로 십자군 원정이었고 실제로 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 교회와 교황권은 많은 힘을 얻었다.
위에서 제시한 연구 방법 이외에도 많은 역사학자들이 십자군 전쟁을 분석했지만 대부분이 아랍의 시각을 배제한 서구 중심적, 즉 기독교 시각 중심적이다. 그러나 이슬람이 바라보는 십자군 전쟁은 또 다르다. 이슬람의 역사에는 십자군 전쟁이라는 이름이 없다. 대신에 이들에게 십자군 전쟁의 시기는 ‘프랑크 침공’(아만 말루프 18)의 시기며 이슬람에게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의 침략 전쟁이고 이방인들이 저지른 대학살과 약탈로 삶이 짓밟힌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 반문명적인 사건”이었다(이희수 6). 레스턴은 이슬람의 이런 시각을 ꡔ신의 전사들ꡕ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첫째, 십자군의 최초 침략으로 인해 이슬람 세계가 붕괴한 시기.
둘째, 많은 아랍의 종족들과 칼리파들이 힘을 모아 유럽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한 시기.
셋째, 살라딘의 승리로 정점에 이른 시기(레스턴 9)
오래전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시리아와 분리된 상태였고, 안티오크는 알레포와 전쟁 중이었으며, 트리폴리는 힘스와 싸웠고, 예루살렘은 다마스쿠스와, 이슬람의 수니파는 시아파16)와 전쟁 중이었다. 기독교인들이 1차 십자군 원정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기독교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졌으며 이 때의 왕이 고드프리 드 부이용(Godfroi de Bouillon:1060-1100)이었다. 1차 십자군 원정 후 이슬람 왕국의 분열로 인해 예루살렘 왕국은 주변 국가들을 점령하여 그 영토의 크기가 북부 해안도시 안티오크에서 남쪽의 다룸까지 이르렀다. 이 시기를 아랍인들은 프랑크 침략 시기라 부르고 이 때 프랑크인들이 강했다기 보다는 자신들이 분열되어서 영토가 정복당했다고 생각한다. 1127년 알레포의 군주 장기(Zangi)가 집권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통합이 시작된다. 그는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을 점령할 뿐 아니라 1144년에는 예루살렘 왕국의 수중에 있었던 에데사를 정복한다17). 이 때부터가 많은 아랍의 종족들과 칼리파들이 힘을 모아 유럽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한 시기라 할 수 있다. 1146년 장기가 죽은 후 보다 강력한 인물인 누르 앗-딘(누레딘)이 그 뒤를 이었다. 그는 시리아의 모든 이슬람 지역과 메소포타미아를 수니파 아래 연합했고, 1169년에는 살라딘의 도움을 얻어 이집트까지 정복했다. 1174년 누레딘이 죽자 그의 권력이 11살짜리 아들에게 이양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를 통치하던18) 살라딘은 군대를 이끌고 가 시리아를 점령하고 그리고 1175년 자신이 시리아의 왕임을 선언했고, 이제는 이름뿐인 바그다드의 칼리파에게 시리아와 이집트의 술탄으로 공인받았다. 살라딘은 1183년 알레포를 점령하고, 1186년 메소포타미아 상부의 모술을 점령함으로써 방대한 이슬람 국가의 통일을 이루었다. 이 때가 바로 ‘살라딘의 승리로 정점에 이른 시기’로, 이 때부터 이슬람 제국은 군사적으로나 권력적으로 강한 대국이 되어 연달아 계속된 십자군의 공격을 모두 물리친다.
이렇게 십자군 전쟁에 대해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가 서로 상반된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여기서 객관적 입장을 취하기는 어렵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비록 그 이면에 정치적, 경제적 동기가 깔려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종교적 동기가 십자군 전쟁의 가장 큰 발발 원인이라면 이슬람 입장에서는 이슬람 성지 수호라는 종교적 동기보다는(물론 이런 측면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프랑크족의 침략을 막아내고 몰아내는 것이 전쟁을 하게 된 가장 주요한 동기였기 때문이다. 레스턴은 ꡔ신의 전사들ꡕ에서 이런 상반된 입장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먼저 “한 종교의 영광이 다른 종교에겐 그만큼 치욕이며 불명예였다”(117)라고 주장하며 어느 한 편이 절대선이라는 입장을 거부한다. 자신이 이 책을 쓰기 위해 “시리아, 요르단과 동예루살렘의 아랍 학자들과 대화를 나눈 후에 십자군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서양과 아랍 간에 얼마나 다른 가를 깨닫게 되었다”(9)라고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레스턴은 십자군에 대한 이슬람의 시각을 이 책 곳곳에서 서술한다. 위에서 예문으로 쓴 것처럼 십자군 원정 기간에 대한 이슬람의 다른 관점, 1차 십자군 원정에서 패한 원인을 자신들이 분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슬람의 입장으로 본 십자군 동기 분석, 책의 서문에서 십자군 ‘전쟁’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운동’(movement)으로 규정하려는 저자의 태도 등을 볼 때 레스턴은 가능하면 책의 곳곳에서 이슬람 쪽의 시각을 소개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책의 페이지를 배분하는데 있어서도 레스턴은 기독교적 입장과 이슬람의 입장을 비교적 공평하게 분배하려고 노력한다. 서구 기독교인이나 십자군에 대한 이야기를 한 장에 걸쳐 서술한 후 그 다음 장에는 꼭 이슬람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레스턴이 편견 없이 십자군 전쟁을 이해하려는 또 다른 노력은 십자군 전쟁 시 유럽인이 행한 대학살과 약탈에 대한 보고이다. 2000년 봄 교황 바오로 2세는 지난 2000년 동안 신의 이름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죄를 씻기 위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는 유대인, 무슬림, 여성과 소수 민족 집단을 탄압했던 포악무도한 행동을 사과하는 호칭 기도19)에서 십자군 원정을 특별히 언급했다. 사실 이전에도 서구의 많은 역사가들은 십자군 원정 시 십자군이 행한 잔인성과 대학살에 대해 기록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수장이, 다시 말해 십자군 원정을 주도한 선조의 후손인 교황이 공개적으로 십자군 원정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의 선조들이 행했던 대학살과 약탈을 사과했다는 점에서 이 선언은 의의가 매우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중동의 무슬림에게도 교황의 이런 선언은 매우 축하할 일이었다. “종교적 사과라는 차원에서 마침내 십자군 원정은 유대인 학살과 똑같은 서열을 얻었기” 때문이었다(레스턴 13).
사실 아랍인이 저술한 십자군 원정에 관한 책을 보면 프랑크 인들의 잔인성에 대해 계속 언급된다. 1차 십자군 원정 당시 마라를 점령하고 무슬림들의 인육을 먹은 사건20),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시 잔인하고 난폭한 행동, 그리고 그밖에 많은 이슬람 도시들을 정복했을 때 이들이 보여준 잔인성에 대해 계속 언급된다. 레스턴 역시 ꡔ신의 전사들ꡕ에서 비교적 솔직하게 1차 십자군 원정 시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십자군 선조들의 대학살과 약탈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여기서 학살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이틀 동안 기독교 병사들은 자신의 종족이 아닌 살아 있는 생물은 모두 죽였다. 템플마운트에서만 1만 명이 죽었다. 샤르트르의 푸셰(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프랑스 종군 사제이며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절망한 무슬림들이 베잔트 금화를 삼켰다는 소문이 있어 일부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 시체의 몸통을 양쪽으로 갈라 벌려 놓기도 했다. 이 도시에서 살해된 무슬림의 수는 남자, 여자, 아이 합쳐 모두 4만 명으로 추정된다. 성묘교회, 기독교 왕국에서 가장 신성한 교회, 예수가 못받혀 죽은 골고다 언덕은 피의 웅덩이가 되었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순교를 준비하고 유대 교회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기도 장소를 불태웠고, 불타는 장작 주위에서 춤을 추며 테데움(‘하느님,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나이다’라는 뜻의 라틴어)를 불렀다.(115)
레스턴의 입장에서 볼 때 중세의 십자군 전쟁은 결코 공개적 대의명분처럼 ‘이교도인들’을 벌하고 신의 땅을 다시 찾으려는 ‘고귀한’ 추구는 아니었다. 도리어 히틀러가 야기한 재앙과 걸맞는 증오와 폭력의 분출 운동으로 그 동기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피에 굶주린 유럽인들의 관심을 유럽 밖으로 돌려서 그들의 남아도는 에너지를 이 전쟁에 분출시키도록 한”(3) 전쟁이었다. 십자군에 참가한 귀족이나 영주들은 논자의 ‘시작하는 말’에 밝힌 것처럼 자격 미달자로 십자군에 참가한 이유가 대부분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들은 전리품을 얻는 일에 혈안이 되었고 이 때문에 그 잔인성은 극에 달하였다. 단지 베잔트 금화를 삼켰다는 이유로 무슬림들의 시체를 갈라놓은 것도 바로 부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레스턴은 이와 같이 십자군 발발 동기와 그 전개 과정에서 가능한 한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의 관점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하였다. 십자군 전쟁의 발발 동기와 그 전개 과정을 나름대로 기독교과 이슬람 모두의 시각을 편견 없이 제시하려고 노력하였을 뿐 아니라 십자군 원정 시 가장 문제가 되었던 십자군의 대학살과 약탈, 그리고 무슬림들에 대한 잔인한 행동에 대해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록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혹자는 교황의 공개적 사과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던 예루살렘 최고의 무프티21)처럼 편견 없이 십자군 전쟁을 기술하려는 저자의 이런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 전통에서 낳고 자랐던 저자가 자신의 선조의 이 치욕스러운 역사적 사건을 가능하면 사실적으로, 그리고 반대의 시각까지 포함하려고 노력하면서 기록했다는 점에 논자는 많은 의의를 두고자 한다.
III. 3차 십자군 전쟁의 두 영웅: 사자왕 리처드와 살라딘
1. 사자왕 리처드 1세
서구 유럽, 특히 영국에서 사자왕 리처드는 전설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의 지위를 빼앗으려는 아버지 헨리 2세와 아키텐을 빼앗으려는 형제들을 모두 물리치고,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을 맞아 용감하게 싸운 기사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이런 전설 같은 리처드의 모습을 레스턴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칼을 뽑는 리처드의 모습을 보면 이보다 더 그에게 잘 어울리는 무기는 없을 것 같으며, 리처드가 칼을 휘두르면 이보다 더 강력한 무사도 없는 듯하다.”... 리처드의 용기와 힘은 전설이 되었다. 또 그의 잔인함, 관대함, 시적 감수성 역시 전설이 되었다. 음유 시인들은 리처드를 헥토르의 용기, 아킬레스의 관대함, 알렉산더 대왕과 롤랑의 신장, 티투스의 자유로움, 네스토르의 유창함,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신중함을 지닌 자로 칭송했다.(159)
위와 같은 전설적인 기사로서의 사자왕 리처드의 모습은 셰익스피어와 스코틀랜드의 작가 월터 스콧의 역사소설의 소재가 되고 특히 할리우드 영화의 소재가 되면서 더욱 부풀려졌다. 「아이반호」(Ivanhoe), 「로빈 후드」(Robin Hood), 「리처드 왕과 십자군 전쟁」(King Richard and the Crusades), 「겨울의 사자왕」(The Lion in Winter) 등 수많은 영화의 소재로 리처드 왕이 등장하고, 또 이들 영화에서 리처드 왕은 낭만적이고 용맹스런 기사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ꡔ신의 전사들ꡕ의 저자에게 이런 리처드 모습은 일종의 영웅 만들기 작업의 일부분일 뿐이다. 물론 용감한 기사로서 리처드의 모습이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이 무시되고 이 부분만이 강조된 것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아랍인 소설가이며 역사가인 아민 말루프(Amin Maalouf)가 쓴 ꡔ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ꡕ에서 리처드 왕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술된다.
붉은 머리에 큰 몸집을 자랑하는 서른세 살의 잉글랜드 왕은 호전적이며 변덕스러운 전형적인 기사였다. 그 고귀한 이상도 그 난폭함과 무자비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서유럽인들 이라면 그의 매력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카리스마를 가졌던 이 리처드 왕은. . .(295)
물론 아민 말루프가 레바논 출신의 아랍 역사가이기 때문에 리처드의 난폭하고 잔인한 측면을 강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인 저자가 쓴 ꡔ신의 전사들ꡕ에서도 리처드의 잔인성에 대한 묘사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리처드의 반유대주의이다. 서구 역사상 유대인들은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받아 왔다. 리처드 역시 이런 서구 기독교인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했다. 자신의 대관식에 선물을 바치러 온 유대인 장로들에게 채찍을 가한 후 거리에 내쫓았으며, 그가 즐겨한 게임 중의 하나가 유대인의 이를 아주 천천히 뽑아내는 것이었다(레스턴 155). 리처드의 잔인성이 극에 달한 모습은 바로 십자군 전쟁에서이다. 아코(Acre)를 정복한 후 리처드는 살라딘과 협상을 벌였다. 그런데 살라딘이 리처드가 요구한 협상 내용이 너무 커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 리처드는 무슬림 포로 2700명을 무슬림과 십자군이 대처하는 평야에서 한 명씩 잔인하게 살해했다.22) 아코 뿐 아니라 리처드가 정복한 수많은 해안 도시에서 대학살이 있었다.
레스턴이 본 리처드 왕의 또 다른 모습은 바로 그의 애정관계이다. 어머니 엘레오노르 왕비의 영향을 받아 아키텐에서 자란 리처드 왕은 사랑지상주의 문학인 궁정식 문학(courtly love)을 많이 접하고 또 본인도 이 문학에 심취해있었다23). 남녀의 사랑을 이 세상의 지고의 사랑으로 생각하는 이와 같은 궁정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리처드가 사랑하는 대상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리처드는 ‘연인을 위해 도끼와 방패로 무장하고 자신의 애마와 함께 용감하게 싸운 기사가 아니라'(레스턴 6)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와 연인관계이며 자신의 대관식에도 귀부인은 한사람도 부르지 않고 오로지 젊은 남자만을 참석시킨 사람이었다(레스턴 153). 왕비 베렝가리아와의 결혼도 사랑보다는 정략적인 것이었다. 네 살 때 사자왕 리처드는 필리프의 누이 알레와 약혼을 했었다. 이는 알레의 지참금인 지조르 주변 지방을 리처드가 속한 가문 플랜태저넷 왕가의 영토를 늘리기 위한 일종의 정략적 결혼이었다. 알레는 어린 시절에 엘레오노르의 궁전에서 지냈지만 사자왕 리처드의 아버지 헨리 2세가 강제로 그녀를 취한 후 줄곧 헨리 2세의 정부 노릇을 했다. 결국 존엄왕 필리프가 자신을 배반한 행위를 볼모로 삼아 리처드는 알레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선택한 스페인의 공주 베렝가리아와 결혼했지만 실제로 그가 한 남자로서 그녀를 진실로 사랑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레스턴은 지금까지 영웅시되고 이상화되었던 사자왕 리처드 1세의 가려진 측면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자 했다. 전쟁에서의 잔인성, 성격의 난폭한 측면을 사실 그대로 기술하고 일반적으로 궁정식 문학의 전형적 기사로 그려진 리처드 왕의 동성애적 기질을 기록하여 자신의 선조인 리처드 왕의 실제적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레스턴이 이렇게 리처드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켰다고 해서 그의 칭송받는 군인으로서의 뛰어난 자질, 용맹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아랍인이 리처드 왕을 ‘멜렉 릭’24)이라 불러 그 용맹성을 칭송하고, 또 살라딘의 전기 작가 베하 알 딘이 “손에는 창을 든 채 말을 타고 전장을 질주하는 잉글랜드 왕에게 우리 병사 중 감히 아무도 도전하지 못했다”(레스턴 423)라는 기록을 예를 들어, 즉 아랍인의 입에서 나온 칭송의 말을 들어 리처드 왕의 뛰어난 점을 기록하여 그의 평가에 대한 객관성을 더했다.
2. 살라딘
일반적으로 서구인들은 살라딘을 높이 평가한다. 리처드 태임스(Richard Tames)도 ꡔ기사들과 전투들ꡕ(Knights & Battles)에서 살라딘을 “고귀하고 관대한 성격”(14)을 가진 인물로 묘사한다. 레스턴 역시 살라딘의 묘사하는데 있어 이런 일반적인 경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레스턴이 그리는 살라딘은 관대하고 군사 전략에 뛰어나며 자신을 위해 치부하지 않는, 그야말로 영웅적 인물이다.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2차 십자군을 대파한 후에 예루살렘의 왕을 풀어주고, 전투에 앞서 성안에서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공격을 미루기도 했다. 또 예루살렘 정복 후 무슬림 평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십자군과는 달리 예루살렘을 정복한 살라딘은 기독교인들로부터 평화롭게 항복을 받아냈으며, “성묘”를 파헤치자는 이슬람 강경파에 맞서 다른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관용의 미덕을 갖춘 인물로 그려진다(레스턴 124). 살라딘은 리처드 왕에 대해서도 많은 관용을 베풀었다. 야파 외곽에서 리처드가 이끄는 십자군들을 기습 공격할 때 리처드가 말도 없이 보병과 함께 전투하는 것을 바라본 살라딘은 “그처럼 위대한 사람은 보병들과 섞여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라.”(레스턴 422)라고 말하면서 동생을 시켜 말 두 마리를 리처드 왕에게 보내주었으며 레스턴은 살라딘의 이런 배려를 “3차 십자군 전쟁을 통틀어서 가장 기사도적인 행동”(422)이라고 묘사한다. 또 살라딘은 리처드가 ‘3일열’로 간헐적인 발열과 오환으로 시달릴 때 그에게 복숭아를 비롯한 약간의 과일과 음료수를 보낼 정도로 비록 적군이지만 힘들 때 그를 돌보아 줄 정도 관용과 너그러움이 있는 인간이었다.
레스턴이 칭송하는 살라딘의 또 다른 존경할 만한 특성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거나 치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살라딘은 도시를 정복하면 일반적으로 병원과 대학을 세웠다. 예루살렘에는 병원과 대학을 한 개씩 설립했고 다마스쿠스에는 대학 두 개를 설립했지만 이 건물들 중 어떤 것에도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 “단지 그는 이 친절한 행위, 헛된 영광을 피하는 이 행위를 모두 신의 은총으로 돌렸다.”(레스턴 457) 살라딘은 또한 다른 에미르처럼 자신의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 도시를 함락한 후 모든 전리품들을 자신과 함께 싸운 전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사리사욕을 위해 재물을 축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서 장례를 치르려고 그의 금고를 열어보니 영국의 1파운드에도 못 미치는 약간의 금화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친지들이 돈을 빌려 살라딘의 장례를 치루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ꡔ신의 전사들ꡕ에서 레스턴이 묘사하는 살라딘은 관용을 베풀고, 군사 책략에도 뛰어나고, 자신을 위해 치부하지 않으며, 아래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말하자면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이다. 그러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살라딘은 사자왕 리처드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결점이 있는 인간이다. 누레딘이 죽고 그 어린 아들, 알 살리흐가 누레딘의 영토를 계승하자 살라딘은 자신을 알 살리흐의 보호자라 주장하며 누레딘의 영토를 점령해 나갔다. 이런 살라딘의 태도에 대해 “이븐 알 아시르는 살라딘의 이중성을 비난하고 있는데 그의 판단이 전혀 그르다고는 할 수 없다”(258)라고 지적한 아민 말루프의 언급처럼 살라딘의 인격에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었다. 아민 말루프는 또 아랍 역사가의 말을 빌려 살라딘의 낭비벽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자면 “살라딘의 너그러움은 때로는 무분별하게 보이기도 했다”(255). 살라딘은 여분의 금액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즉시 다 써버리기 때문에 왕의 재무관들은 돌발 사태에 대비하여 항상 얼마간의 돈을 몰래 숨겨 두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아랍 세계에서 살라딘은 영웅으로 추대 받았다. 그러나 적군에게 더 냉정하지 못해, 예를 들자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1인당 몸값을 받고 풀어주기로 약속한 후에도 살라딘은 그냥 포로를 풀어준 것과 같은 행동에 대해 아랍의 역사가는 그가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인물이라 비난했다.
살라흐 알 딘은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포위 공격을 할 때 방어자들이 거세게 저항하면 그는 이내 지겨워하며 포위를 풀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군주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운명이 아무리 그에게 호의적이더라도 말이다. 그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아 성공을 굳히기 보다는 성공의 과실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았다.(287)
레스턴이 ꡔ신의 전사들ꡕ에서 살라딘의 장점으로 지적한 것들이 ꡔ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ꡕ에서는 결점으로 그려진 것은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이런 점을 통해 우리는 레스턴의 살라딘 묘사가 과연 정말로 편견 없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시된다.
ꡔ신의 전사들ꡕ에서 레스턴은 이중 잣대를 갖고 리처드와 살라딘을 묘사한다. 리처드에 대해서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때로는 이 점이 비판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살라딘에 대해서는 항상 긍정적인 시각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예문에 레스턴의 이런 시각이 잘 드러난다.
살라딘이 갖춘 모든 고귀한 자질 중에서도 특히 겸양이 다른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카이로에서 그는 대학 세 걔와 병원 하나를 세웠다. 예루살렘에는 병원과 대학을 한 개씩 설립했다. 다마스쿠스에는 대학 두 개를 설립했다. 이 건물들 중 어떤 것에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 “단지 그는 이 친절한 행위, 헛된 영광을 피하는 이 행위를 모두 신의 은총으로 돌렸다.” 리처드와 그는 얼마나 다른가!(457) (진한 글자는 논자의 것임)
리처드의 죽음을 소개하는 것에서도 저자의 이런 태도가 드러난다. 십자군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는 도중에 사자왕 리처드는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25)에게 사로잡혀 오랫동안 구금 상태에 있다가,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주관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잉글랜드의 왕좌로 돌아오게 된다. 잉글랜드로 돌아와 리처드 왕은 자신이 원정을 떠난 동안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가 빼앗은 모든 영토를 전쟁으로 다시 빼앗고 그런 후 자신의 통치 하에 있는 군소영주들의 반란을 제압한다. 플랜태저넷의 영토에 속하는 리모주의 영주가 리처드 왕에게 바쳐야할 금과 은을 몰래 빼돌린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리처드 왕은 즉시 군대를 몰고 가 리모주 성을 포위했다. 리모주의 영주는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해줄 것을 간청했지만 리처드 왕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격하여 성 안의 주민들을 모두 목매달 것이라 소리쳤다. 그러면서 리처드는 오만하게 성 주위를 걸었는데 이 때 리모주 성 안에서 리처드의 군대에 활을 겨냥했던 궁수 중 피터 배질(Peter Basil)이라는 젊은이가 돌화살을 쏘았고 이 화살 독으로 인해 리처드는 죽게 된다. 이 때 레스턴은 살라딘이 리처드를 평가한 말을 인용하여 그의 무절제함과 성급함을 비난한다.
리처드가 다음과 같은 살라딘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렇게 자주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니, 그는 어리석지 않아도 신중하지도 않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는다. 나로 말하면 내가 다스리는 영토가 아무리 넓다 할지라도, 무절제한 용기와 성급함보다는 신중함과 지혜로써 이 풍요로운 부를 소유하겠다.”(488) (진한 글자는 논자의 것임)
살라딘은 신중하고 지혜로운 인물이며 리처드는 그와 반대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살라딘에 대한 맹목적인 칭송을, 리처드 왕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내는 저자의 입장이 위의 인용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IV. 맺는 말
지금까지 논자는 ꡔ신의 전사들ꡕ에서 레스턴이 진실로 객관적이고 편견 없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점에서 동등하게 십자군 전쟁을 조명했는지 알아보았다. 발발 동기의 측면에서 볼 때 레스턴은 단순히 종교적 동기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동기들을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의 시각에서 동등하게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의 영웅, 사자왕 리처드와 살라딘을 그리는데 있어 레스턴은 완전히 중립적이고 편견 없는 시각을 보유했다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의 선조인 사자왕 리처드에 대해서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다. 그의 애정 성향이라든가. 화려하고 낭비하는 리처드의 성격이라든가, 잔인하고 무모한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비교적 솔직하게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레스턴이 사자왕 리처드의 장점을 경원시한 것은 아니다. 전쟁 영웅으로서 용맹성, 뛰어난 전투 책략을 지닌 점에 대해서는 살라딘과 마찬가지로 많은 칭송을 보내고 있으며 또 이에 대한 아랍인들의 칭송도 같이 기록함으로써 그 객관성을 더하고 있다. 이에 반해 살라딘에 대한 시각은 거의 일관되게 칭송하는 입장이다. 그의 관대함, 절대로 자신을 위해 치부하지 않는 점, 타종교의 권리도 인정하는 점, 군사 전략가로서의 뛰어난 점 등 주로 살라딘의 장점만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있어 이와 같은 한계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스턴은 ꡔ신의 전사들ꡕ에서 서구 기독교 중심 시각을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전통적인 기독교 중심적 십자군 해석을 떨쳐 버리고 이슬람의 관점을 많이 수용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레스턴은 십자군 전쟁과 현대의 아랍과 이스라엘의 반목, 미국과 아랍세계의 반목을 연관지어 해석하면서 역사의 연속성까지 주장한다. 중세 십자군 전쟁을 겪으면서 서로에게 가한 학살과 잔인한 행동 때문에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고 이 반목이 현대사에도 이어져 여전히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레스턴은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이슬람 세계를 통일한 살라딘은 아랍인들이 영원히 동경하는 영웅이며 살라딘과 같은 인물이 현대 이슬람 세계에서도 나오기를 희망한다고 그는 서문에서 밝힌다(5).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는 것도 자신이 살라딘과 같은 고원 지대 티크리트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살라딘의 후광을 입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레스턴은 또 현대에서는 죽음의 결전이라고 알려져 있는 지하드(성전)에 대해서도 과거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재해석한다. 원래 지하드의 참뜻은 무슬림이 이슬람교의 가르침을 수호하고 확대시켜 번영으로 이끌기 위해 신의 길을 엄수하려 노력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이 목숨을 바쳐 전쟁을 하는 것도 바로 이 지하드 정신의 수호, 말하자면 신의 길을 엄수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지 결코 자살 특공대는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제임스 레스턴의 신작 ꡔ신의 전사들ꡕ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십자군 전쟁을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이해해보려는 서구 기독교인의 자기반성이 포함된 노력의 결과이며(비록 그 관점이 완전히 객관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또 비록 살라딘을 너무 영웅시했다는 문제는 있지만 영웅 만들기로 거의 전설적이고 이상적인 인물로 서구 사회에서 이해되는 사자왕 리처드의 사실적인 모습을 그려내려는 시도이고, 마지막으로 현대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구 사회와 아랍 세계의 갈등을 과거 십자군 전통에서 찾으려는, 즉 현대의 아랍 전쟁을 중세의 십자군 전쟁의 연속성 위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에 있어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감신대)
◈ 인용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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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mes, Richard. Knights & Battles. San Diego: Silver Dolphin, 2001.
◈ ABSTRACT
Does the Writer of Warriors of God
Really Describe the Crusades without Prejudice?
Lee, Hyun Ju
In the traditional Christian World, the Crusades have been considered as 'religious wars' which liberated Jerusalem from the hands of 'infidels', namely Muslims. But Muslims think differently about the Crusades. They consider the period of the Crusades as 'that of Frankish invasion to plunder Islamice lands and treasures'. In Warriors of God James Reston tries to include these different points of view. He tries to see and describe the Crusades from both the Christian and the Islamic points of view equally.
But can the writer of Warriors of God describe the Crusades without prejudice? Because he was born, has been brought up and taught in the Christian world, and he is also a Christian, it seems to be very hard for him to overcome the barriers of Christian point of view. In this thesis the answers to this question will be found in two respects: the first, by explaining the writer's comments on the Crusades' motivations, and the second, by analyzing the writer's points of view about two heroes of the Third Crusade, Richard, the Lionheart and Saladin.
Key Words: 사자왕 리처드, 베렝가리아, 알레, 살라딘, 십자군 전쟁, 엘레오노르, 존엄왕 필리프, 붉은 수염 바바로사, 이슬람, 예루살렘, 지하드
1) 무함마드의 이슬람 이전에 아랍인이라고 하면, 아라비아 반도와 시리아 사막에 거주하는 베두인족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이슬람 이후에는 북아프리카 일부까지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2) True Cross: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
3) 이슬람교의 중심 성지로 이 메카는 단순한 성지 이상으로 전 이슬람교도에게 의지가 되는 마음의 고향이다.
4)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622년 메카에서 쫓겨나 옮겨온 곳으로 그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메카에 버금가는 이슬람의 성지이다.
5) 이슬람교와 기독교 모두에게 아브라함은 중요한 인물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다. 그러자 사라는 아브라함을 종용해 하녀 하갈과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했고, 이때 아들 이스마엘이 생겼다. 그런데 얼마 후 사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이를 갖게 되었고 이 아들이 바로 이삭이었다. 따라서 이삭의 후손은 기독교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기독교 국가를 이끌어갔다. 반면에 하녀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은 메카로 쫓겨나 그곳에서 국가를 설립했다. 이스마엘은 무슬림들의 선조가 된 것이다(무함마드 아하마드 지아드, 56-67 참조).
6)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를 이해하는 시각이다. 이슬람교는 예수를 무함마드와 마찬가지고 예언자들의 한 사람으로 보는 반면,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신으로 본다.
7) 리처드 1세가 사자왕(Lionheart)이라 별명을 가진 이유를 레스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첫 번째로는 역사적 사실인데, 리처드는 젊은 시절에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고열에 시달린 적이 있다. 이 후 리처드는 일종의 신경질적 떨림을 보여줬는데, 이 떨림으로 인해 리처드는 사자같았다. 다른 이유는 민간 전설로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 원정을 끝내고 귀환하는 길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에게 사로잡혀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때 공작의 딸은 멋있고 잘생긴 리처드 왕에게 빠져 그에게 정성을 다한다. 리처드 1세가 사자굴에 갇혀 죽게 될 위험에 처할 때 공작의 딸이 도와주겠다고 하자 리처드왕은 그녀에게 스카프 40장을 요구한다. 사자와의 대전이 있는 날 리처드왕은 스카프를 모두 팔에 두른 채 나타나 사자에게 엄청난 어퍼컷을 먹이고 고통으로 인해 입을 벌린 사자의 입 속에 팔을 집어넣어 심장을 꺼낸 일화에서 이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8) 쿠란에서는 원래 도덕적, 정신적 권위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11세기부터 이슬람 군주의 칭호가 되었다.
9) 자율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이슬람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진실되게 이슬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들을 일컫는다(김중관, 46).
10) 무함마드의 계승자, 후계자로 이슬람을 수호하고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지도자를 의미한다. 이희수, 이원삼, ꡔ이슬람ꡕ, 서울:청하출판사, 2001 참조.
11) 1050년 무렵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페르시아에 국가를 건설했다. 1055년 압바스 조 칼리프의 요청으로 투르크 인들이 바그다드에 들어왔고, 이집트의 시아파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수니파 이슬람의 옹호자가 되었다. 1050년대 셀주크 군대는 아나톨리아 지방을 밀고 들어와 그 점령 지역이 거의 에게해까지 이르렀다. 1071년 비잔틴 제국을 무찌르고 만치케르트를 점령하여 니케아에서 새로운 술탄 국가가 탄생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소아시아 지역이 셀주크 투르크인의 지배 하에 있었고, 1071년에는 예루살렘도 함락되어 시리아의 셀주쿠 투르크 국가의 일부분이 되었다.
12) 십자군 전쟁의 횟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독일의 프레데릭 2세기 주관한 6차 십자군 전쟁,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주도한 7차, 8차를 모두 포함하여 십자군 전쟁을 8차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그리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의견에 동조하지만), ꡔ신의 전사들ꡕ의 저자 제임스 레스턴은 5차까지 만을 포함하였다.
13) 솔즈베리 백작을 살해해 추방당한 군소 귀족으로 예루살렘 왕의 여동생 시빌과 결혼하여 예루살렘을 섭정하게 됨
14) 북부 군소 귀족으로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십자군에 참여한 인물. 그는 미망인이 된 안티오크 공주를 유혹해서 결혼한다. 그는 특히 잔인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악명 높았는데 안티오크 공주가 죽자 그는 트란스요르단의 스테파니와 결혼하면서 케라크와 몬트레알이라는 전략상 아주 중요한 요새를 얻는다.
15) 살해당한지 3년 후에 베켓은 성자로 시성되었고 1년 후에 헨리 2세는 순교자의 무덤 앞에서 공개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베켓의 살해 공모에 대한 참회로 교황은 헨리에게 전쟁터에 있는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에 소속된 200명의 병사들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돈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16) 시아파는 이슬람교의 소수파로 초기 이슬람사에서 알리(무함마드의 사위이자 4대 칼리파)의 지배를 지지한 정치적 당파. 반면 수니파는 처음 네 명의 칼리파를 모두 무함마드의 합법적 후계자로 임명한다.
17) 에데사 탈환으로 인해 루이 7세와 콘라드 3세가 이끄는 2차 십자군 원정(1174- 1149)이 이뤄진다. 이 때 장기의 뒤를 이은 누레딘이 다스리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려했지만 실패한다.
18) 누레딘이 이집트의 통치를 살라딘에게 맡긴 이유는 이집트를 정복할 당시 살라딘은 누레딘의 눈에 온순하고 자신의 말을 잘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 사제가 읊는 기도문을 신도들이 따라 읊는 행위이다.
20) ꡔ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ꡕ에 보면 이 사건에 대해 프랑크 군의 연대기 저자인 라울 드 카엥은 “마라에서 우리들은 이교도 어른들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았다. 또 그들의 아이들을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웠다”(70)라고 고백했다. 그 당시 마라를 덮쳤던 기근 때문에 사라센들의 인육을 먹었는지 아니면 프랑크인들의 잔인성 때문에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하여간 이슬람인들은 이 사건을 프랑크인들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생각하고 이 이후 아랍의 서사 문학 속에서 프랑크인들은 줄곧 식인종으로 묘사된다.
21) 개인이나 재판관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 공식적인 법적 견해을 밝히는 이슬람교의 법률 권위자
22) ꡔ신의 전사들ꡕ에서 이 부분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ꡔ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ꡕ에서는 보다 길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말루프는 이것이야말로 리처드의 잔인성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평했다.
23) 리처드 왕이 그 당시 궁중시인이자 음유시인이었던 블롱델과 함께 쓴 시가 여러 편 남아있다.
24) 그 당시 이슬람에서는 우는 아이도 ‘멜렉 릭’이 온다면 멈출 정도로 용맹한 전사로서 리처드의 명성이 대단했다.
25) 독일의 붉은 수염 바바로사의 조카로 바바로사가 독일 십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물에서 심장마비로 죽게 되자 대신 독일군을 지휘한 오스트리아의 공작. 십자군이 아코를 점령한 후 독일의 깃발이 성벽 위에 걸리자 잉글랜드군이 이를 찢고 불태운 사실에 앙심을 품어 그 즉시 십자군 원정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리처드 왕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결국 그를 체포하여 구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