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목소리, 인간의 목소리: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에서 들리는 두 개의 목소리*1)

 

 

 

 

최 예 정

 

 

 

 

 

I. 두 개의 목소리

 

흔히 ‘REED 사업’(Records of Early English Drama project)이라 불리는 중세 드라마 학자들의 최근의 집단적 연구 노력은 중세 드라마 연구사에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업은 중세 드라마와 관련된 기록물들을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출판함으로써 중세 드라마의 역사에 대한 실증적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중세 드라마에 관한 많은 새로운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이는 중세 드라마에 대한 기존의 전제들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가령 싸이클 드라마가 정말 싸이클의 형태로 공연되었는지, 매년 공연되었는지, 그리고 공연은 어느 시기까지 계속되었던 것인지, 집필자는 누구였는지 등 중세 드라마의 성격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종전의 통념들이 크게 흔들리게 된 것이다. 한편 평단 일각에서는 그러한 실증적 연구의 실효성과 이데올로기적 배경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비평가들은 남아있는 기록은 궁극적으로는 모두 지배 이데올로기와 연관을 맺고 있는 역사서술의 일환일 뿐이며, 이 기록들이 연극 공연을 도시 지배 집단의 통치술과의 관련성 속에서 해석하는 집단의 서술이라는 점을 잊은 채 ‘순수한 역사’를 복원하려는 노력은 환상이라고 경고한다.2) 중세 드라마에 대한 기존의 많은 생각들이 사실상 ‘신화’였음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실증적 역사 서술을 위한 노력이 큰 의미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법에 매몰될 때 실증적 역사서술로 드라마의 문학적 성과와 공동체 속에서의 공연의 의미를 대치하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중세 드라마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싸이클 드라마가 이제까지의 가설과는 달리 르네상스 중기까지 공연되었고 싸이클 드라마가 싸이클로 공연된 것이 아니라 개별 에피소드들의 공연 형태를 취했다 하더라도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의 이견이 상당히 있다) 여전히 변함없이 남는 사실은 있다는 점이다. 즉 싸이클을 구성한다고 생각했던 에피소드들은 여전히 하나씩 존재하고 있고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그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또한 각 에피소드를 도시의 길드 조직들이 하나씩 맡아서 공연했다는 사실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 공연되었던 장소가 대부분 영국 북부 도시들에 집중되었다는 점에도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또 종교적 길드보다는 상공업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시민 길드들이 도시의 자치권을 획득한 후 이들 도시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할 때 싸이클 드라마(물론 이제는 더 이상 싸이클이라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겠지만)가 공연되었다는 점도 큰 이견 없이 받아들여진다. 종교적 길드나 성직자 계층이 통치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도시와는 달리 상공업 길드가 도시의 통치권을 쥐게 된 도시의 통치계급이 자신들도 성직자들 못지 않게 시민들의 종교 교육을 훌륭히 감당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싸이클 드라마를 공연했다는 설명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Clopper, 138-68) 이렇게 본다면 중세 드라마의 공연 양식과 공연 연대 등에 관한 여러 새로운 발견과 가설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세 드라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상당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직자가 아니 생업을 갖고 사는 시민들이 연극의 배우와 연출가가 되었고 심지어는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싸이클 드라마의 성격 구명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즉 싸이클 드라마가 종교극의 형식을 따르고는 있지만 성직자와는 상이한 관점을 지닌 집단이 공연의 책임을 지고 있고 관객의 대다수를 이루기 때문에 성직자 중심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와는 다른 모습의 종교 해석을 보여 줄 가능성을 다분히 안고 있다는 점이다. 속인들이 극의 생산과 소비의 중심부를 이루는 상황에서 연극이 준비되고 공연될 때 종교 교육이라는 본래의 목적 못지 않게 다양한 의미가 결집, 분출되었으리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교회가 가르치는 교의적, 교리적 관점이 싸이클 드라마에서 표출되는 동시에 이것과는 구별되는 일반 신도들의 관점이 어떤 형태로든 드라마에 표출된다. 전자를 극의 수직적 목소리 혹은 신의 목소리라고 명명한다면 후자는 전자와 구별되는 관점으로서 극의 수평적 목소리 혹은 인간의 목소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관점 중 어떤 것이 극을 장악하느냐 여부에 따라 그 드라마의 성격은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타운리 싸이클의 몇몇 에피소드들, 특히 웨이크필드 매스터가 썼다고 여겨지는 에피소드들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웨이크필드 매스터 표’라고 부를 수 있는 9행 연구에 cdddc의 압운 형식이라는 독특한 시작법(prosody)으로 쓰여진 6개의 극―ꡔ노아ꡕNoah, ꡔ첫 번째 목자극ꡕThe First Shepherds' Play, ꡔ두 번째 목자극ꡕThe Second Shepherds' Play, ꡔ헤롯ꡕHerod,  ꡔ희롱ꡕBuffeting, ꡔ아벨 살해ꡕKilling of Abel―은 같은 에피소드를 다루는 다른 싸이클의 극들과 비교해 볼 때 희극성이 두드러진다. 가령 싸이클 드라마의 원조격으로 생각되는 요크 싸이클이나 비교적 정돈된 형태를 띠고 있는 체스터 싸이클의 목자극은 전반적으로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교회의 정통 교리를 충실히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웨이크필드 매스터 표가 찍혀진 극들은 관객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선사하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하고 훨씬 덜 엄숙하다. 그리고 이러한 희극적 요소들은 상당 부분 동시대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신도들의 목소리가 들어와 있는데서 기인한다. 구세주 예수의 탄생 축하라는 목자극 본연의 메시지와 함께 속인들의 삶의 경험과 고민들이 삽입되면서 경건, 엄숙을 특징으로 하는 경배와 제식적인 의미, 수직적 목소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또 다른 목소리, 수평적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웨이크필드 매스터의 작품들 중에서도 그 생기발랄함과 희극적 요소로 인하여 많은 현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은 수직적 목소리와 수평적 목소리의 교차라는 T싸이클 드라마의 특징을 가장 확연하게 보여주는 극이라 할 수 있다. 울프(Rosemary Woolf)와 같은 비평가는 이 극들이 지닌 희극성을 비판하면서 이 극들이 싸이클 드라마의 규범을 어기고 있으며 ‘소극(farce)의 제단 위에 일관성을 희생예물로 바쳐’ ‘보다 생기 있게 되기는 했으나 덜 통합된’ 극이 되고 말았다고 비난하기도 한다.(Woolf, 805. Jack. 104-5.) 그러나 ‘보다 생기 있게 되기는 했으나 덜 통합된’ 극이 되었다는 목자극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사실상 중세 말기 영국 북부 도시 공동체라는 구체적 역사 현실 속에서 이 드라마가 갖는 의미와 기능을 역설적으로 똑바르게 지적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싸이클 드라마는 종교극’이라는 형식 논리에 집착한다면 준엄하고 진지한 교회의 목소리 이외의 것은 모두 불순물로 여겨지게 되고 따라서 문학적 가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질적인 목소리는 바로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중할 수 있으며 더욱이 종교극에서 그러한 목소리를 확인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속인들의 의식을 반영 혹은 형성하는 귀중한 기록이라는 관점을 취한다면 과거의 결함은 더 이상 결함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II. 수평적 목소리: 인간의 목소리

 

타운리 싸이클의 목자극의 희극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를 살펴보면 우선 그 문체가 중요한 한 가지 요인임을 알 수 있다. 요크 싸이클이나 혹은 그보다는 좀더 코믹한 요소들을 담고 있는 체스터 싸이클조차도 제의적 드라마와 크게 구분되지 않는 어투를 사용하여 장중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면 타운리 싸이클의 목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주고받는 구어투의 대화체 문장들을 주고받는다. 배우들이 일상생활에서 구사했음직한 표현들이 그대로 극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대사에는 고통스런 현실의 삶 속에서도 서로 벗하며 즐기는 민중들의 삶의 해학이 녹아 들어가 있다. 생기 있는 유머, 활기찬 두운, 토속적이고 세상살이의 맛이 느껴지게 하는 속담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거침없는 단어의 나열 등은 사실상 이 극의 집필자의 탁월한 언어 구사력을 증명한다. 이러한 언어가 안고 있는 활력과 재치는 극의 희극적 분위기를 북돋아 준다. 가령 ꡔ두 번째 목자극ꡕ에서 두 번째 목자가 자신의 결혼생활을 한탄하며 부인의 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할 때 그 구어체―사실은 어휘의 다양성과 운율의 통일성, 그리고 파찰음의 반복이라는 고도의 수사적 장치들이 결합되어 있는 언어―가 거두는 희극적 효과는 매우 크다.

 

바보같은 코필, 우리 암탉은 앞으로 뒤로

꽥꽥거리지.

그러나 그녀가 꼬꼬댁 울거나

신음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꼬끼오 소리를 내면

우리의 수탉, 아이고 불쌍하기도 하지,

왜냐면 그놈은 이제 착꼬에 갇힌 신세니까.

 

Sely Copyle, oure hen, both to and fro

She kakyls;

Bot begin she to crok,

To groyne or to clok,

Wo is him is oure cok,

For he is in the shakyls. (67-72)3)

 

서로 엇비슷한 학식이나 재산․신분을 지닌 평범한 촌부들이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이 대사 속에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웃음을 찾으며 서로 의지하고 사는 민초들의 인정어린 면모, 그리고 재치와 해학이 드러난다. ‘종교극’하면 떠오르는 피안의 세계의 초월성,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지존하신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의 두려움 이러한 것들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발 딛고 서있는 현실 세계의 모습이 현실 세계의 언어로 등장한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암탉과 수탉은 촌부들의 삶, 저자거리의 인생에 대한 비유로서 당당히 극 속에 자리를 잡는다.

속인들의 삶의 목소리가 드러난다는 점은 타운리 싸이클의 목자극에서 속인들이 서로를 골려먹기도 하고 놀리기도 하면서 또 흥겹게 서로 어울리기도 하는 장면 속에서 분명히 보여진다. ꡔ첫 번째 목자극ꡕ에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양을 놓고 양들이 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달라면서 첫 번째 목자 집(Gyb)과 두 번째 목자 쟌 혼(John Horne)이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가르시오(Jak Garcio)는 이들의 실랑이를 놓고 고담의 바보들(Fools of Gotham)의 예화를 인용하며 꾸짖고 있는데, 이와 같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을 놓고 수선스럽고 왁자지껄하니 판을 벌이는 것도, 그리고 이것을 비웃으며 심통스럽게 판을 깨는 것도 모두 민초들의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삶의 고통과 그것을 해학으로 해결하는 민중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극 속에 투영된다. 타운리 싸이클의 목자극은 배우와 관객 모두의 직접적인 삶의 경험을 감싸 안는다. 고답적이고 추상적인 교회의 가르침이 아우를 수 없는, 그러기에 고상한 종교문학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목자들의 대화를 통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해학은 이들의 삶을 비웃고 무식을 경멸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어수룩함조차도 꾸밈없이 드러내고 바로 그런 표현 속에서 즐거워하는 건강한 웃음이다.

이러한 웃음은 가령 카인처럼 부도덕하고 신에게 불순종하는 인물의 행동거지를 청중들이 비웃을 때 나오는 웃음이나, 헤롯처럼 사탄적인 인물이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로 인해 그의 도모가 허사가 된다는 것을 청중이 미리 예측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웃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알레고리적, 신학적, 도덕적 해석의 틀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연발생적인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장면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 타운리 싸이클의 목자극들의 또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가령 ꡔ두 번째 목자극ꡕ의 맥(Mak) 에피소드에서 재미있는 점은 무엇보다도 맥과 그의 아내 질이 생각해 낸 묘안의 기발함, 그 묘안을 실행하는 과정에서의 수선스러움, 그 묘안이 들키는 과정에서의 예상치 못한 반전, 그리고 들켰을 때 이 부부가 짜낸 변명의 또 다른 기발함 등이다. 즉 재치와 반전이 어우러지면서 양을 도둑맞고 혹은 도둑질한 것이 발각된다는 위기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주로 웃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양 도둑질이라는 상황이 당대의 배우나 관객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며 일상생활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 순간 극에서 재현되는 세계는 그 문제에 추상같은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는 엄격성을 지닌 현실적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풀어내는 축제적 희극의 세계이다.

타운리 싸이클의 목자극이 축제적 희극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은 ꡔ첫 번째 목자극ꡕ의 향연 장면에서도 다시금 발견된다. 고담의 바보들의 예화를 인용하는 가르시오의 꾸짖음으로 두 목자들의 한 판 놀이는 흥이 깨지게 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고달픈 현실에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는다. 이들의 식사는 문자 그대로 만찬이고 향연이다. 이들의 목자의 식사 메뉴와 영주의 식사 메뉴가 뒤섞인 음식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내놓으면서 음식을 즐긴다. 사실 체스터 싸이클의 목자극에서도 향연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때 나열되는 음식들의 이름은 모두 당대 목자들의 식사 메뉴에 속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식사는 제아무리 많은 음식들을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현실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는 상상적 세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타운리 싸이클에서의 목자들의 식사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이들의 식사에 대해 헬터만(Jeffrey Helterman)이 ‘그로테스크한 식사’라고 명명하는데 이 표현은 적확하다. 이 목자들은 평민들의 식단부터 귀족 계층, 특히 미식가의 식단까지 망라하는 여러 음식들을 포함하는 식사를 즐기도 있기 때문이다.(85) 바흐찐의 축제적 향연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바로 공식적인 것, 숭엄한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외된 가난하고 어려운 속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고통을 잊고 초월할 수 있게 만드는 축제적 희극(Munson, 192-200)으로서의 목자극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 목자극들이 이러한 축제적 희극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서 이 연극들이 평범한 일반 신도들의 삶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삶의 고통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고 그 고통 속에서조차 웃음을 발견하기 때문에 더욱 축제적인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타운리 싸이클에서는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에서 뿐 아니라 ꡔ아벨 살해ꡕ나 ꡔ노아ꡕ와 같은 극에서도 인생살이의 어려움을 실감나게 토로하는 장면들을 삽입함으로써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관한 현실적 관점에 목소리를 부여한 바가 있다. 타운리 싸이클의 목자극에서는 주로 목자들의 불평을 통해 현실에 대한 평민들의 시각을 대변한다.

목자들이 신세타령을 하는 장면은 타운리 싸이클뿐 아니라 체스터 싸이클에도 등장한다. 체스터 싸이클에서는 양의 질병, 가난, 험악스런 부인 등 ꡔ두 번째 목자극ꡕ에 등장하는 불평 목록이 대부분 등장한다. 그런데 ꡔ두 번째 목자극ꡕ의 경우 각각의 목자의 불평의 주제가 분화되어 있고 극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나타나 불평이 더욱 강도 높게 느껴진다. 또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이들의 불평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반면 체스터 싸이클의 경우에는 위에 언급된 주제들이 여러 목자의 입에서 섞여 나와 한 목자의 불평의 성격이 분명히 부각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특별히 희극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회비판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불평이 되어 버렸다. 목자들의 불평의 핵심이 모호해지면서 불평의 강도와 깊이는 훨씬 적게 느껴진다. 게다가 체스터 싸이클의 목자들은 마치 극의 결말부에서 성직자 혹은 은거자가 될 것을 예감하는 듯, 불평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위안거리를 스스로 찾아내고 있다는 점이 타운리 싸이클의 목자들의 불평과 크게 다른 점이다.

체스터 싸이클의 ꡔ목자극ꡕ에서 목자들은 식사하기에 앞서 “자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아주셨으니 기쁜 마음으로 나는 그분께 은혜를 감사드리겠네.”(Now sithen God has gathered us together,/ with good heart I thank him of his grace. 97-98) 4)라고 말한다. 음식물을 앞에 놓고 그 이름을 나열하며 식사 자체에 몰입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유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는 타운리 싸이클의 목자들과 비교해볼 때 체스터 싸이클의 목자들은 훨씬 경건하고 차분하다. 이들은 식사자리를 마련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조촐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누추한 잠자리에서도 천상의 기쁨을 생각하며 인내하고 감사하는 태도를 보인다. 가난을 불평하면서도 목자들은 조촐한 식사 속에서 기쁨을 찾고, 하늘을 이불 삼아 노숙의 생활 안에서 나름대로 감사거리를 찾는다. “우리 머리 위에 하늘이 있으니 이 땅에서는 거할 곳이 충분히 있는 셈이오.”(Housing enough have we here/while that we have heaven over our heads. 149-150) 라고 말하는 이들은 양치기로서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스스로를 위안하며 감사할 내용을 찾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보인다.

 

, 이제 우리가 바라던 것을 모두 가졌소.

왜냐하면 이 세상에 나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으니 말이요.

그러니 우리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시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즐거운 노래를 말이요.

 

Now, sith I have all my will―

for never in this world so well I was―   

sing we now, I read us, shrill

a merry song, us to solace. (450-3)

 

남루한 옷을 입었으나 즐거이 노래하는 이러한 모습 속에서 이들이 불평하는 현실의 고통과 아픔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들의 삶의 척박한 모습은 구세주의 출현을 필요로 하는 인류의 모습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즉 교회에서 시민들에게 설교하고 싶어하는 메시지를 연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보여주려 한다는 목적의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빛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둠과 암울함이 있어야 하듯이 메시아 탄생의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서 목자들의 불평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즉 체스터 싸이클의 ꡔ목자극ꡕ에서는 배우와 관객들의 현실적 고민을 반영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수평적으로 반영하기 보다는 수직적 메시지가 주종을 이루는 양상을 보인다.

한편 타운리 싸이클의 ꡔ첫 번째 목자극ꡕ은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 극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구별되는 성격의 불평이 혼재한다. 즉 첫 번째와 두 번째 목자의 대사에서 ‘비가 오나 날씨가 좋거나’ ‘기분이 좋거나 절망 중에 있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식의 대구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들은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어려움을 불평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목자들은 타운리 싸이클 공연의 주체이자 관객인 15세기 영국 북부 지방의 평범한 농민들이 겪을 법한 어려움들, 가령 영지 관리인이나 지주와 차지농간의 갈등 등을 불평한다. 즉 보편적, 초역사적인 문제에 대한 불평과, 당대에 첨예하게 이해관계의 대립양상을 보이던 역사적인 문제에 대한 불평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은 궁극적으로는 앞서의 체스터 싸이클의 경우처럼 구세주의 존재가 강력히 요망되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암유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즉각적인 효과는 당대의 역사적 현실이 구속사에 편입되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공연의 주체인 배우와 관객들 자신들의 이야기로 바뀐다는 점이다.

ꡔ두 번째 목자극ꡕ의 도입부의 목자들의 불평장면에서는 당대 속인들의 삶의 갈등 상황이 훨씬 더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주로 지주와 소작농과의 관계와 영주의 지배권 문제를 이야기하는 첫 번째 목자의 불평은 타운리 싸이클이 상연되던 시기의 역사적 경험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결혼생활의 어려움, 특히 괄괄한 아내와 살며 겪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두 번째 목자의 불평은 ꡔ노아ꡕ에서부터 익히 보아왔던 것이다. 이러한 불평은 중세의 반여성적 문건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전파되어 왔던 내용이기 때문에 특징적으로 이 시대와 지역 특유의 경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을 성직자가 아닌 속인들이 공연하게 되면 그 대사가 매우 생동감 있게 들렸으리라는 점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서로의 가족 관계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동네 사람들끼리 공연을 하고 볼 때 이러한 대사가 빚어낼 희극적 효과는 무척 컸을 것이다. 극중의 불평은 배우들의 일상의 불평과 결합되어 극중 대사가 함축하고 있을 신학적, 혹은 알레고리적 의미를 무화시키고도 남을 만한 경험적 의미를 전달했을 것이다. 즉 매우 보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에서조차도 극의 상연 주체인 일반 신도들의 삶의 목소리가 극 속으로 삽입되어 갑자기 경험적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다. 주인과 하인의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세 번째 목자의 불평은 ꡔ첫 번째 목자극ꡕ의 가르시오(Garcio)의 불평과도 비견할 수 있는 것으로서 꼭 집어서 시대적 성격을 지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첫 번째 목자와의 대화의 맥락 속에서 주인이 하인을 박대하고 품삯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는 그의 불평을 읽게 되면 흑사병 발발 이후 변화된 주인과 하인의 관계, 즉 품삯의 계약관계로 변화된 새로운 고용관계가 제기하는 문제점의 예후를 읽어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ꡔ두 번째 목자극ꡕ은 다른 목자극에서도 등장하는 유사한 내용의 불평을 극의 소재로 끌어들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불평들을 각각의 목자에게 특징적으로 배분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사회 현실을 좀 더 밀착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공연 당시 평소에도 이러한 불평을 자주 하던 인물이 그 역할을 맡게 된다면 그 때 불러일으킬 희극적 효과, 그리고 당대 삶의 모습을 환기하고 주목하게 하는 효과는 가히 폭발적일 수 있다. 속인의 삶을 휘어잡고 있는 당대의 변모하는 경제 조건과 가정사와 같은 일상의 문제들이 목자들의 불평이라는 매우 관습적인 모티프를 통해 극의 공연 현장에서 비로소 우렁차게 제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다.

타운리 싸이클의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에서는 속인들의 현실 경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이 목소리는 현실 세계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 고통에 침잠되지 않고 웃음으로 현실을 이겨내는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러한 웃음은 삶이 어려워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잃지 않고 사는 인간들끼리 빚어내는 웃음이기에, 신이 마련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깨닫고 웃는 웃음과는 분명히 다른 음조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웃음이 신의 웃음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그려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때로는 신이 인간을 위해 마련해 놓은 구원의 희극과 이들의 웃음이 중첩되기도 한다. 수직적 목소리는 수평적 목소리와는 구별되면서도 교차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III. 수직적 목소리: 신의 목소리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에 등장하는 천사들의 노래는 이 극들에서 작용하는 수직적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사실상 천사들의 노래는 앞서 목자들의 불평과 갈등이 빚어내는 불협화음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것으로서 이들의 삶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천사의 노래는 신의 섭리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인식․의식․믿음 여부와는 상관없이 작용하고 실현되는 신의 세계가 존재함을 일깨워준다. 목자들의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극 속에서 가난하고 무식한 하층 계급으로 그려지던 목자들이 라틴어로 불리는 천사의 노래의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대 독자들의 눈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것은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더구나 ꡔ두 번째 목자극ꡕ의 목자들은 천사의 노래를 이해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기까지 한다. 현실적 관점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이 부분을 캠벨(Thomas P. Campbell)은 중세 드라마에 제식적 형식이 투과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매우 유효한 설명이다. 사실 타운리 싸이클의 ꡔ두 번째 목자극ꡕ에서 목자들의 예언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이며 기독교 교리가 억지춘향 격으로 삽입되었다는 인상을 주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이 극이 앞부분에서 목자들의 삶을 매우 실감나게 재현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가령 같은 에피소드를 다루는 요크 싸이클의 ꡔ목자극ꡕ의 경우에는 극 전체가 성경의 기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상의 목소리의 재현과 그에 대해 목자들이 경외감으로 가득 차서 순종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천사들의 노래가 현실 삶의 경험과 교차될 때 나타나는 갈등 혹은 부조화의 모습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은 수평적 목소리가 극의 앞부분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더 이질적으로 들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콜비가 주장하듯이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의 앞부분을 채우고 있는 여러 희극적인 장면들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다면 천사들의 노래로 대변되는 이 극의 수직적 목소리도 그다지 이질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목자들이 양떼의 방목권을 놓고 다투는 장면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가 태어나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불화와 갈등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목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꺼내 만찬을 즐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체가 되어 신도들의 성만찬으로 바뀐다는 점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이 극은 목자들끼리 만들어내는 희극적인 부분이든 천사들의 노래 이후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가 경배하는 예식적 부분이든 결국 모두 신의 목소리의 변주에 불과하게 된다. 인간의 목소리, 인간의 웃음은 없어지고, 인간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원을 이루고 기뻐하는 신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극이 일관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천사의 노래 이후 극의 톤의 변화에 당황하는 독자는 극의 ‘깊은’ 의미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 비난받는다.

사실 ꡔ두 번째 목자극ꡕ의 경우 희극적 성취가 종교적 이상과 어떻게 결합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여하에 따라 이 극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고 이 극을 옹호하는 비평가들은 대부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맥 에피소드를 둘러싼 목자들의 소동이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예표라는 해석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이 극의 희극성을 알레고리적 측면에서 옹호하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다. (Kolve, 6장 7장) 그러나 문제는 이런 해석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점들이 있다는 것이다.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의 희극성의 특징은 어느 한 쪽의 웃음이 다른 한 쪽의 웃음을 완전히 포섭, 전용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가령 ꡔ두 번째 목자극ꡕ에서 맥과 질 부부가 양을 숨기는 장면에서 맥이 적 그리스도, 혹은 사탄으로 해석될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결국 그의 술수가 발각되는 장면을 신의 희극의 실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측면도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자아내는 재미를 모두 이러한 신의 희극의 개념으로 설명해 낼 수는 없다. 목자들이 애초에 제기했던 삶의 고민들과 그 불평의 현실감, 그러면서도 웃음으로 삶의 문제를 넘어서는 이들의 활력, 이러한 것들은 신의 관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알레고리적 해석은 극을 매끄럽게 보이도록 만들기는 하지만 그 매끈함은 극에서 묵직한 의미를 갖던 부분들을 희생함으로써 얻는 매끈함이다.

타운리 싸이클의 목자극을 신의 관점만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 극에서의 신의 목소리의 무게와 중요성을 부인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신의 목소리와 인간의 목소리가 중첩되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신의 희극과 인간의 희극이 분명히 구분되는 지점이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부르고 구원하는 초월적인 신의 목소리가 제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도, 또한 그 목소리가 평범한 신도들의 삶의 목소리를 억누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에서는 수평적 목소리가 수직적 목소리에 포섭되어 그 본래 의미를 상실하는 것도 아니요, 수직적 목소리가 수평적 목소리에 의해 왜곡되지도 않은 채 사이좋게 두 목소리가 함께 들린다. 신의 목소리와 인간의 목소리가 ‘따로 또 같이’ 제 목소리를 냄으로써 인간의 삶의 체취도 나면서 동시에 이 극을 상연하는 원래의 목적―시민들의 종교 교육이라는 소임도 수행하는 새로운 드라마가 탄생한 것이다.

 

 

IV. 결 론

 

타운리 싸이클의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은 성직자가 아닌 세속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이 두 개의 목자극은 이들의 삶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러면서도 비난이나 경멸의 시선없이 전달한다. 이 극은 목자들의 불평을 통해 연극을 공연하고 관람하는 바로 그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보여준다. 자신들의 삶의 경험을 극에 투영하는 이러한 수평적 목소리는 극의 공연과 관련한 세 주체들, 즉 작가, 배우, 관객 모두가 성직자가 아닌 속인층이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타운리 싸이클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요크 싸이클이나 비교적 안정된 공연 역사를 지닌 체스터 싸이클 모두 속인들이 공연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싸이클들에서는 속인들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덜 들리는 것이 타운리 싸이클과 다른 점이다. 이것은 앞으로의 연구 성과들을 더 지켜봐야 알 수 있기는 하겠지만, 가령 요크 싸이클의 경우에는 공연 대본이 시 집행부에 의해 보관되었기 때문에 보다 공식적인 모습으로 남게 되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조심스런 추측도 할 수 있다. 많은 중세 드라마 학자들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필사본과 당대의 공연이 딱히 일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의견에 동의하고 있고 대본과 연기의 관계도 현대 극단의 그것보다는 훨씬 유동적일 확률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타운리 싸이클의 필사본은 시의 지배층이 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속인들의 목소리가 제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웨이크필드 매스터라 불리는 사람이 특히 더 속인의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였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에는 중세 교회가 그토록 강조하여 가르치던 초월적 구원이라는 수직적 가르침에 쉽게 매몰되지 않는 수평적 목소리가 분명하고 또렷하게 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구원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극의 결말부에서 매우 온전하게 그리고 정통적 가르침에 잘 어울리게 전달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인들의 삶의 고민과 불만이 이 초월적 목소리에 의해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되어 신의 목소리에 매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구세주의 강림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지극히 ‘평화스럽고 온건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극을 다 읽고/보고 나면 목자들의 불평의 내용과 그 불평의 정당성이 여전히 귓결에 남는다.

타운리 싸이클의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은 두 개의 다른 목소리, 현실과 초월, 삶의 고통과 구원의 기쁨이라는 영원히 해결하기 어려운 두 가지 영역의 목소리를 종교극이라는 형식 속에 담아내는 독특한 극이다. 신과 인간, 교회와 저자거리가 극이라는 공간을 통해 대등한 만남을 갖고 있다. 종교 교육이라는 거룩한 대의가 일반 신도들을 통해 수행된다는 중세 싸이클 드라마의 독특한 조건이 이러한 종교극을 가능하게 했다. 성직자가 주도하여 신학적 해석만이목소리를 내는 극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성직자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개인의 삶에 대한 인문주의적 해석을 시도하는 것도 아닌, 역사적으로나 문학사적으로 애매한 전이의 지점에 타운리 싸이클의 두 개의 목자극은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극을 그 어느 한 쪽의 목소리만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은 수직의 목소리와 수평의 목소리, 신의 목소리와 인간의 목소리, 이 두 가지 목소리의 분열과 통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현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호서대학교)

 

 

 

 

 

 

참고문헌

 

Badir, Patricia. "Playing Space: History, the Body, and the Records of Early English Drama," Exemplaria 1997(9) 255-280.

Briscoe, Marianne G. and John C. Coldewey eds.. Contexts for Early English Drama.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Indiana UP,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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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pper, Lawrence M.. Drama, Play and Game: English Festive Culture in the Medieval and Early Modern Period. Chicago: U of Chicago P,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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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s, David. The Chester Mystery Cycle. East Lansing: Colleagues Press, 1992. Medieval Texts and Studies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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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nsler, Claire. Drama and Resistance: Bodies, Goods, and Theatricality in Late Medieval England. Minneapolis and London: U of Minnesota P,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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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ns, Martin and A. C. Cawley eds.. The Towneley Plays. EETS Oxford: Oxford UP, 1994.

Woolf, Rosemary. "The Effect of Typology on the English Medieval Plays of Abraham and Issac." Speculum 32 (1957): 800-812.

 

 

 

 

 

 

 

ABSTRACT

 

Divine Voice, Human Voice: Two Voices in the First and the Second Shepherds' Plays

 

Yejung Choi

 

The First Shepherds' Plays and the Second Shepherds' Plays carries two different voices: divine voice and human voice. Actually the voice of reality which can be called horizontal voice does not seem to be reconcilable to that of transcendence which can be called vertical voice. And the realm of the suffering of life is far from that of the joy of salvation. But these two worlds are set together in the First Shepherds' Play and the Second Shepherds' Play. The divine and the human, the sanctity of church and the secularity of marketplace meet each other in the space of drama. This is made possible by the seemingly paradoxical situation that religious education is conducted by lay people. These two plays provides the space in which lay people can give voice to their own concerns and interests. The meaning of the First Shepherds' Play and the Second Shepherds' Play is found in the fact that these two plays keep the two distinctive voices alive. Vertical voice does not repress horizontal voice, and human voice does not distort divine voice. These two voices are sometimes overlapped or intertwined. At other times human voice diverges from divine voice. The coexistence of these two different voices is a distinctive characteristic of these two plays.

 

 

 

 

 

 

 

 

 

 

 

 

국문초록

 

신의 목소리, 인간의 목소리: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에서 들리는 두 개의 목소리

 

최 예 정

 

타운리 싸이클의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은 두 개의 다른 목소리, 현실과 초월, 삶의 고통과 구원의 기쁨이라는 영원히 해결하기 어려운 두 가지 영역의 목소리를 종교극이라는 형식 속에 담아내는 독특한 극이다. 신과 인간, 교회와 저자거리가 극이라는 공간을 통해 대등한 만남을 갖고 있다. 종교 교육이라는 거룩한 대의가 일반 신도들을 통해 수행된다는 중세 싸이클 드라마의 독특한 조건이 이러한 종교극을 가능하게 했다. 성직자가 주도하여 신학적 해석만이 목소리를 내는 극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성직자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개인의 삶에 대한 인문주의적 해석을 시도하는 것도 아닌, 역사적으로나 문학사적으로 애매한 전이의 지점에 타운리 싸이클의 두 개의 목자극은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극은 그 어느 한 쪽의 목소리만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은 수직의 목소리와 수평의 목소리, 신의 목소리와 인간의 목소리, 이 두 가지 목소리의 분열과 통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현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 본 연구는 호서대학교 교내 연구비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음.

 

2) REED 사업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보이는 대표적 학자들로는 Simon Shepherd, Theresa Coletti, Patricia Badir를 들 수 있다.

 

3) 타운리 싸이클의 ꡔ첫 번째 목자극ꡕ과 ꡔ두 번째 목자극ꡕ의 텍스트로는 Martin Stevens and A. C. Cawley eds. The Towneley Plays를 사용. 앞으로 극을 인용할 때에는 본문 내에서 괄호 안에 행수만 표기함.

 

4) 판본은 David Mills, The Chester Mystery Cycle, East Lansing: Colleagues Press, 1992. Medieval Texts and Studies 9. 사용. 행수는 괄호 안에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