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더왕 신화의 형성과 해체(II):
궁정적 사랑을 중심으로*
김 정 희
Ⅰ. 序
아더왕 소설들은 1135년 경 영국에서 처음 아더왕의
일대기가 라틴어로 쓰여진 이래 약 3세기에 걸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일대에서 번역 및 개작, 속편의 형태로 쓰여졌다. 이 소설들은 단순히
새로운 에피소드를 추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의 등장인물, 모티프, 주제 등을 달리 조명하곤 했다. 전통적인 모티프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적
현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혹은 그것에 저항하는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아더왕 소설은
상당히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거니와, 앞서 「아더왕 신화의 형성과 해체 (I)」1)
에서는 12세기 아더왕 텍스트들 속에서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상호 배타적인 군주론에 의거하여 아더왕이라는 상징이 형성, 변용되는 과정을 살펴본
바 있다. 본 논문에서는 초점을 12-13세기 프랑스 귀족사회로 옮겨 당시 귀족사회의 기득권자들, 즉 상속영지와 합법적인 아내가 있었던 영주계층과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상속과 결혼에서 소외된 독신기사들 간의 알력 및 공생관계를 궁정적 사랑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른바 궁정적 사랑
l'amour courtois은 독신으로, 유력자의 궁정에서 군사적 봉사의 대가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귀족출신 기사들의 좌절된 욕망, 그리고 그들의
잠재된 폭력성을 길들여 자신의 권력의 토대로 삼고자 하는 영주 계층의 전략이 만나는 지점이다.
크레티엥 드 트르와 Chrétien de
Troyes의 ꡔ수레를 탄 기사 Le Chevalier de la charretteꡕ(1177년 경) 에 등장하는 왕비 그니에브르와
랑슬로의 사랑은 이러한 궁정적 사랑의 원형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난해한 상징들과 작가의 의도적인 침묵 때문에 실상 이 소설의 작가가 궁정적 사랑에
부여하는 의미를 파악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결국 미완성으로, 작가가 결론을 포기한 채 끝내버린 이 이야기는 60 여 년 뒤 방대한 산문소설 랑슬로-그라알
연작 le cycle de Lancelot-Graal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연작을 이루는 소설들 중 가장 먼저 쓰여진 ꡔ산문 랑슬로 Lancelot
en proseꡕ(1225년 경)에서 랑슬로는 왕비에 대한 사랑으로 아더왕국을 구원하는 낭만적 영웅으로 그려진다. 그런가 하면 같은 연작
내에서도 ꡔ산문 랑슬로ꡕ에 뒤이어 쓰여진 ꡔ성배 탐색 La Quête du saint Graalꡕ(1230년 경)에서는 이러한 궁정적
사랑이 음탕한 간통행위로 격하되고 이 연작의 마지막 작품인 ꡔ아더왕의 죽음 La Mort du roi Arthurꡕ(1230년 경)에
이르게 되면 아더왕의 죽음과 그 왕국의 몰락을 가져온 간접적인 원인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다. 궁정적 사랑은 아더왕 궁정문화의 정수이자 아더왕국을
외부의 도전으로부터 지켜온 버팀목인 동시에 그 궁정을 내부로부터 파괴하여 아더왕 시대의 종말을 준비하는 양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궁정적
사랑에 대한 시각은 작가별로, 시대별로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있거니와 이러한 주제가 12-13세기 궁정에서 왜 그리도 큰 호응을 얻었으며 그 주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왜 그리도 다른 것일까? 게다가 60여 년에 걸쳐 되풀이되어 쓰여지면서 궁정적 사랑은 어떻게 변형되었으며 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왕비와 기사의 사랑이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토픽이 된 것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일진대, 이에 대한 역사가들의 지적은 충분히 귀 기울일 만 하다. 뒤비는 궁정적 사랑이라는
문학적 토포스의 배경으로 우선 당시 귀족가문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던 영지가 분할 상속되는 일을 막기 위해 장남만을 결혼시켰던 관행을 지적한다.
귀족가문의 적자들 중에서도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정착할 땅이 없어 결혼을 하지 못한 채 수도원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거나 떠돌이 기사로서 사회적으로
불안정하고 위협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2). 랑슬로와 트리스탕은 결혼과
상속에서 배제된 이 독신의 귀족기사들을 상징한다. 당시 중세사회에서 궁정적 사랑이라는 테마가 장자 상속제의 희생자인 독신기사들, 그리고 정략결혼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는 귀부인들의 이해와 부합됨은 상대적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으나 궁정적 사랑에서 배제된 영주의 입장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 소설들이 쓰여진 것은 분명 당시의 가장 강력한 제후들의 궁정이었으되 그들은 왜 영주 부인의 불륜을 예찬하는 문학이 자신의 궁정에서 쓰여지고
유행하는 것을 묵인하였을까?
이 점에 관해서 중세 연구자들은 상당히 다양한 주장들을 개진하고 있다. 마르켈로-니지아는 기사가 사랑하는 여자가 이미 다른 남자, 그것도 기사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남자에 의해 선택되고 그 가치가
인정된 여자라는 점에 주목하여 궁정적 사랑이 남자들간의 동성애, 적어도 영주와 젊은 기사간의 상호 유혹의 관계를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3). 영주가 선택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영주와 경쟁자의 위치에 자신을 놓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사 자신이 영주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 또한 반영하며, 그녀 옆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그녀의 남편인 영주 옆에 머무를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분석이지만 산문소설의 일부 대목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을지언정 궁정적 사랑의 원형인
크레티엥 드 트르와의 운문 소설에는 전혀 적용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뒤비의 경우, 남성들의 관계를 궁정적 사랑의 핵심적인
요소로 보는 마르켈로-니지아의 견해를 수용하되, 보다 정치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 뒤비는 궁정적 사랑을 혈기 넘치는 젊은 기사들을 다루기 위해
영주들이 일종의 전략적 차원에서 만들어 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기꺼이 자신의 부인을 미끼로 내세워 기사들 간에 경쟁을 조장하되4), 절도의 개념을 부각시켜 그들의 충동을 제어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녀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헌신적 봉사를 통해 기사들로 하여금 봉신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들을 갖추게 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보다 남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하는
심성을 갖도록 함으로써 사회조직의 토대를 공고하게 만드는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5).
결혼을 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들의 입장에서 볼 때 독신기사들은
잠재적 동요세력인 동시에 자신들 권력의 주축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뒤비의 지적은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중세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이자 이 독신기사들이 갈망하던 봉토문제와는 연계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상속에서 배제된 독신기사들이 원하는
것이 정착할 수 있는 땅과 여자였으되 궁정적 사랑은 그들에게 여자의 허상만을 주고 있을 뿐이다. 궁정적 사랑의 미명 하에 영주들이 은폐하고자 한
것은 어쩌면 땅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잘 생긴 독신기사와 왕비의 사랑이라는 낭만적 요소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은 사실 영주와 독신기사
간의 타협의 산물이며,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힘의 균형상태라는 것이 우리가 궁정적 사랑을 보는 시각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궁정적 사랑을 주제로 하는 아더왕 소설들을 읽어보려 한다. 궁정적 사랑의 모델을 최초로 제공하는 텍스트는 크레티엥 드 트르와의 ꡔ수레를 탄 기사 Le Chevalier de
la charretteꡕ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수수께끼 같은 이 소설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랑슬로와 왕비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는 바, 이러한 비완결성6)과 난해함은 13세기에 이르러 다시쓰기 현상을 부추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ꡔ산문 랑슬로ꡕ로서 이 소설은 크레티엥 드 트르와가 단편적으로 기술한 랑슬로와 그니에브르의 연애담에 시작과 끝을 제공하고
있다. 이 산문소설은 단순히 크레티엥 소설을 보완하고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 그들의 궁정적 사랑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며 발전된 시각을 보여주고 있거니와
이 두 소설의 비교분석은 궁정적 사랑의 진정한 의미와 그 개념의 발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텍스트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궁정적
사랑이라는 주제가 등장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Ⅱ. 궁정적 사랑의 재조명 : 봉토를 중심으로
궁정적 사랑은 흔히 남불 트루바두르가 노래한 ‘진정한
사랑 fin amor’과 혼동되고 있다. 당시 결혼은 당사자들의 사랑이 아니라 가문의 이해에 의해 결정되었던 바, 그 안에서 해소될
수 없었던 정념에 대한 예찬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12세기 중세 사회의 새로운 이상으로 떠오른 궁정성7)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둘은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진다. 그리고 남불의 ‘진정한 사랑’ 이 알리에노르의 중개로 헨리 II세의 앙글로
노르만 궁정을 비롯하여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쓰여진 궁정소설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궁정적 사랑은 남불 트루바두르의 ‘진정한 사랑’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몇 가지 요소들을 포함한다. 트루바두르들이 노래한 ‘진정한 사랑’은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육체의 아름다움과 성(性), 그 자체를 찬미하며, 나아가 성적 충동을 도덕적, 정신적 진보의 동인으로 삼는다”8)는 점에서 당시 사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적 가치와 행동방식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궁정적 사랑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은 주로 성직자, 혹은 그들과 교육을 같이 받아 그들의 문화와 의식을 공유하는 작가들에 의해 쓰여졌으며
비록 혼외의 관계를 예찬하고는 있으나 그 관계가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 그리고 사회적, 종교적 원칙과 비교적 타협적이며
가능한 한 그것들을 존중한다는 점들로 인해 12세기 초 프랑스 북부의 귀족층에서 자생한 것9)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뒤비가 지적한 대로 남불 음유시인들이 “남편, 부인, 또 다른 유부남”의 관계를 노래한 반면, 궁정적 사랑은 “남편,
부인, 독신기사”의 관계를 설정한 것 또한 그 둘을 구별하는 중요한 차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10).
그러나 무엇보다도 궁정적 사랑의 가장 혁신적인 면은 사랑과 기사도를 연관시킨 것이라
하겠다. 영주 부인은 궁정의 기사가 수많은 모험을 거치면서 보다 완벽에 가까워지고 자신을 절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해 감에 따라 단계적으로 사랑을 허락한다. 이로써 궁정적 사랑은 단순히 개인적 욕망의 충족에 그치지 않고 기사도 교육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기사를 용맹스럽게 한다는 궁정적 사랑의 원형은 조프르와 드 몬무스의 ꡔ브리튼 왕실사ꡕ(1135년 경)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기혼녀와 미혼기사의 관계라는 좁은 범주 너머 기사와 일반적인 귀족여성의 관계이다.
어떠한 기사도 최소한 세 번 이상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지 않는 한 그녀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여자들은 더욱 순결하고, 정숙해졌으며 기사들은 그녀들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 용맹스러워졌다.
(...) et aucun chevalier n'était digne de leur
amour, s'il ne s'était illustré au moins trois fois au combat. C'est ainsi que
les femmes devenaient chastes, vertueuses, et les chevaliers plus vaillants,
par amour pour elles.11)
현실적으로 귀족 여성, 특히 상속영지를 가진 여성은
주군이 헌신적인 기사에게 군사적 봉사에 대한 대가로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상속받은 땅을 가진 귀족 여성들은, 평 기사가 선망하는
권력의 원천이자 자립수단12)이었던 바, 이 여성들은 주군에게 있어서 기사의
용맹성을 유도하는 미끼로 사용될 수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고아와 과부를 보살펴야 하는 주군의 의무는 사실 그의 특권13)이기도 한 것이다. ꡔ브리튼 왕실사ꡕ에서 이미 여자는 땅의 환유라고 간주될 수
있으되 그 연관성이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면 그 이후에 쓰여진 아더왕 소설에 이르러서는 그 둘이 거의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서술되기 시작한다. 마리 드 프랑스 Marie de France의 '랑발 Lanval'은 아더왕이 색슨족과의 전쟁에서 그를 도운 기사들에게
바로 여자와 땅을 분배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사건의 발단은 왕이 실수로, 그리고 랑발을 시기하는 동료기사들이 굳이 그를 편들어주려 하지 않아,
랑발이 여자와 땅을 받지 못한 데14) 있었다. 비록 왕의 아들이었지만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아더왕 궁정에서는 의지할 곳 없는 이방인에 불과했던 랑발은 상심하여 숲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름다운 요정을 만나 결국
여자와 재물을 모두 얻게 된다는 것이 전반부의 줄거리이다. 최초의 본격적인 아더왕 텍스트라고 할 ꡔ브리튼 왕실사ꡕ가 그토록 칭송한 아더왕의 너그러움은
그 이후에 쓰여진 아더왕 소설에서 이렇게 조금씩 결함을 보이기 시작하거니와, 문학 텍스트에서도 왕과 기사 간의 갈등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기사의 군사적 봉사에 대한 대가 문제이며 그것이 여자와 땅으로 표현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크레티엥 드 트르와의 소설 ꡔ사자의 기사 Le
Chevalier au Lionꡕ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시각에서 읽혀질 수 있다. 어느 날 아더왕 궁정에 모인 기사들이 저녁 식사 후 담소를
나누던 중 한 기사가 실패한 모험담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모험을 찾아 7년 간 헤매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던 차에 어느 거인이 모험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고 그가 가르쳐준 대로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샘으로 가서 몇 가지 주술적인 행동을 하자 한 힘센 기사가 나타나 왜 자신의 영토를
황폐하게 만드냐고 하면서 결투를 신청해왔다는 것이다. 이뱅은 그러한 모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아더왕을 비롯한 궁정의 다른 기사들이
그 모험을 선점할까 두려워 아무도 모르게 먼저 궁정을 빠져나간다. 땅을 소유한 자와의 결투는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과연 이뱅은 그 샘의 모험을
통해 아름다운 과부와 그녀가 상속받은 왕국을 얻게 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뱅의 모험은 한 영주를 죽여 그가 소유한 영지와 부인을 탈취한
것이다. 경이로운 모험이 기사에게 가져다주는 것, 그리하여 아더왕의 기사들로 하여금 모험을 찾아 쉴 새 없이 궁정을 떠나게 하는 원심력의 정체가
귀족여인과 땅이라는 점은 여기서 또 한번 확연히 드러나거니와 이 소설 도입부에 등장하는 아더왕과 왕비의 모습은 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아더왕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가신들을 기쁘게 해주어야 하는 본분을 망각하고 식사 후 일찍 잠이 들어버리고, 그를 대신하여 가신들 곁에 온 왕비를 맞이하는
기사들의 태도는 무례하기 짝이 없다15). 이러한 궁정의 분위기는 왕이 더 이상
봉토를 주지 않으며 기사들 개인이 그것을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과 호응하는 것이다. 뒤비는 1155년부터 이미 폭력이 점차 줄어들었고, 봉건제후들은
그들의 선조들처럼 무력으로 빼앗은 여자들을 봉신들에게 나누어줄 수가 없었으며 무력이 아니라 영주의 권한을 통해서 상속녀들을 결혼시키는 일도 그리
수월치 않았음을 지적한 바 있다16).
위의 소설 ꡔ사자의 기사ꡕ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작가에 의해 쓰여진 ꡔ수레를 탄 기사ꡕ에 이르면 기사가 연모하는 대상이 과부나 처녀가 아닌 기혼녀, 그것도 기사가 섬기는 왕의 아내로 바뀐다.
이른바 궁정적 사랑의 기본구도가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이 때 독신기사들이 갈구하던 봉토의 문제는 갑자기 이야기 표면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 두 가지 변화는 서로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Ⅲ. 궁정적 사랑의 이념과 현실
크레티엥 드 트르와의 소설 ꡔ수레를 탄 기사ꡕ의
주인공 랑슬로는 가스통 파리스가 최초로 ‘궁정적 사랑이라고 명명한 것의 모델이기도 했다. 그러나 랑슬로라는 등장인물을 위시하여 이 소설의 주요
모티프들은 크레티엥 드 트르와가 처음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ꡔ수레를 탄 기사ꡕ의 주요 모티프들을 제공하는 밑 텍스트로는 흔히 세 개의 텍스트가
꼽힌다.
‘그니에브르의 납치’ 모티프는 1130년 경 웨일즈인
카라독 드 클란카르판 Caradoc de Llancarfan이 쓴 ꡔ질다의 생애 Vita Gildaeꡕ에서 처음 발견된다. 서머셋의
왕 멜바스가 아더왕의 아내, 그니비어를 납치하여 질다가 있던 글랫슨베리 사원에 가두자 아더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지만 늪 때문에 꼼짝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질다와 수도원장이 중재를 한 끝에 두 왕은 화해를 하고 왕비가 풀려나게 된다. ‘그니에브르의 불륜’ 모티프의 경우, ꡔ브리튼
왕실사ꡕ와 이 책을 불어로 옮긴 바쓰 Wace의 ꡔ브뤼트 Brutꡕ(1155년)에 등장한다. 아더왕은 로마원정을 떠나면서 왕국의 통치를
조카 모르드레에게 맡기지만 그는 왕위를 찬탈하고 왕비 그니에브르와 부정을 저지른다. 그로 인하여 아더왕과 조카 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거기서
아더왕과 모르드레 모두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한편, 랑슬로의 원형으로 흔히 언급되는 인물은 울리히 드 자치코벤 Ulrich de
Zatzikhoven이 중세독어로 번역한 소설 ꡔ란즐렛 Lanzeletꡕ17)의
주인공 란즐렛이다. 어려서 납치된 란즐렛은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모르는 채 15살이 될 때까지 물의 요정에 의해 길러진다. 아더왕 궁정의 기사가
된 그는 그니에브르를 요구하는 발르랭에 맞서 싸워 이긴다. 그러나 맹세를 어긴 발르랭이 왕비를 납치하자 란즐렛은 다른 아더왕 궁정의 기사들과 함께
그녀를 데려오는 일에 참가한다. 혹자는 크레티엥 드 트르와의 소설이 ꡔ란즐렛ꡕ보다 먼저 쓰여졌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ꡔ란즐렛ꡕ에서는 주인공과
왕비의 사랑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있으며 이 소설에서 란즐렛은 자신의 부인 이블리스의 왕국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모티프들은 모두 왕비의 납치, 혹은 탈취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여기서 왕비는 아더왕 권력의 환유라고 할 수 있거니와 그녀의 납치로 비유되는 왕권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성직자의 중재, 군사적
방법이 동원된다. 후자의 경우, 아더왕이 직접 개입한 전쟁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기사를 통한 대리전은 성공한다. 왕비, 그리고 그녀와 더불어 왕국까지도
요구하는 이러한 외부 도전세력의 존재는 궁정적 사랑이 존재이유를 획득하기 위해서, 즉 궁정적 사랑이 궁정의 안정과 균형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필요조건이거니와 이것은 트리스탕과 랑슬로의 사랑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이다. 트리스탕의 경우, 기사와 왕비 간의 사랑이라는
기본 설정은 같으나 왕비를 둘러싼 관계가 왕과 기사의 양자구도를 띠고 있는 데 비해 랑슬로로 대표되는 궁정적 사랑은 왕비를 중심으로 왕과 도전세력,
그리고 기사라는 삼각구도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영주계층이 궁정적 사랑을 묵인한 것은 바로 여기서 파생되는 긍정적 효과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서 독신기사의 힘을 빌어 왕국을 도전세력으로부터 보호하되, “여성의 간통이 사회의 한 특성이었던 사회에서“18) 왕비의 일회적인 사랑을 허락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 말이다.
1. 궁정적 사랑의 기본구도
이 소설 전반부의 흐름은 바로 이 같은 궁정적 사랑의 삼각구도에 정확히 부합된다. 어느 날 아더왕 궁정에 한 기사(멜레아강)가 돌연 나타나더니 아더왕국의 많은 백성들이 자신의 왕국에 포로가 되어있으며 아더왕은
그들을 구출해낼 힘도 없고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죽게 될 것이라는 폭언을 퍼붓는다. 놀랍게도 아더왕이 그러한 상황을 덤덤히 받아들이자
멜레아강은 아더왕 궁정의 기사들 중 한 명으로 하여금 왕비 그니에브르를 호위하여 자신에게 보낼 것을 제의한다. 자신이 결투에서 이기면 왕비마저
얻고, 지면 왕비와 더불어 유폐된 백성을 함께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아더왕 소설들 속의 모험이 기사 개인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던 데 반하여
ꡔ수레를 탄 기사ꡕ에서의 모험은 아더왕국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며 기사(랑슬로)는 아더왕을 대신하여 왕국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 때
기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왕비에 대한 사랑이다. 왕비를 공통분모로 하여 아더왕과 기사의 이해가 일시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랑슬로는 위험하고
괴이하기 짝이 없는 모험들을 거쳐 가장 힘든 관문인 칼의 다리19)를 무사히
통과한 다음 멜레아강과의 결투 끝에 고르 왕국에 끌려간 왕비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마침내 왕비와 사랑의 밤을 보내게 된다. 이 때 왕비와
더불어 그곳에 유폐된 다른 아더왕국의 백성들까지 구해낸 랑슬로는 기사의 사회적 의무와 개인적 사랑을 양립시킨다는 점에서 일단 트리스탕의 딜렘마를
극복하는 듯하다.
이러한 삼각구도는 이 소설을 13세기에 산문으로
다시 쓴 ꡔ산문 랑슬로ꡕ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갈르오라는 거인이 “아더왕의 영토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와 자질을 갖추었다고
칭송이 자자한 그의 왕비를 차지하겠다”20)고 아더왕에게 도전해옴으로써 처음
형성된다. 이것은 크레티엥 소설의 도입부에서 멜레아강이 한 말과 상통하는 바, 그 핵심은 바로 아더왕의 영토와 왕비의 운명을 연계시킨 데 있다.
그러나 산문소설에서 아더왕-갈르오-랑슬로로 구성되는 삼각구도는 크레티엥 소설에서 아더왕-멜레아강-랑슬로의 관계보다 훨씬 더 미묘하며 왕국의 위기가
해소되는 방식도 매우 독특하다. 크레티엥의 소설에서 아더왕국이 어떤 이유로 위기를 맞게 되었는지, 왜 아더왕국의 백성들이 고르왕국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지 자세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는데 반하여, 새로운 도전자 갈르오의 인물묘사는 아더왕과 대조를 이루면서 아더왕국이 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를
어느 정도 밝혀주고 있다.
앞서 운문소설에서 멜레아강이 전적으로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면 아더왕국의 새로운
도전세력으로 등장한 갈르오는 군사적으로나 궁정적 덕목에 있어서나 아더왕을 능가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갈르오가
“백성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며 그 또래 사람들 중 가장 많은 땅을 정복하였고 아직 젊고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사랑스럽고 또 가장 너그러운 왕”21)으로 묘사되고
있는 반면, 당시 아더왕은 “훌륭하지만 가난한 기사22)”에게 너그럽게 베풀
줄 모르는 인색한 왕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더왕 궁정의 기사들이 갈르오와의 첫 번째 전쟁에 대거 불참하는 일이 벌어지고 아더왕국은 결정적
위기를 맞게 되는데 이 무렵 어느 은자가 아더왕에게 하는 충고를 들어보자23).
Les terres seront mieux gardées par de nombreux
prud'hommes, s'ils les ont, qu'elles ne le seraient par toi, car tu n'es qu'un
seul homme; et le pouvoir que tu as, tu ne l'as que par eux. Et tu dois
préférer que tes prud'hommes tiennent avec honneur une partie de ta terre,
plutôt que de perdre le tout honteusement24).
많은 프뤼돔들이 영토를 갖게 된다면 그들이 그대보다 영토를 더 잘 지킬 것이오. 실제로
그대는 일개인에 지나지 않소. 그대의 권력은 바로 그들 덕에 유지되는 것이오. 따라서 그대의 모든 영토를 수치스럽게 상실하는 것보다는, 프뤼돔들이
명예롭게 그대 영토의 일부를 소유해야 하오.
이상적인 봉건사회의 체제를 설명하는 이 말은 구체적으로 봉토가 아더왕국에서 제대로
분배되지 않고 있음을 시사함으로써 아더왕국이 맞게 된 위기가 무엇보다도 아더왕이 후의를 결여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한다25). 아더왕은 이 은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재물을 아낌없이
베풀기는 하지만 전세가 쉽게 역전되지는 않는다. 이 같은 상황에서 랑슬로가 세운 공적은 단순히 용맹을 발휘하여 아더왕의 도전세력을 물리치는, 통상
기사에게 맡겨진 역할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랑슬로는 우연히 이 전쟁을 구경하던 차에 왕비의 부탁을 받아 아더왕 진영에
합류하게 되는데 갈르오는 이 때 랑슬로의 활약을 목격하고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하여 갈르오가 랑슬로를 만나 자신을 동료로 삼아달라고 청하자
랑슬로는 다음과 같은 희한한 조건을 제시한다.
"Voici ce que je vous demande. Dès que vous
aurez gagné la bataille contre le roi Arthur, de telle manière qu'il n'y aura
plus aucun espoir de salut, et dès que je vous aurai mis en demeure de le
faire, vous irez lui crier merci et vous livrer à lui, sans conditions."26)
아더왕과의 전투에서 당신의 승리가 확정적이 되는 순간, 제가 요구하는 즉시 아더왕에게
가서 자비를 청하고 무조건 항복하십시오. 그것이 제가 당신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갈르오는 랑슬로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명예와 영토를
기꺼이 포기한다27). 왕국의 위기는 도전자가
땅보다 우정(혹은, 사랑)을 기꺼이 우위에 놓음으로써 해결이 되는 것이다. 이는 비록 랑슬로가 아닌 갈르오라는 인물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되고
있긴 하지만 궁정적 사랑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다. 뒤에 가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궁정적 사랑이 등장하기 이전의 초기 아더왕 소설들 속에서 왕의
너그러움이 궁정문화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서 부각되었다면 궁정적 사랑의 전제조건이 되는 왕국의 위기는 왕이 그러한 너그러움을 결여한 데서 비롯되며,
궁정적 사랑은 그러한 미덕을 왕이나 제후가 아닌 평기사로 하여금 실천하도록 함으로써 -직접, 혹은 도전자에게 수용하도록 함으로써- 그 위기를 해소한다.
아더왕을 수식해오던 ‘너그럽고 용맹스러운’이라는 형용사는 이제 궁정적 연인을 수식하게 되는 것이다. 갈르오의 항복은 랑슬로의 궁정적 사랑이 아더왕국을
위해 세운 가장 큰 공적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랑슬로의 사랑은 그 일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왕비에게 밝혀지고 받아들여진다. 즉, 왕국과 왕비의
위기가 해결된 후 그 보상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운문소설이 제시한 궁정적 사랑의 필요조건은 비록 구체적인 형태는 다르지만 산문소설에서도
충족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궁정적 사랑의 내재적 불안정성
기사가 오직 왕비의 사랑을 위해 왕을 대신하여 왕비를 구하고 아울러 왕국의 위기를
해소하는 것을 궁정적 사랑의 본질로 본다면 이렇게 해서 왕국이 위기에서 벗어나고 더 이상 도전세력이 왕국을 위협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궁정적
사랑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운문소설의 작가는 랑슬로가 멜레아강과의 첫 번째 결투에서 상대를 완전히 처치하는
대신에 일년 뒤에 재결투를 하도록 한다. 멜레아강의 죽음이 연기됨에 따라 랑슬로의 역할 또한 자연히 연장되는데 그것은 단순히 궁정적 사랑의 연장을
위한 것은 아닌 듯 하거니와, 작가는 왜 이러한 유예기간을 설정하였을까?
그 뒤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왕국의 위기상황이 소멸되면서 삼각구도가 붕괴되고 궁정적
사랑이 트리스탕적인 양자구도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랑슬로와 왕비의 동침,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벌어지는 사건에서는 트리스탕적인 모티프들이 재등장한다. 랑슬로가 왕비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 창문의 창살을 뽑다가 얻은 상처, 그 상처에서
흐른 피가 묻은 왕비의 침대시트, 왕비의 불륜을 둘러싼 오해와 위증, 결투재판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멜레아강은 그 피가 쾨의 상처에서 흐른 피라고
단정짓고 결투를 신청한다. 랑슬로는 쾨의 결투대리인이 되어 ‘왕비는 쾨와 불륜의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맹세를 하고 결투를 한 끝에 위기를 벗어난다.
왕비와 기사의 사랑은 주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그 다음날로 당사자들에 의해 간접적으로나마 부인되고 취소되는 것이다. 궁정적 사랑이 왕의 입장에서
유효한 것은 왕비가 신기루로서 존재하는 동안, 기사가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견제하는 동안 만이다. 외부의 도전이 사라지고 기사가 궁정에 머무르며
기사와 왕비의 사랑이 고착화될 때 그것은 궁정의 통합이 아니라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궁정적 사랑과 결혼의 갈등이라는 트리스탕적 딜렘마가 다시
고개를 들게 되는 것이다. 궁정적 사랑이 더 이상 왕과 공조체제가 아니라 적대관계를 갖게 된 이후 그것은 다 같이 파국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다.
궁정적 사랑은 교육적이며 사회체제의 유지에 협조적인 요소와 더불어 자기파괴적, 나아가 사회파괴적 성격 또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랑슬로는 일년 후에 있을 최종결투 이전에는 필요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결투재판에서 승리하자마자 곧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해지고 아더왕의 궁정은 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한 정상적인 구도를 되찾게 된다. 그리고 왕국이 평화로운 한 그들은 모두 랑슬로를 잊어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일년 후 탈출에 성공한 랑슬로가 멜레아강을 죽이고
아더왕 궁정의 모든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급작스럽게 소설이 끝나버리고 만다. 멜레아강의 죽음과 더불어 그가 상징하는
궁정의 위기가 완전히 해소되면서 랑슬로가 궁정에 합류하는 것은 또 다시, 어쩌면 영원히 유보되는 것이다. 이는 궁정적 사랑이 사회적, 정치적 효용을
상실하는 그 순간, 용도폐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아더왕 궁정을 위협하는 세력을 처단한 뒤 마침내 기사의 사랑이 그 보상을 받는
순간은 왕의 입장에서 볼 때 기사가 효용성을 상실하는 순간이며 왕비와 기사의 사랑이 트리스탕과 이죄의 사랑처럼 자기목적적이 되어버리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산문소설의 경우, 운문소설과는 달리 도전세력이 더
이상 적대적이 아니라 우호적인 관계로 변화하면서 위기가 해소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각구도가 완전히 소멸되어 트리스탕적인 양자구도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갈르오와 랑슬로의 동성애적 관계28)를 설정하여 랑슬로로 하여금
갈르오의 영지에 머물게 하면서 아더왕 궁정에 귀환하는 것을 될수록 연기한다. 적대적인 멜레아강에 의한 납치나 우호적인 갈르오와의 동거나 랑슬로를
궁정 밖에 위치시키는 기능은 결국 같다. 그리하여 아더왕의 궁정은 당분간 균형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랑슬로가 원탁의 기사가 되어 아더왕
궁정의 일원이 되고 갈르오가 랑슬로를 궁정 밖으로 유도하는 힘을 점차 잃게되면서 궁정적 사랑은 서서히 파국을 향해 간다. ꡔ산문 랑슬로ꡕ의
짧은 판본은 다시 자신의 영지로 혼자 돌아 간 갈르오가 랑슬로가 죽었다는 헛소문을 믿고 그 슬픔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로 마감되고 있다. 이는 랑슬로와
왕비 간의 거리를 유지시켜주는 외적요인이 사라지면서 궁정적 사랑으로 인해 궁정의 균형이 위태로워짐을 예고한다. 그리고 그라알 모험이 종식되면서
아더왕국에 모험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시기가 도래하는데 이는 아더왕 궁정에 대한 외부의 도전이 사라지고 더 이상 궁정적 사랑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삼각구도가 형성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할 일이 없어진 기사들이 마상시합으로 소일하게 되면서 궁정의 에너지는 그 내부에서 폭발하게 된다.
마상시합은 진정한 모험이 아니며 궁정적 사랑으로 촉발된 기사의 용맹이 상쇄할 그 어떤 도전도 구현하지 못한다29). 게다가 궁정적 사랑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비밀로 남아있어야 했거니와
궁정에 계속 머무르게 된 랑슬로와 그니에브르의 무절제한 행동으로 사실 그 동안 왕을 비롯하여 궁정의 모든 사람들이 묵인해온 그들의 관계는 공론화되기에
이른다. ꡔ아더왕의 죽음ꡕ에서 랑슬로와 왕비의 사랑이 발각되고30) 왕비가 화형에
처해지기 직전 랑슬로에 의해 구출되는 것, 교황의 중재, 왕비가 뉘우치고 왕에게 돌아가는 것, 그리고 기사가 왕국을 떠나 바다 건너 다른 곳으로
가는 과정 역시 트리스탕 소설의 줄거리를 그대로 빌려온 것이다. 즉 운문소설과 마찬가지로 산문소설에서도 궁정적 사랑은 그것이 이루어지고 지속적이
되는 순간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자기 파괴적 성격을 지니거니와, 궁정적 사랑의 작가들이 트리스탕적 결말을 피해 어떤 새로운 출구를 마련하고
있는지가 우리의 관심사가 되겠다. 그 출구는 이제 우리가 분석하려 하는 궁정적 사랑의 본질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3. 궁정적 사랑의 사회적 함의
기사가 험난한 시련을 극복한 뒤 왕국을 구원하고 마침내 갈구하던 사랑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 궁정적 사랑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들은 사랑을 통한 기사의 자질 향상 등 교육적 측면,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개인의 완성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리하여 단순한 용맹성 외에 궁정적 연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절도 ‘mesure', 즉, 사랑하는 여인의 호의를 받을 자격을 얻을 때까지 충동과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크게 부각되어왔다. 그러나
ꡔ수레를 탄 기사ꡕ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랑슬로가 왕비를 보기 위해 감수해야 했던 가장 큰 희생은 수레를 탄 행위였으되, 그것이 왕과 왕비, 그리고
기사 사이의 관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리 명확하게 분석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랑슬로가 끌려간 왕비를 찾아가는 길은 일련의 해괴한 모험들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이 바로 수레의 모험이다. 왕비의 행방을 애타게 찾던 랑슬로는 수레에 올라탄다면 왕비가 간 곳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난쟁이의 말을 듣고 잠시 망설인 끝에31) 말을 버리고
당시 치욕의 상징인 수레에 올라탄다. 화자의 상세한 설명에 의하면 수레는 살인이나 절도 등을 저지른 중죄인을 태우기 위한 것으로 수레에 올라탄
사람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며 궁정에서는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명예롭고 기쁨에 가득한 대접을 받을 수 없게 된다”32)고 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치욕을 감수하고 명예를 포기한다는, 일종의 '사회적
죽음‘33)을 감수한다는 조건하에 왕비가 그에게 보여진다는 것이다. 중세의 명예
honneur는 봉토의 소유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감안할 때 수레가 의미하는 명예의 포기는 바로 땅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겠는가? 즉, 종전의 아더왕
소설과는 달리 이 소설에서는 여성과 땅이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대신 여성은 기사가 명예(즉, 봉토)를 포기하는 데 대한 반대급부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비와의 사랑은 기사에게 아무런 부를 안겨주지 않는다. 궁정적 사랑이 왕의 살해로 이어지는 예는 없기 때문이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주군의 살해는 가장 큰 죄악이 아니었던가34)? 이러한 가정은
13세기 산문소설을 통해 검증되거니와, 궁정적 사랑의 주체인 기사의 현실, 즉 영토를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의 사랑이 성취된 뒤에도 여전히 가난하고,
아무 영토도 소유하지 못한 기사라는 사실은 산문소설이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다.
랑슬로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는 ꡔ산문 랑슬로ꡕ는
바로 ꡔ수레를 탄 기사ꡕ에서 왕비만이 알고 있었던 기사의 이름 ‘호수의 랑슬로 Lancelot du lac’의 내력을 밝히는 데에서 출발한다.
아더왕의 봉신이었던 랑슬로의 아버지, 방왕은 이웃 영주의 공격을 받지만 제 때 아더왕의 도움을 받지 못해 영토를 빼앗기게 된다. 자신의 성이 불타는
광경을 보고 그 슬픔으로 방왕이 죽은 뒤 호수부인이 나타나 아직 어린 아이였던 랑슬로를 호수로 데리고 가 키운다. 호수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그
모든 서정적이며 초자연적인 분위기 너머 이 이름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랑슬로가 땅을 소유하지 못한, 상속토지가 없는 가난한 기사라는 사실이다.
랑슬로가 호수부인의 보호 하에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 풍요는 영지로 대표되는 물리적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다. 랑슬로의
눈부신 용모와 장미화관의 화사함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는 “한 뼘의 땅도 없는 가난한“35)
기사에 불과하다. 궁정적 사랑이라는 이 낭만적인 주제를 봉건영주들 간의 영토싸움으로 시작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더불어 산문소설은 랑슬로가 가난한 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물, 즉 땅을 갈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랑슬로의 기사서임식 장면은 이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호수부인은 랑슬로를
아더왕에게 데려가 기사로 서임받도록 한다. 기사로 서임하는 자가 신임기사에게 말을 비롯하여 기사로서 갖추어야 할 무장을 하사하는 것이 관행이지만
호수부인은 말을 비롯하여 기사의 무장을 아더왕이 랑슬로에게 하사하는 것을 한사코 거절한다. 그 대신 자신이 준비해간 의복과 무기를 가지고 기사로
서임해 줄 것을 요구한다36). 이 장면은 나중에 ꡔ아더왕의 죽음ꡕ에서 랑슬로가
아더왕과 결별하고 그의 궁정을 떠날 때 “기사가 된 이후 아더왕에게 봉사한 것에 대한 대가로 아더왕 소유의 것은 아무 것도, 박차 하나 조차 가져가지
않겠다”37)고 선언하는 장면과 호응한다. 이것은 크레티엥의 ꡔ수레를 탄 기사ꡕ에서
수레가 상징했던 것과 맥이 닿아있거니와, 산문소설은 명예의 포기라는 추상적 개념을 사용하는 대신에 보다 구체적으로 물질적 보상에 대한 랑슬로의
무관심을 부각시킨다.
영토에 대한 이러한 무사무욕은 ꡔ산문 랑슬로ꡕ,
그리고 ꡔ아더왕의 죽음ꡕ에서 랑슬로가 구현하는 궁정적 사랑의 핵심적 요소가 되거니와, 궁정적 사랑은 바로 봉토 대신 왕비를 선택하는 것임을 작가는
갈르오의 입을 빌어 전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왕비는 랑슬로가 세상을 모두 지배한다고 해도 원치 않았을 것인데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면서 랑슬로가
그녀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지금처럼 랑슬로를 차지할 수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38)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갈르오가 자신이 소유한 영토의 절반을 주고자 했을 때 랑슬로는 “왕비께서 나를, 그리고 내가 왕비를 포기하도록 하는
명예나 재물을 얻기보다는 지금 그대로 있고 싶습니다”39)라고 말하며 갈르오의
제안을 거절한다. 일찍이 귀족여성이 땅의 환유이기도 했다면 ꡔ수레를 탄 기사ꡕ에서는 여성과 땅이 별개의 가치로 인식되며 ꡔ산문 랑슬로ꡕ에 이르면
이제 그 둘은 명백히 분리되어 대체관계에 놓인다. 산문소설의 작가는 랑슬로가 아더왕의 봉신이 아니며 그가 아더왕에게 신종선서를 하지 않은 것은
랑슬로가 왕비의 뜻을 받아들인 결과임을 명시한다.
"Je ne peux apporter à personne mon hommage
et ma foi, sans le consentement de madame la reine, car elle me l'a
expressément défendu. Et comment oserai-je faire hommage à autrui, quand elle
ne veut pas même que je le fasse au roi Arthur?" 40)
“왕비께서 동의하시지 않는 한 저는 그 누구에게도 신종선서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왕비께서 그것을 금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왕비께서는 제가 아더왕에게조차 신종선서하는 것을 금지하셨거니와, 제가 어찌 감히 다른 사람에게 신종선서를
하겠습니까?”
궁정적 사랑을 하는 자는 동시에 왕의 봉신이 될 수 없다는 것, 즉 봉토를 매개로 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산문소설이 명백히 제시하는 궁정적 사랑의 의미이다. 기사와 부인의
관계가 봉건적 주종관계를 모방한 것임은 그 동안 누차 강조되어온 사실이지만 우리는 기사와 부인의 이러한 관계가 남자들 간의 주종관계를 배제41)한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궁정적 사랑은 봉토를 수여받아 자신의 영지에 정착하고자
하는 미혼기사의 욕망을 교묘히 우회해가는 것이다. 랑슬로가 그녀의 기사로서 행한 모든 일42)은
그녀가 아더왕의 부인인 이상, 모두 아더왕국을 이롭게 하는 일이다. 기사에게 봉토(혹은 다른 형태의 대가)를 주지 않고서도 왕이 그의 군사적 봉사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주가 희망하는 이상적인 사회적 기제로서 궁정적 사랑이 아니겠는가?
아더왕 마티에르의 표지라고 할 수 있는 ‘원탁’의
모티프 또한 궁정적 사랑이라는 주제에 어울리게 변형되어 오로지 궁정적 사랑을 매개로 한 왕과 기사 관계를 상징하게 된다. 일찍이 ꡔ브뤼트ꡕ에서
이 모티프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원탁은 기사들의 상석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더왕이 만든 것으로 소개되었으나 ꡔ산문 랑슬로ꡕ에서는 그니에브르가
아더왕과 결혼하면서 가지고 온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니에브르는 이 때 단지 원탁 뿐 아니라 그 주위에 둘러앉은 엘리트 기사들을 함께 데려온
것43)으로 되어있는데, 이로서 원탁의 기사라는 아더왕의 인적자원은 그니에브르에게서
비롯된다는, "그녀를 통해 아더왕은 원탁에 대한 권리를 행사한다"44)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원탁의 기사는 아더왕 궁정에 소속됨을 의미하되, 왕비가 매개가 된 왕과 기사의 동반자 관계 compagnonnage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랑슬로가 아더왕과 맺는 유일한 관계가 바로 이 것이다45).
이 원탁의 기사라는 개념이 무봉토가신을 상징한다는 것은 갈르오의 예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다. 랑슬로가 왕비의 간곡한 청으로 원탁의 기사가 되기를 결심하자 갈르오 또한 자신이 “몸과 마음을 바친”46) 랑슬로와 헤어질 수가 없어 같이 원탁의 기사로 남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때 이미 그는 랑슬로와 자신의 관계가 종말을 향해가고 있음을 예감한다. 랑슬로는 가능한 한 왕비의 곁에 머무르고자 할 것이나 “자신은 자신의 영지를
다스릴 임무 때문에 아더왕의 궁정에 남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47)이다. 갈르오의
이 말은 유력한 제후와 원탁의 기사는 실질적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탁의 기사들은 모험을 떠날 때 외에는
아더왕 궁정에 머무르는데, 이는 그들에겐 돌볼 자신의 영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탁의 기사란 가난한 솔거가신에 대한 명예칭호로서 봉토를 대체하는
정신적 보상수단일 뿐이다. 원탁의 기사 대부분이 왕이 아니라 왕의 아들(즉 상속에서 제외된 아들)이라는 점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원탁의 기사가
왕비가 데리고 온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 제도가 왕과 기사 간에 봉토를 매개로 성립하는 주종관계와는 그 성격이 다르며 왕과 왕비의 공고한 유대관계를
전제로 함을 시사한다. 아더왕이 가짜왕비에게 속아 왕비 그니에브르를 저버렸을 때 랑슬로는 기꺼이 원탁을 떠나겠다고 한다. 원탁을 스스로 떠난 기사가
그 전까지 없었던 바, 이 전대미문의 사건 앞에서 아더왕은 랑슬로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Lancelot, bel ami, il est vrai que vous avez fait
pour moi plus que tout autre chevalier et que vous n'avez jamais rien reçu de
moi, si ce n'est l'honneur de la chevalerie. Vous avez si bien illustré ma
maison que vous êtes devenu compagnon de la Table Ronde. Mais vous avez renoncé
à cet honneur par colère et haine contre moi48).
랑슬로, 나의 친구여. 당신은 나를 위해 그 어느 기사보다도 많은 일을 해왔으며 당신은
내게서 기사도라는 명예 외에는 아무 것도 받지 않은 것이 사실이오. 당신은 나의 궁정을 그토록 빛나게 하여 원탁의 기사가 되었소이다. 그런데 당신은
나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이제 그 명예를 저버리려 하는구려.
궁정적 사랑이 누구보다도 영주의 이해를 도모한다는 사실은 그 사랑이 파괴되었을 때, 타격을 입는 자가 기사가 아니라 왕이라는 점을 통해 드러난다. 궁정적 사랑의 종식은
결국 아더왕의 죽음과 그 왕국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랑슬로와 결별한 뒤 아더왕은 내부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데 아더왕이 고올로 원정을 떠나면서
왕비와 왕국의 모든 재물을 맡겼던 모르드레가 왕위와 왕비를 찬탈했기 때문이다. 왕국에 남아있었던 아더왕의 봉신들은 모르드레가 수 차례에 걸쳐 궁정으로
불러 재물을 나눠주자 어떤 적들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설사 그들의 주군인 아더왕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모르드레를 위해 충성을 다해 싸우겠노라고
맹세한다. 봉건사회의 기틀, “토지를 매개로 한 주종관계”가 타락하면서 봉건사회의 상징인 아더왕국의 몰락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궁정적
연인 랑슬로 만이 그 타락의 폐해로부터 왕국을 구할 수 있을진대 아더왕은 궁정적 사랑 즉, “왕비를 매개로 한 동반자관계”를 파괴하여 왕국의 진정한
지지세력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결국 살스버리 전투에서 아더왕 자신을 비롯하여 원탁의 기사 전원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가신의 반란으로 아더왕국이
분열되어 아더왕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칼, 엑스칼리버가 호수에 던져지는 것, 그리고 배를 타고 온 여인들이 아더왕을 그 배에 태워 데려가는 마지막
장면은 희한하게도 산문소설의 맨 처음, 자신의 가신에게 배반당한 랑슬로의 아버지가 성을 잃고 그 슬픔으로 숨을 거둔 뒤 호수부인이 랑슬로를 데려가는
장면과 흡사하지 않은가? 아더왕이 단단한 돌(그것은 땅의 결정체라 할 만한 것이다)에 꽂힌 엑스칼리버를 빼냄으로써 왕위에 오르고 그것을 물에 던짐으로써
그의 시대를 마감하는 것은 땅을 토대로 한 봉건시대의 막이 내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아더왕국이 몰락하면서 기사의 가난함이 갖는 의미는 봉건적 가치체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산문소설이 쓰여질 무렵 궁정적 사랑의 사회적 배경은 처음 그 주제가 등장할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뒤비가 지적하듯이 12세기 말엽에 이미 귀족가문의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영지를 상속받게 된다. 그들은 이제 결혼을 하여
정착할 수 있는 땅을 갖게 된 것이다. 앞서 운문소설에서 사랑을 위하여 땅을 기꺼이 포기하는 궁정적 사랑의 이념이 어쩔 수 없이 독신으로 지내야
하는 이 기사들의 현실을 승화하는 측면이 있었다면 비록 같은 형태를 취한다고 해도 산문소설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산문소설에서 사랑을 위하여 기꺼이 물욕을 포기하는 기사들이 구현하는 것은 이제 무엇일까?
ꡔ아더왕의 죽음ꡕ의 결말에서 랑슬로의 행동이 그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거니와. 아더왕국을 떠나게 된 랑슬로는 자신 소유의 모든 것을 사촌들과 동료기사들에게 나눠준다. 뿐만 아니라 아더왕의 복수에 성공하여
아더왕국이 그의 손에 들어왔을 때 랑슬로는 그것을 뒤로 한 채 숲으로 들어간다.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은자가 되어 종교적 삶을 영위하는 랑슬로의
모습은 랑슬로-그라알 연작을 뒷받침하는 두 정신, 궁정성과 시토 수도회 정신이 만나는 교차점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무소유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궁정적 사랑은 토지재산을 생계수단으로 삼기를 거부하고 가난함을 표방한 시토 정신과 타협이 가능하게 되고 이 점에서 궁정적 연인 랑슬로가 구현하는
세속적 기사도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순결한 그의 아들 갈라아드가 구현하는 천상의 기사도와 중첩되는 것이다. 트리스탕과 이죄의 사랑이 도달한 끝이 정념으로
인한 죽음이었다면 랑슬로는 이렇게 종교적 구원이 확실한 죽음을 맞이한다. 아더왕이 호수에 엑스칼리버를 던지면서 정작 이 칼을 가졌어야 할 사람,
신이 선택했어야 할 자는 랑슬로였다고 한 말은 바로 이러한 측면과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아울러 ꡔ산문 랑슬로ꡕ와 ꡔ아더왕의 죽음ꡕ은 각각
궁정적 사랑과 결혼 사이에서 결혼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궁정적 사랑이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타협할 수 있는 여지를 더욱 넓힌 바 있다. 교황은 그니에브르가
두 차례에 걸쳐 아더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중개자로 나서 파문이라는 위협수단을 가지고 왕으로 하여금 왕비를 다시 취하도록 한다. 왕비 또한
기꺼이 랑슬로 대신 자신을 내쫓은 아더왕에게 돌아가는 것을 택하고 랑슬로는 그러한 왕비의 뜻을 존중하여 번번히 그녀를 왕에게 돌려보낸다. 비록
궁정적 사랑이 결혼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을 기치로 내걸고 그것을 예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정적 사랑은 결혼을 파괴하는데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가짜 그니에브르에게 속아 아더왕이 왕비를 궁정에서 추방했을 때 왕비는 그것을 “그리도 훌륭한 왕 이외의 다른 남자와 동침한 죄가”49)로 받아들이고 랑슬로와의 관계를 자제한다. 왕과 왕비의 관계가 중단되었을 때
왕비와 기사의 궁정적 사랑 또한 소강국면을 맞게 되는 것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이는 결혼을 성사로 간주하는 교회의 입장과 궁정적 사랑이 양립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12세기 중엽 제후들의 이해를 도모한 궁정적 사랑은 13세기에 이르러 또 다른 지배 이데올로기와 조화를 이루며
기꺼이 그것에 종속되어 가는 것이다.
4. 궁정적 결혼으로의 회귀
산문소설의 작가가 이렇게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승리, 그리고 결혼의 승리로 끝맺은 것은 운문소설에 대한 반역이었을까? 크레티엥의 운문소설이 60 여 년 뒤 방대한 산문소설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은 그 테마의 흥미로움과 아울러 작가가 그 테마를 완전히 고갈시키지 않은 까닭이건대 이 소설을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작가의 입장은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 앞서 재결투까지의 일년이라는 유예기간을 통해 궁정적 사랑이 왕국이 평화로운 시기에는 자기파괴적, 나아가 사회파괴적 성격,
즉 트리스탕적 비극을 되풀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언급한 바 있지만 그 유예기간은 작가에게 있어서 궁정적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입장을 표명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랑슬로가 납치된 후 전개되는 운문소설의 후반부는 전반부와 거의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반복적
요소들은 흔히 중세 소설의 한계50)로 지적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크레티엥
소설의 경우, 특히 이 소설에서 반복되는 요소들은 단순반복이 아니라 유사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의미상 거의 대조의 효과를 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에 대한 다시 쓰기가 소설 내부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멜레아강에 의해 랑슬로가 갇힌 뒤 아더왕 궁정은 그리 오래지 않아 랑슬로를 잊어버리고
평상시 생활로 돌아간다. 랑슬로의 존재는 아더왕의 궁정에 또 다른 위협이 등장하지 않는 한 잊혀지게 된다51). 바닷가 외딴 곳의 탑에 갇혀 자신의 운명에 무관심한 궁정의 도움을 절망적으로
기다리는 랑슬로의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수레가 예고한 궁정적 사랑의 대가가 아닐까? 랑슬로가 말을 버리고 수레를 택한 것은 단순히 봉토를 포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궁정에서 배제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왕비는 궁정의 핵일진대 왕비에 대한 사랑으로 스스로 궁정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궁정적
사랑이 원천적인 모순을 안고 있음을 암시한다.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 고뱅이 궁정적인 기사가 아니라고 원망하는 랑슬로의 독백은 바로 궁정적 사랑이
한낱 허상임을 표현한다. 기사가 얻은 것은 결국 왕비와의 일회적 사랑에 지나지 않으며 기사 또한 그 대가로 치르게 된 희생을 감내하지 못하는 것이다.
궁정적 사랑의 예찬론으로 알려진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결론을 흐리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론을 내리되 상당히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은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독자는 작가가 서문의 한 구절을 통해 의도하는 바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는 백작부인, 즉 크레티엥 드 트르와의 후원자인 “마리 드 샹파뉴의 지시가
자신의 작업이나 지혜보다 이 작품에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l52)고 하거니와
이는 소설이 작가 자신의 의도대로 쓰여진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후원자에 대한 단순한 예찬으로 보일 수 있는 이 구절을 통해 기실 이 작품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후기는 그러한 심증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후기에 따르면 소설을 완성한 사람은 크레티엥 드 트르와가 아니라
고드프르와 드 라니이며 그는 랑슬로가 탑에 갇힌 순간부터 크레티엥에 이어, 그의 동의하에 집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탑에 갇힌 다음부터 전개되는
이야기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이야기를 다시 끌어내는 역할, 탑에 갇힌 랑슬로를 구출하는 역할은 독자의 예상을
뒤엎고 왕비가 아닌 전혀 의외의 여성에게 맡겨진다. 바로 작가가 이름도 밝히지 않는 멜레아강의 누이이다. 그녀는 과거의 은혜를 갚기 위해 랑슬로를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그를 구출해낸다. 랑슬로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그녀에게 사랑을 약속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vous pouvez disposer à votre gré
de ma personne, corps et âme
de mes biens et de mes services
vous avez tout fait pour moi que je suis à vous53).
저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제가 소유한 것과 봉사를 모두 받으십시오.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하신 당신께 저를 바치겠습니다.
이는 사랑이 두 사람의 상호적인 베풂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54). 그리고 왕비를 위해 랑슬로가 포기해야 했던 기사의
명예는 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다시 중요시되고 있다. 아더왕의 궁정에서 할 일이 남아있다며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랑슬로에게 그녀가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의 명예와 행복만을 바랄 뿐”55)이라고 대답하며 랑슬로에게
말을 선사하는 장면은 소설 전반부에서 랑슬로가 왕비에게 가기 위해 말을 버려야 했던 것56)과
대조를 이룬다. 말의 희생, 말의 포기는 곧 세속적 명예의 포기에 다름 아니었으니 랑슬로가 말을 왕의 딸에게서 다시 받는 장면은 그가 상실한 명예의
회복을 암시한다. 이 두 사람 관계의 또 다른 특징은 구출한 랑슬로를 마치 아버지 대하듯 돌보는 그녀의 모습에서 단적으로 나타나거니와, 성적인
측면이 배제된 점이다. 다시 말해서 소설 후반부는 전반부에서 이상적으로 구현된 궁정적 사랑의 체계적인 거부이자 그 대안으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57). 산문소설이 궁정적 사랑보다 결혼에 우위를 두었다면 운문소설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산문소설이 거듭 강조한 것처럼 단순히 결혼이 불가해소성을 가진 성사, 그래서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제도이어서 만은 아니다. 크레티엥 드
트르와가 예찬한 것은 궁정적 사랑의 꿈에서 깨어난 랑슬로가 새롭게 멜레아강의 누이와 맺게 된 관계가 제시하는 바, “궁정적 결혼”이다. (물론
랑슬로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지만 멜레아강의 누이는 왕의 딸이 아니던가! 게다가 멜레아강의 죽음으로 고르왕국의 유일한 상속녀가 된 그녀는
모든 기사가 꿈꾸는 이상적인 신부감이 아닐 수 없다.)
궁정적 사랑을 예찬한 작품의 전반부를 후원자의 의도가 지배하고 있다면, 궁정적 사랑이 기사의 허상이며 기사가 그 사랑의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후반부는 크레티엥의 의도를 반영한다.
고드프르아 드 라니는 바로 크레티엥 드 트르와 자신, 그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는데 두 명의 작가가 집필을 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작품에 두 종류의
결론, 즉 궁정적 사랑에 대한 예찬과 아울러 비판을 담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로써 궁정적 사랑이라는 주제가 정략결혼의 희생자인 귀족여인과
독신기사의 이해를 절묘하게 조합한, 그 두 집단의 욕망에 호응하는 것이라는 시각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궁정적 사랑은 그 욕망을 교묘히 이용,
오히려 영주의 이해를 도모하며 그러한 본질은 궁정적 사랑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ꡔ수레를 탄 기사ꡕ 내부에서 이미 간파되고, 그 가치가 퇴색되어
버린 것이다. 궁정적 사랑이 트리스탕과 이죄의 비극적 사랑보다 생명력이 일찍 소진되어버린 것도 어쩌면 그것이 이렇게 조작된 감정, 영주계층에 의해
기사들에게 고취된 사랑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Ⅳ. 結
앞에서 우리는 영주부인과 기사의 궁정적 사랑이 중세사회 지배층의 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밝혔다. 영주가 궁정적 사랑의 테마를 묵인 또는 방조할 수 있었던 것은 기사의 봉사를 왕비의
일회적인 사랑 외에 다른 대가 없이, 특히 봉토를 주지 않고도 누릴 수 있다는 측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궁정적 사랑의 이러한 측면은 철저히 땅을
매개로 맺어진 주종관계를 토대로 하는 봉건사회에서 땅을 매개로 하지 않은, 나아가 물질적인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를 구현한다. 12세기의
궁정문화의 정수였던 궁정성의 핵심으로 아낌없이 베푸는 행위, 너그러움 largesse이 첫 번째로 꼽혀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주군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간주되었고 초기 아더왕 문학에서 아더왕은 바로 그 덕목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아더왕 문학에 새로 도입된 궁정적 사랑이라는
주제는 은연중 이 너그러움의 미덕, 물질에 연연해하지 않음을 왕보다도 가신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바꾸어 버린다. 비록 이 주제는 그것이 처음
등장한 작품 내부에서 이미 이의가 제기되고 부분적으로 무효화되기는 하지만, 중세 귀족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계층의 엇갈리는 욕망과 이해관계를 교묘하게
접목시킴으로써 문학 작품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는 모방과 비판, 변형의 대상이 된다. 궁정적 사랑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기사상은 봉신들이
보다 많은 보상을 좇아 수시로 새로운 주종관계를 맺고 따라서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이 부지기수로 늘어남에 따라 본래의 취지가 흐려진 당시 봉건제의
난맥상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이 무렵 급격히 부상한 부르주아 계층과 용병집단에 대한 기사계급의 자기차별화 전략이기도 했으며, 권력의 집중을
꾀하는 왕권에 대한 소리없는 저항이기도 했다.
무봉토 가신들의 이 전설적 사랑은 12세기 삼사분기에
유행되기 시작하여 13세기 일사분기에 ꡔ아더왕의 죽음ꡕ과 더불어 일단 그 막을 내린다. 귀족가문이 차남 이하의 아들들에게도 약간의 영지를 떼어주고
결혼을 시키기 시작하면서 이 독신기사들이 무봉토 가신의 처지를 벗어나게 되고 궁정적 사랑의 주제가 그 청중들에게 더 이상 호소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궁정적 사랑과 함께 절정을 맞이했던 기사도 문학의 생명력 또한 이 주제가 더 이상 새로운 조건에 놓인 독자들에게 전과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하게 되면서 소진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왕비와 독신의 미남 기사와의 낭만적 사랑은 마지막으로 마티에르의 유연성을 발휘하여 새롭게 사회를
지배하게 된 이념과 결합한다. 이 지극히 세속적인 주제가 종교, 그것도 가장 극단적인 시토 수도회 정신과 겹치게 되는 것이다. 13세기부터 시토
수도회를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기 시작한 성모숭배의 문학적 모태가 바로 이 궁정적 사랑, 기사가 귀부인에게 바치는 헌신적이며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수용되고 있는 견해이지만, 우리는 그 둘 사이에 또 하나의 공통점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가난함의 미덕이다. 궁정적
사랑의 본질이었던 무사무욕은 절묘하게 전환되어 더 이상 봉건적인 의미가 아니라 종교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궁정적 사랑이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는 아더왕 문학의 한 특성을 단적으로 볼 수 있거니와, 마티에르의 끊임없는 의미변환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대학교)
◈ 참고문헌
1.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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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세영문학회, 1996, 41-71쪽.
◈ ABSTRACT
Formation and Collapse of Authrian Myth (II): The Case of Courtly
Love
Jeong-Hee Kim
This paper reexamines the social connotations of
"courtly love" which was one of the main themes of Arthurian
romances. As is well known, courtly love refers to a formalized love between a
young knight, excluded from family inheritance, and a married woman who is a
social superior and often the wife of his lord. The existing views on
courtly love have emphasized the educational aspect including improvement of
knightly character and its positive effects not only on the individual but on
the society as a whole. A good example is that of Georges Duby who argued that
courtly love was an invented emotion of the feudal lords who wanted to solidify
the basis of feudal society. This paper takes such claims a step further and
focus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courtly love and the issue of fief,
the basic constituent of medieval society and the primary object of unmarried
knight's aspiration. The knights without inheritance needed a woman and a
piece of land to settle down on. The literary tradition before Chretien de
Troyes always linked land with woman as compensation for military
services. Courtly love, which made its first appearance in Chretien's The
Knight of the Cart, can be said to have caused a rupture in this tradition,
and since then land and woman were no longer unseparable but rather
substitutional. Focusing on the "cart" motif and the nature of
Lancelot's sacrifice, this paper examines the ways the literary ideal of
courtly love ingeniously skirts around the desires of single knights to obtain
a possession of fief and settle down and, in turn, idealizes unselfishness and
generosity.
◈ 국문요약
아더왕 신화의 형성과 해체 (II):
궁정적 사랑을 중심으로
김
정 희
본 논문의 목적은 아더왕 소설의 주요 테마 중의 하나였던 ‘궁정적 사랑’의 사회적
함의를 재검토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궁정적 사랑은 상속에서 제외된 독신의 젊은 기사와 그 보다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기혼 여성, 특히 주군
부인 사이의 정형화된 사랑을 지칭한다. 궁정적 사랑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들은 사랑을 통한 기사의 자질 향상 등 교육적 측면,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개인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궁정적 사랑이 봉건사회조직의 토대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영주계층에 의해
조작된 감정이라는 조르주 뒤비의 견해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궁정적 사랑을 중세 사회의
기본구성 요소이자 독신기사들이 갈망하던 봉토문제와 연계시켰다. 상속에서 배제된 독신 기사들이 원하는 것은 정착할 수 있는 땅과 여자였으며, 크레티엥
드 트르와 이전의 문학적 전통은 기사의 군사적 봉사에 대한 대가로서 땅과 여자를 늘 결부시켜왔다. 크레티엥의 ꡔ수레를 탄 기사ꡕ에서 처음 등장하는
궁정적 사랑은 바로 그러한 전통의 단절을 가지고 왔다고 할 수 있거니와, 땅과 여자는 더 이상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라 대체관계에 놓이게 된다.
본 논문은 ‘수레’의 모티프를 비롯하여 궁정적 사랑을 위해 랑슬로가 감수한 희생의 본질을 집중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궁정적 사랑이라는 문학적 이상이
어떻게 봉토를 받아 자신의 영지에 정착하고자 하는 독신기사의 욕망을 교묘히 우회하고, 무사무욕을 이상화시켜나가는지를 살펴보았다.
* 본 논문은 1999년 학술진흥재단의 보호학문분야 강의지원에 힘입어 작성되었으며 ꡔ불어불문학연구ꡕ
제46집(2001년 여름)에 이미 게재된 바 있음.
* 본 논문은 1999년 학술진흥재단의 보호학문분야 강의지원에 힘입어 작성되었으며 ꡔ불어불문학연구ꡕ
제46집(2001년 여름)에 이미 게재된 바 있음.
1) 김정희, 「아더왕 신화의
형성과 해체 (I) : ꡔ브르타뉴 왕실사ꡕ에서 크레티엥 드 트르와에 이르기까지」, ꡔ중세영문학ꡕ 제4집, 한국중세영문학회, 1996,
41-71쪽.
2) G. Duby,
"A propos de l'amour que l'on dit courtois" dans Mâle Moyen Age,
Paris, Flammarion, 1988, p. 78.
3) 영주부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데 비해 주인공 기사의 아름다운 용모에 대한 묘사가 매우 상세하고 빈번한 점, 다른 불륜관계에서는 사생아가 많이 출생하는 것에
비해 궁정적 연인들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점, 그리고 갈르오와 랑슬로의 관계처럼 동성애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 등을 그 예로
들고 있다. Christiane Marchello-Nizia, "Amour courtois, société masculine et
figures du pouvoir" dans Annales, Novembre-Décembre 1981. pp.
969-982.
4) G. Duby,
"Que sait-on de l'amour en France au XIIe siècle?", dans Mâle
Moyen Age, Paris, Flammarion, 1988, p. 47.
5) G. Duby, 위의 책, pp. 79-81.
6) 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중단된
ꡔ그라알 이야기ꡕ와는 달리 에필로그까지 첨부된 ꡔ수레를 탄 기사ꡕ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미완성 작품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 작품을 멜레아강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어 그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으로 본다면, 이 이야기는 완결성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랑슬로가 멜레아강을 죽인
뒤 성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급작스럽게 이야기가 중단되는 것은 랑슬로가 성 밖 숲 속에서 느닷없이 출현하는, 다소 파격적인 도입부와 짝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랑슬로와 그니에브르의 궁정적 사랑의 시작과 끝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 다른 크레티엥 드 트르와
소설 주인공들이 결혼을 하고 아버지의 영지를 상속받아 더 이상 편력기사로서 효용가치를 갖지 않는 반면, 아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는
랑슬로는 계속 모험담 주인공으로서의 역량을 지니는 것이다.
7) 궁정적 이상은 12세기에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것은 사회적 현상이자 동시에 문학적 현상이었다. 봉건 제2기에 들어서면서 궁정 생활과 여성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예의,
우아함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여성과 사랑의 묘사가 문학 속에서 증가하게 된다. 실제로 여성들은 새로운 이상의 확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그러한 움직임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궁정적 사랑을 여성 예찬으로 인식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접근이다. 여기서 예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무 여자가 아니라 왕이나 영주에 의해 뽑힌 여성에 한정된다.
8) Anita
Guerreau-Jalabert, "Traitement narratif et signification sociale de
l'amour courtois dans le Lancelot de Chrétien de Troyes" dans Amour et
chevalerie dans les romans de Chrétien de Troyes (Actes du colloque de
Troyes 27-29 Mars 1992), Annales littéraires de l'Université de Besançon, no
581. Paris, Belles Lettres, 1995. p. 252.
9) Jean Frappier, "Vues sur les
conceptions courtoises dans les littératures d'oc et d'oïl au XIIe siècle"
dans Cahiers de civilisation médiévale, Janvier-Mars 1959, p. 144.
10) G. Duby, "Les
<<jeunes>> dans la société aristocratique" dans Hommes et
structures du Moyen Age, Paris, Edition de l'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 p. 223.
11) Geoffroy de Monmouth, Histoire
des rois de Bretagne, Paris, Belles Lettres, 1992, p. 222.
12) 조르주 뒤비 (최애리 역), ꡔ중세의 결혼ꡕ, 새물결,
1999, 120쪽.
13) 브라이언 타이어니 / 시드니 페인터 공저(이연규 역), ꡔ서양 중세사ꡕ,
집문당, 1986, 162쪽.
14) Marie de France, "Lanval"
dans Les Lais, Paris, Le Livre de poche, 1990 (Lettres gothiques), p.
135.
15) ꡔ수레를 탄 기사ꡕ이전 소설에서는 왕의 아내, 그니에브르가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녀는 궁정의 잘생긴 기사에게 먼저 접근하여 사랑을 구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서슴치 않고 기사를 모함하는가 하면,
궁정의 기사들은 그녀에게 기본적인 경의를 표하는 것조차 인색하다. 랑슬로의 절대적 사랑에 의해 그니에브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을 만한 여성으로
격상되는 것이다.
16) 조르주 뒤비, 위의 책, 299쪽.
17) Ulrich von Zatzikhoven(translated
by Kenneth G. T. Webster), Lanzelet,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1. 독어로 쓰여진 이 소설은 크레티엥의 소설보다 나중인 1194-1204년 경에 쓰여졌다. 불어로 쓰여졌다는 원전은 비록 전해지지는
않고 있지만 크레티엥 소설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18) 조르주 뒤비, 위의 책 242 쪽. 뒤비는 그것이 이혼의 사유가
되었으나 남편들이 그 사유를 내세우지 못한 것은 자신에게 수치가 되기 때문이었다고 하고 있다. 사실 ꡔ아더왕의 죽음ꡕ에서 아더왕은 랑슬로와 왕비의
관계를 알고 난 다음에도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긴다. 그가 그들의 간통을 처벌하는 것은 그 관계가 궁정에서 공론화된 이후이다.
19) 랑슬로는 폭이 매우 좁아 칼처럼 예리한 다리를 건너기 위해 무장을
포기한다. 맨손, 맨발로 기어가는 모습은 수레가 상징했던 치욕, 사회적 죽음과도 상통한다.
20) Lancelot du Lac (trad. par
François Mosès), Paris, Le Livre de poche, 1991 (Lettres gothiques). p. 701.
21) 위의 책, p .703.
22) 위의 책, p.
757.
23) 봉토를 수여하고 봉신들을
왕권의 기반으로 삼도록 권유하는 이 은자의 말은, 13세기 들어 왕령지가 확대되고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용병들을 고용하는 추세에 대한 중소귀족,
즉 기사들의 반발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13세기 왕권 강화라는 새로운 상황에서의 프랑스왕을 상징)
24) 위의 책, p.
759.
25) 이는 왕령지가 확대되어가고
권력이 중앙집권화되어 가는 추세에 대한 암시일 수도 있다.
26) 위의 책, p. 843.
27) 이 점에서 그는 또 한 명의 궁정적 연인이라 할 수 있거니와 산문소설에서
아더왕은 두 겹의 궁정적 사랑에 의해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갈르오와 아더왕, 고뱅과 왕비가 한 자리에 모여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때 나눈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갈르오가 이 전투에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흑기사를 얻기 위해 각자는 무엇을 제공하겠냐고 묻자, 이에
아더왕은 왕비를 제외하고 자신이 소유한 것의 절반을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중상을 입은 고뱅이 만약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면 예쁜 여자가 되어
세상에서 그가 자신을 가장 사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하자 왕비는 웃으며 이에 동조한다. 사실 여기서 고뱅은 불필요한 인물이되 그의 말은 왕비의
심중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갈르오는 자신의 모든 명예가 치욕으로 변하는 것을 감수하겠다고 말한다.
28) 랑슬로가 잠이 든 후 갈르오가
그의 침대에 몰래 들어가는 장면이나, 랑슬로에게 “몸과 마음을 다 주었다”고 하는 갈르오의 말 등이 그들의 관계에서 동성애적 측면을 보게 하는
증거들이다.
29) 오히려 무훈에 대한 과욕은
원탁의 기사들 간에 서로 상처를 입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나중에 고뱅의 형제들과 랑슬로 집안의 기사들 간의 전쟁으로 원탁이 분열되는 사건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30) 그들의 사랑에 관한 아더왕의
입장은 무척 흥미롭다. 아더왕은 랑슬로와 왕비의 관계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 귀뜸을 받는다. 모르그의 성에서 랑슬로가 직접 그린 그림은 왕비와의
모든 일을 낱낱히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더왕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할 뿐이다.
31) 나중에 왕비가 랑슬로를
냉대한 이유가 바로 그가 수레를 타기 전 잠시 망설인 것 때문이라 함은 보다 즉각적이며 총체적인 포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32) Chrétien de
Troyes, Le Chevalier de la charrette, Paris, Le Livre de poche, 1992
(Lettres gothiques), vv. 335-338.
33) Anita Guerreau-Jalabert, 앞의 책, p.
249.
34) 타이어니/ 페인터, 앞의 책, 162쪽.
35) Lancelot du Lac II, (trad.
par M. L. Chênerie) Paris, Le Livre de poche, 1993, p. 535.
36) 물론 이는 랑슬로로 하여금
전적으로 왕비의 기사가 되도록 하기 위한 복선이기도 하다.
37) 그리하여 그가 처음으로
정복한 성인 기쁨의 요새는 그를 섬겨온 한 기사에게, 그리고 고올의 옛 방왕으로부터 세습된 왕국은 보오르와 리오넬에게, 또 아더왕에게서 받은 고올왕국은
아더왕에게 다시 돌려준다. La Mort du roi Arthur (trad. par M. L. Ollier), Paris, U.
G. E., 1992, p. 204.
38) Lancelot
du Lac III : La fausse Guenièvre (F. Mosès), Paris, Le Livre de poche,
1998, p. 169.
39) 위의 책, p. 171.
40) 위의 책, p. 169.
41) 앞서 쓰여진 ꡔ수레를 탄
기사ꡕ에서도 아더왕과 랑슬로의 관계는 그리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았지만, 산문소설은 이 두 인물의 관계를 최대한 희석시킨다. 산문소설에 등장하는
랑슬로는 아더왕의 봉신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아더왕에 의해 기사로 서임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기사서임식을 위해 아더왕 궁정에 가지만 그곳에서
왕비를 처음 본 순간, 랑슬로는 그녀의 미모에 매혹되어 그녀의 기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기사 서임식의 최종적이며 가장 핵심적인 절차인 칼을 채워주는
의식을 아더왕에게 받지 않고 왕비에게 받도록 일을 꾸미기 때문이다. 기사로 서임받자 마자 랑슬로는 곧 아무도 원치 않는 막중한 임무를 자청하여
아더왕국을 떠나 모험을 거듭하며 떠돌아다니는데 랑슬로에게 패배한 자들은 모두 왕비에게 보내져 그의 공훈을 보고하게 된다.
42) Lancelot
du Lac I (trad. par F. Mosès), Paris, Le Livre de poche, 1991, p. 887.
43) Lancelot du Lac III., p.
217.
44) Lancelot du Lac II, p. 639
45) 랑슬로가 원탁의 기사가
되는 것은 왕비와 같이 밤을 보낸 다음이다. 이것은 호수부인이 왕비에게 가운데 틈이 벌어진 방패를 보냈을 때 이미 예언한 것이기도 하다. 이 방패의
틈 좌우에는 기사와 부인이 그려져 있는데 갈라진 틈이 위에서는 매우 좁지만 아래로 가면서 점점 넓어지는 것은 부인이 기사에게 마음은 기꺼이 허락하였으되
아직 몸을 허락하지 않은 까닭이며 그들이 한 몸이 되는 날, 방패의 갈라진 틈이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아직 아더왕 궁정에
속하지 않은 기사가 아더왕의 가신이 될 때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위의 책, pp. 153-155. 궁정적 사랑이 완성되면서 방패가 완성되는 것,
여기서 궁정적 사랑이 아더왕국을 수호하는 기능을 갖는다는 것을 유추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랑슬로가 아더왕 궁정의 일원이 됨에 따라 아더왕국을
수호하는 역할은 더욱 확실해지고 랑슬로가 궁정의 일원이 되는 것 즉, 그를 궁정에 머무르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왕비에 대한 욕망뿐이다.
46) 위의 책, p. 575.
47) 위의 책, p. 587.
48) Lancelot du Lac III, Paris,
Le Livre de poche, 1993, p. 291.
49) 위의 책, p. 297
50) 소설은 장르가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미 문자를 매개로 하고 있다는 것이 통설이긴 하지만, 수용과정에서는 여전히 음성의 비중이 절대적이었으며 거의 대부분의 소설이
낭독의 형태로 수용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부분적으로 음성 문학적 요소를 가지는 초기 소설에서 이처럼 반복적인 요소들은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51) 그러던 중 아더왕국에서
마상시합이 열린다. 그것은 왕비가 없는 동안 왕국의 귀족처녀들이 결혼할 만한 기사들을 고르기 위해 마련한 기회였다. 마침 왕비가 마상시합이 열리기
전에 로그르 왕국으로 돌아와 이 시합을 참관한다는 소식을 들은 랑슬로는 왕비를 보기 위해 잠시 자유를 얻어 마상시합에 익명으로 참가한다. 전반부에서
아무에게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랑슬로의 정체가 왕비에 의해 밝혀졌던 것처럼 이번에도 왕비만이 랑슬로를 알아본다. 그리고 확인을 하기 위해 일부러
최악의 모습을 보이도록 몰래 주문한다. 랑슬로는 치욕을 기꺼이 감수하지만 수레의 경우와는 달리 그 치욕은 어떠한 보상도 약속하지 않는다. 마상시합이
진정한 전쟁이 아니라 그 모방에 불과한 것처럼, 이 때 랑슬로와 그니에브르의 행동은 궁정적 사랑을 모방한 유희에 불과하다. 왕비는 이기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는데 그칠 뿐, 자신이 책임지는 궁정 처녀들의 결혼이나 납치되어 그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랑슬로의 구출에는 관심이 없다. 이 에피소드는
궁정에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존재하지 않을 때 궁정적 사랑은 사회적으로도 궁정의 건전한 짝짓기, 즉 결혼을 방해하는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합을 참관하기 위해 온 처녀들은 모두 랑슬로와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오로지 왕비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랑슬로는 경기 후 바로 사라지고
처녀들은 결혼을 포기한다. 왕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궁정의 미혼남녀를 결혼시키는 것이되, 오히려 그녀는 이 일을 훼방놓은 셈이 된다.
52) Chrétien de Troyes, 앞의 책, v. 23-24.
53) 위의 책, vv. 6684-6687.
54) 여성은 전처럼 절대적 우위를
갖지 않는데 이를 전반부에서 예고하는 장면이 바로 랑슬로와 멜레아강의 누이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왕비를 구하러 가는 도중에 랑슬로는 어느 거만한
기사와 결투를 하게 되는데 랑슬로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질 무렵 갑자기 나타난 그녀는 거만한 기사의 목을 요구한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황당한 요구일지라도
아가씨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던 그는 처음으로 아가씨의 요구와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기사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는 기사로서의 의무 사이에서
고민한다. 결국 그 어느 쪽에게도 기울지 않고 재결투로서 선택을 대신함으로써 랑슬로는 기사도와 여성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명제 사이에서 평형을
유지한다. 소설 후반부에서 위험에 처하게 된 랑슬로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는 여성은 랑슬로가 기사로서의 명예를 저버리고 무조건 그 변덕스러움에
복종했던 여성들이 아니라 바로 랑슬로가 비교적 이성적인 태도를 보인 여성인 것이다.
55) 위의 책, v. 6699.
56) 랑슬로는 멜레아강과의 싸움에서
두 번이나 그의 말이 죽는 불운을 겪었으며 왕비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해서 스스로 기사 신분을 상징하는 말을 버리고 대신에 죄인이나 타는 수레를
선택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원천적으로 말의 접근을 차단하는 칼날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
또 말은 물론이고 무장까지 기꺼이 버린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상징성을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7)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그것을
매우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마침내 일년이 지나 멜레아강은 아더왕 궁정에 와서 랑슬로와 약속된 결투를 요청하고 때 맞춰 랑슬로가 아더왕 궁정에 도착한다.
소설 도입부와 유사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없이 왕비에 대한 생각에 파묻힌 전반부에서와는 달리, 왕비에 대해 어떠한 사랑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멜레아강과의 마지막 결투에서 랑슬로에게 동기를 제공하는 것은 자신을 감옥에 가둬둔 것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이지 더 이상 왕비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왕비만이 그러한 감정을 품고 랑슬로와 은밀히 재회할 순간을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