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
앞에
서」
- 고 은
무엇 하려 여기 왔는가
잠 못 이룬 밤 지새우고
아침 대동강 강물은
어제였고
오늘이고
또 내일의 푸른 물결이리라
때가 이렇게 오고 있다
변화의 때가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길로 오고 있다
변화야말로 진리이다
무엇 하러 여기 강물 앞에 와 있는가
울음같이 떨리는 몸 하나로 서서
저 건너 동평양 문수릿벌을 바라본다
그래야 한다
갈라진 두 민족이
뼛속까지 하나의 삶이 되면
나는 더 이상 민족을 노래하지 않으리라
더 이상 민족을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그런 것 깡그리 잊어버리고 아득히 구천을 떠돌리라
그때까지는
그때까지는
나 흉흉한 거지가 되어도 뭣이 되어서도
어쩔 수 없이 민족의 기호이다
그때까지는
시퍼렇게 살아날 민족의 엄연한 씨앗이리라
오늘 아침 평양 대동강 가에 있다
옛 시인 강물을 이별의 눈물로 노래했건만
오늘 나는 강 건너 바라보며
두고 온 한강의 날들을 오롯이 생각한다
서해 난바다 거기
전혀 다른 하나의 바닷물이 되는
두 강물의 힘찬 만남을 생각한다
해가 솟아오른다
찢어진 두 동강 땅의 밤 헤치고
신새벽 어둠 뚫고
동트는 아픔이었다
이윽고 저 건너 불끈 솟아오른
가멸찬 부챗살 햇살 찬란하게 퍼져간다
무엇 하러 여기 와 있는가
지난 세월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왔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념이었고
서로 다른 노래부르며
나뉘어졌고 싸웠다
그 시절 증오 속에서 5백만의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그 시절 강산의 모든 곳 초토였고
여기저기 도시들은 폐허가 되어
한밤중 귀뚜라미 소리가 천지하고 있었다
싸우던 전선이 그대로 피범벅 휴전선이었다
총구멍 맞댄 철책은 서로 적과 적으로 담이 되고
울이 되어
그 울안의 하루하루 길들여져 갔다
그리하여 둘이 둘인 줄도 몰랐다
절반인 줄도 몰랐다
둘은 셋으로 넷으로 더 나뉘어지는 줄도 몰라야 했다
아 장벽의 세월 술은 다디달더라
그러나 이대로 시멘트로 굳어버릴 수 없다
이대로 멈춰
시대의 뒷전을 헤맬 수 없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였다
천년 조국
하나의 말로 말하면서
사랑을 말하고 슬픔을 말하였다
하나의 심장이었고
어리석음까지도 하나의 지혜였다
지난 세월 분단 반세기는 골짜기인 것
그 골짜기 메워
하나의 조국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다
무엇 하러 여기 와 있는가
아침 대동강 강물에는
어제가 흘러갔고
오늘이 흘러가고
내일이 흘러가리라
그동안 서로 다른 것 분명할진대
먼저 같은 것 찾아내는 만남이어야 한다
큰 역사 마당 한가운데
작은 다른 것들은 달래는 만남의 정성이어야 한다
얼마나 끊어진 목숨의 허방이었더냐
흩어진 원혼들의 흔적이더냐
무엇 하러 여기 와 있는가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의 민족이란
지난날의 향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온갖 오류
온갖 야만
온갖 치욕을 다 파묻고
전혀 새로 민족의 세상을 우러러보며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은 재통일이 아닌 것
새로운 통일인 것
통일은 이전이 아니라
이후의 눈시린 창조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 하러 여기에 와 있는가
무엇 하러 여기 왔다 돌아가는가
민족에게는 기필코 내일이 있다
아침 대동강 앞에 서서
나와 내 자손 대대의 내일을 바라본다
아 이 만남이야말로
이 만남을 위해 여기까지 온
우리 현대사 백년 최고의 얼굴 아니냐
이제 돌아간다
한 송이 꽃 들고 돌아간다
2000년6월로 기억 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남북 정상회담에 동행하셨던 고 은 시인님께서 만찬석상에서 낭송하신 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