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의 번역과 세계화의 문제

안선재 (테제 공동체 수사, 서강대 영문과 명예교수)

[시와 시문학 71 가을호 2008. 31 - 44]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한국어로 된 한국의 시와 소설을 단순히 단어와 문법에 맞춰 다른 외국어로 바꿔 놓기만 하면 ‘세계화’ 또는 ‘보편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한 편의 문학 작품을 고유하게 ‘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 특징은 한국의 문학 작품을 창작할 때 동원한 언어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그 무엇임을 말하고자 한다. 한국 문학을 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 특징은 오히려 작품이 씌어지고 출판되어 읽히고 수용되는 공간―지리적이고 역사적인 또는 문화적인 공간―에 의해 결정된다.

어느 한 나라에서 창작된 한 편의 문학 작품을 다른 언어로 바꿔 다른 문화 공간에서 출판하는 경우 예외 없이 원래 그 작품이 처해 있던 맥락 및 그곳에서의 명성과 결별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맥락에서 그 작품은 전혀 새로운 독해 및 수용의 과정을 거치게 됨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공적인 전이(轉移)가 이루어지게 되면 번역된 문학 작품은 전이가 이루어진 나라의 문학의 일부가 될 것이다. 한 나라의 문학의 근원적 특성 가운데 어떤 것이 있어 이것이 자신을 ‘수출’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경우, 이는 종종 그 작품이 발원한 문학 공간의 “낯섦”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시인들은 한국인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한국어의 어휘, 문법과 수사, 운율과 문체를 최대한 활용한다. 그들은 한국의 독자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할 것으로 기대되는 상황과 정서를 일깨우도록 의도된 작품들을 생산한다. 거의 예외 없이 한국 현실에 대한 체험이 한국 문학의 주제를 이루며, 통상적으로 그 현실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한국이라는 공간에 위치한다. 작품의 배경이 한국 바깥쪽인 경우에도 화자(話者)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여전히 한국인이다.

어떤 언어로 씌어졌든 하나의 문학 작품이 “완성된 문학 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기 위해서는 글 쓰기를 넘어 복합적인 과정을 거쳐야 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단순히 무언가를 글로 썼다는 사실 때문에 희곡이든 소설이든 시든 창작 과정을 거친 직후의 원(原)텍스트가 ‘문학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작품이 글로 씌어진 다음 출판이 되고 배본이 되어야 하며, 또한 읽히고 수용이 되어야 한다. 출판과 수용의 과정이 없다면 씌어진 글은 잠재적인 “텍스트적 대상”에 불과한 것, 자궁 속의 태아와 유사한 그 무엇일 뿐이다. 이 사실은 어느 나라의 문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대부분의 문학 작품은 무엇보다도 우선 특정한 공간에서 수용되기 위해, 그것도 전국적으로든 또는 국지적으로든 지역적 맥락과 ‘문화’ 안에서 수용되기 위해 창작된다. 영어나 스페인어와 같이 어떤 언어들은 여러 나라 또는 여러 대륙에서 말과 글의 수단이 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언어로 씌어진 문학 작품들은 특정한 문화, 역사, 지리에, 그리고 특정한 국가적 또는 지역적 정체성에 깊게 뿌리를 드리우고 있으며, 이는 언어의 문제보다 한결 더 중요한 것이다. 이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보편성”이라는 것은 문학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살아 있는 문학 작품들은 국가‧민족 공간 고유의 특성에, 장소와 시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한계를 지닌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문학의 번역이나 ‘세계화’가 그처럼 간단치 않은 과업일 수밖에 없음은 바로 이 때문이다.

특정한 국가‧민족 공간은 결코 보편성을 내세울 수 없으며, 그 공간이 체험한 역사도 결코 보편적인 것일 수 없다. 따라서 문학 역시 결코 보편적인 것일 수 없다. 영어가 대부분의 다른 어떤 언어보다 더 많은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영어로 씌어진 문학 작품의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한정된 지역적 특성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아일랜드 작가는 일반적으로 명백히 아일랜드라는 공간 내에서 글을 쓰고 있고, 그런 한에는 영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의 작가와는 선명하게 구분된다. 어느 한 주어진 공간에 맞춰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는 독자가 ‘이것은 우리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다른 공간에 속한 그 밖의 모든 독자들은 ‘이것은 그들의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문학의 경우 이에 연루된 공간은 여타의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한다. 첫째, 20세기 중엽 이후 한반도에서 씌어진 문학 작품들은 지리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전혀 이질적인 두 공간 내에서 생산되고 읽혀 왔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남북한의 문학 사이에는 50년 동안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최근에 들어 교류가 시작되어 일군의 작가들이 만나고, 그들의 문학 가운데 일부를 공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북한의 일반 독자들이 반도의 다른 편 쪽에서 씌어지고 출판된 소설이든 희곡이든 시든 이에 반응할 기회는커녕 읽을 가능성마저 사실상 전무하다. 우리는 더 이상 남한의 문학이 유일한 ‘정통’ 한국 문학이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또는 북한에서 씌어진 것들이 그곳에서 확인되는 아주 다른 상황 때문에 문학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식의 태도도 취하지 않는다. 북한의 문학은 대체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고 아주 다른 상황에서 생산된 것이 사실이긴 하나, 우리는 그 이상 어떤 말을 할 수는 없다.

한국인의 글이 갖는 고유의 특징적 ‘문학 공간’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고자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즉, 20세기 초엽 현대가 시작되기에 앞서 한국인의 문자 문학은 대부분 엘리트에 의해, 그것도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전부가 한문 문학이라고 생각하고 문학 작품을 생산할 때 한국어가 아니라 한문을 사용하던 엘리트에 의해 거의 대부분 생산되고 읽혀 왔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문학 교육을 이루는 것은 한문으로 씌어진 작품에 대한 집중적 탐구, 중국에 위치한 장소들 및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중국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에 대한 집중적 탐구였다. 그 결과 한국인의 삶 체험은 대체로 타자인 중국인의 시각을 통해 전달되고 표현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의 공간과 중국의 공간은 마치 지우고 다시 덧쓴 양피지 사본의 글자들과도 같이 서로 겹쳐지게 되었다. 한국의 역사와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이나 인물에 주의를 환기하거나 이에 대해 설명을 하고자 할 때 ꡔ삼국지ꡕ(三國志)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들을 습관적으로 들먹이는 것이 아마도 이에 대한 명백한 예가 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한문으로 씌어진 한국의 시들은 ꡔ시경ꡕ 및 그 후에 나온 수많은 여타의 중국 시와 공명(共鳴)의 관계에 있는 것들로, 중국의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형태로 존재한다.

한국인들은 보통 그들의 언어 또는 문학을 한국어 또는 한국 문학으로 지칭하지 않고, 국어 또는 국문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마치 해당 국가‧민족을 구체적으로 명시할 필요가 따로 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20세기 전반의 기간 대부분 수십 년 동안 한국인들은 그들의 ‘공적’ 언어가 일본어임을, 그들의 ‘공적’ 문화와 문학이 일본 문화와 일본 문학임을 되풀이해 말하도록 교육받고 강요받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문학 공간을 구성하는 덧씌우기의 상황이 변모하여, 이전의 중국이 하던 역할을 일본이 대체하게 되었다. 이전 조선 시대의 관청 청사들이 사실상 거의 모두 파괴되고, 거의 모든 마을이나 도시의 성곽이 와해되었으며, 몇몇 도시의 명칭이 바뀌고 대부분 사람들에게 창씨개명이 강요되었던 데서 보듯, 그 시절은 철저한 문화적, 지리적 말살과 병행하여 한국 고유의 언어적, 문학적,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말살이 일본에 의해 자행되던 때였다. 1910년 경복궁에 있던 360개 이상의 건물 가운데 단지 12개만이 1945년에 남아 있게 되었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말살 행위는 철저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제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한국인들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한결 더 열린 공간 안에서, 다양한 공간 안에서 삶을 살게 되었고 경계를 넘나들게 되었으며 또한 그런 공간 안에서 글을 쓰게 되었다. 1880년을 기점으로 하여 한국의 공식적 시찰단이 먼저 일본으로, 이어서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한국인들은 곧 일본과 미국 두 나라로 가서 공부하거나 정착해서 삶을 살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학적, 지적, 문화적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몇 십 년의 세월 동안 한반도에 만연한 빈곤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내몰리게 됨으로써 일본은 수백만의 한국인들에게 강요된 망명의 땅 역할을 하게 되었다. 빈곤으로 내몰린 여타의 한국인들 가운데 일부는 설탕 농원에서 일하기 위해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민족적 이산(離散)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던 사람들에게 일본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공간이었다. 즉, 일본은 근대의 공간으로, 그곳에서 그들은 근대적인, 본질적으로 서양적인 세계관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일본에서는 아인슈타인이 와서 강연을 하기도 했고 타고르가 와서 시를 낭송하기도 했으며, 머나먼 곳의 문화가 소유하고 있던 엄청나게 매력적인 수많은 문학 및 철학의 업적들이 일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아울러, 러시아에서 유입된 맑스-레닌적 사상에 담긴 혁명의 불꽃이 이상주의적 형태의 무정부주의와 뒤섞이기도 했다.

임화의 첫 번째 시집 ꡔ현해탄ꡕ(1938)에 수록된 시 가운데 하나인 「海峽의 로맨티시즘」을 보면, 시인은 한국과 일본을 나누는 현해탄이 지니는 상징적 가치를 “日本列島의 긴 그림자를 바라보는” 사람의 “가슴”에 “물결”치는 “로맨티시즘”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에 등장하는 젊은 화자에게 그가 지금 돌아가고 있는 고국인 한국 땅은 어둠과 밤의 장소에 지나지 않으며, 그는 자신의 개화된 이성과 열정으로 고국의 어둠을 밝게 비추겠다는 열의를 간직한 채 고국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다. 현해탄은 “예술, 학문, 움직일 수 없는 진리”를 배운 다음 가로질러 고국으로 돌아가는 ‘나’의 눈에 “희망”의 바다라는 이미지로 비치게 된다. 여기에는 일본이라는 공간에 대한 낭만적이고도 낙관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 하지만 같은 시집에 수록된 「눈물의 海峽」이라는 또 한 편의 시에서 현해탄은 앞선 시에서 보인 낭만적 시각과는 반대되는 시각에서 묘사되는데, 식민 지배를 받는 모든 이들이 겪는 고통의 역사로 인해 현해탄은 “새 運命이 까마귀처럼 소리”치는 바다, 죽음과 눈물로 가득 찬 바다, 운명적인 이별의 바다다. 그리하여 시인은 말한다. “아기야 해협의 밤은 너무나 두려웁다.”

또 다른 공간도 그 시대의 한국인 작가들 및 몽상가들에게 열려 있었다. 북쪽으로는 만주가 또한 몹시도 헐벗은 사람들에게 망명의 땅이 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그와 동시에 일본에 대한 무장 항거가 맹위를 떨치던 곳이기도 했다. 한편, 중국은 전과는 아주 다른 공간이 되었는데, 이제 이곳 역시 젊은 한국인들에게 배움을 통해 새롭고 현대적이며 서양적인 학문에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동시에 중국은 한결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상해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고 또 그 밖의 다른 조직들이 중국에 자리잡게 되는 등, 중국은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민족적 저항을 전개해 나가는 기지가 되었다. 비록 동기는 다양했지만, 이주 및 경계선 넘기의 과정을 거쳐 민족의 이산과 망명의 생활이 여기서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현대 문학에서 첫 번째 서사시로 꼽히는 것은 김동환의 ꡔ국경의 밤ꡕ이다.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가려는 시도를 했던 한국인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고통을 환기하는 이 시에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남편의 소식을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남편의 죽음을 알게 되는 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 고통이 구체화되고 있다. 나라를 상실하고 방황하게 된 망명객들과 이주민들의 이야기는 이용악의 시 세계의 특징을 이루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 이주민들에게 두만강은 그들의 사랑하는 고향인 한반도를 벗어나는 국경이 되고 있으며, 만주의 간도는 개간이 가능한 땅이 있는 곳으로 소개되는 한편, 중국이라 불리는 땅은 반일 유격대 및 임시 망명 정부의 지도자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소개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1945년 한반도에서 일본의 퇴각, 이어서 일부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합의로 인해 일부는 한국인들 사이의 권력 쟁취를 위한 갈등으로 인해 결정된 한국의 정치적‧사회적 공간의 이분화,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온 비극적 전쟁은 한국인의 공간을 극도로 좁히는 데 역할을 한 사건들이었다. 이들 사건의 결과, 1945년 이후에는 중국이나 만주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일뿐만 아니라 남한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일이나 북한에서 남한으로 들어가는 일까지도 전혀 불가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은 한반도의 이념적‧군사적 분단으로 인해 수백만의 사람들이 한국 전쟁 발발 이전 및 전쟁 기간에 남과 북 가운데 어느 한 곳을 택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작가들과 지식인들이 북한이 남한보다 더 나은 창작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북으로 가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이 같은 선택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담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을 뿐이었다.

임화가 바로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1947년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는 전쟁 발발 당시 남침하는 북한군을 따라 서울로 돌아와서 낙동강 지역까지 내려갔다. 그런 다음 유엔군이 참전하여 북한군을 참패시키자 다시금 그는 북한군을 따라 다시 38선을 넘게 되었다. 북한군이 평양을 지나 만주 국경선까지 북쪽으로 퇴각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무렵 그는 전쟁 전에 북을 택해 평양으로 가면서 서울에 남겨 두었던 딸 혜란을 보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당시 19세이던 자신의 딸에게 전하는 시 「너 어느 곳에 있느냐」를 1950년 12월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것은 북한군이 남한 지역에서 쫓겨가면서 몇몇 시인들과 작가들을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강제로 끌고 갔다는 사실일 것이다. 1946년 시에 대한 이념적 검열을 피하기 위해 원산에서 출발하여 남한으로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던 구상은 그 당시 다시금 북한이라는 공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거나 어머니를 다시금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원산을 떠난 후 58년을 더 살았지만 그에게는 북으로 가서 어머니를 만날 기회가 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945년 이후 오늘날까지 남한에서 창작된 문학의 공간은 비무장지대 이남에 위치한 ‘섬’과도 같이 고립된 나라 안으로 한정되고 말았다. 즉, 주로 남북 분단의 결과가 지배하는 문학 작품들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한편으로 3년 동안의 실제 갈등 상황을 일깨우는 문학 작품에서 보듯 전선(戰線)이라는 공간을 차지하는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곤에 찌든 농촌 마을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 서울 지역, 경제 발전이 가난한 노동자들을 중심부에서 그리고 시야에서 더욱더 멀리 쫓아냄에 따라 그들이 살던 자리에 들어선 고층 아파트 단지들 사이의 어느 한 공간을 차지하는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종 문학의 공간은 단독 주택이나 아파트의 실내 및 그 주변 지역으로, 또는 뒤쪽이나 앞쪽에 언덕이 있는 마을 및 근처의 논과 같은 경작지로 한정되게 되었다. 서사적 여행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해도, 이는 단지 서울과 부산 또는 서울과 목포 사이의 기차 여행의 상황을 일깨우는 것뿐이었다.

지리적 공간이 심각하게 한정되어 있음은 한국의 작가들이 단편 소설을 선호하는 데서도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거니와, 길이가 긴 소설이라고 해도 짤막한 단편 소설이 연작의 형태로 구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시인들의 경우, 일제 침략기가 너무도 오랫동안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현재의 고통을 상쇄할 만큼 이상화된 황금 시절―비교적 최근에 경험했던 이상화된 황금 시절―이 존재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황금 시절에 대한 향수를 동원하여 현재의 고통을 잊을 가능성도 존재하기 않게 되었다. 미당 서정주가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수많은 시를 썼지만 한국의 현대 공간 및 그 현실과 거리를 두고 그 대신 ‘신라’로 불리는 멀고 먼 과거에 위치한 가상적 꿈의 세계로 눈을 돌렸던가에 대한 이유를 우리는 부분적으로나마 여기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서정주와는 대조적으로 신경림은 그의 ꡔ농무ꡕ에 수록된 시들을 통해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시집의 앞부분을 장식하는 작품들에서는 어느 한곳에 정착해 살기보다는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뒤쪽에 수록된 작품들에서는 산업 사회에서 주변부로 몰린 이른바 내적 망명자들이라 할 수 있는 가난한 도시 근로자들―의 고통과 상처를 대단히 예민한 감수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ꡔ농무ꡕ에 수록된 수많은 시들은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는 작품들이다. 작품들 안에는 부조리에 대한 강렬한 의식이 존재하며, 사람들이 이치에 맞는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며 전 생애를 보내나 이는 헛된 바람인 것 같다는 느낌이 그의 작품 세계에서 확인되기도 한다. 전통이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찬양 의식은 다만 찬양할 것이 결여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데 바쳐질 뿐이다. 한편, 결연한 행동이나 항거에 대한 준비는 재빨리 투덜거림이나 소동으로 끝나고 만다. 이 시집의 제목이 말하는 농민들의 춤은 술에 취한 사람들의 서투른 비틀거림으로 바뀔 때를 제외하면 지척거림의 상태 이상의 춤다운 춤으로 거의 승화하지 못 한다. 명백히, 그들의 춤은 소박한 농민들이 비교적 가벼운 전원시나 농업시의 형태로 즐길 것이 기대되는 즐겁고 자유로운 환락으로 결코 도약하지 못 한다. 농촌의 매력과 미학적 즐거움을 찾는 독자라면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농촌의 매력과 미학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대신 시인은 1970년대 서울의 교육받은 시 애호가들의 삶과 크게 다를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서울로 이주해 왔기 때문에 그 공간들이 그처럼 완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현실을 서정적 운문시의 주제로 삼으려는 시도를 오랫동안 누구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공간들이 그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분노와 사회적 변화를 유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ꡔ농무ꡕ는 ‘행동주의적’ 시다. 이는 또한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목적의 전쟁 기념비와도 같은 것, 그러니까 잃어버린 세대를 기념하는 추모시에 한결 더 가까운 시다. 이 시집의 마지막 시인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는 잃어버린 그 모든 것에 대한 향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 무엇을 표출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이미 넘겨져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책장(冊張)을 연상케 하는 느낌으로 가득하다. 이 시집 전체가 그러하듯, 이 시는 과거의 한국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경계를 넘어 방황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계 내에서 방황하는 망명객들이다.

김광규의 초기 시 가운데 하나인 「영산」은 동일한 주제를 전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자의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면, 고향 마을은 신비롭고도 상징적인 산, 구름에 가려져 있으나 강력한 힘을 발하면서 존재하는 “영산”의 지배 아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도시로의 망명 생활에서 마을로 되돌아 왔을 때 그 산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산이 존재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오늘날의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도시로 이동한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과거와의 접촉할 기회를 상실한 상태다. 상실과 유배이라는 패턴은 한국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제기한 한 바 있는 ‘문학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돌아가, 그런 공간들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외부인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주 독특한 형태의 침묵을 각각의 공간마다 발전시켜 나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각각의 문화는 고유한 형태의 침묵을 발전시켜 나가는 경향이, 일련의 주제, 체험, 태도, 두려움을 침묵에 맡기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에게 이는 특히 친숙한 주제로, 동양화 화법에서 이끌어 온 여백의 개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동양화에서 먹 또는 물감을 입히지 않은 채 남겨 둔 여백은 먹이나 물감을 입힌 자리만큼이나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어떤 대화에서든 일반적으로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최소한 말로 표현된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문학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독자들은 종종 말로 표현되지 않은 채 암묵적으로 상정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민하게 감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작가와 독자들이 소속해 있는 사회가 함께 나누고 있는 태도와 깨달음을 예민하게 감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되지 않은 것의 저편에, 시가 탄생하는 장소인 시인의 마음 안에 근원적 침묵이 놓여 있다. 그러한 침묵은 시인이 이전에 썼던 다른 모든 시의 속삭임을 통해, 뿐만 아니라 그 시가 창작되는 공간 안에서 들리는 다른 시인들이 썼던 다른 모든 시들의 속삭임을 통해 전달된다. 이와 동시에, 일단 씌어지면 한 편의 시는 해당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기쁨, 희망과 절망에 공명하고 반응하면서, 고유의 문학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거대한 합창에 자신의 목소리를 연결한다. 이 같은 문학 공간의 경계선은 엄청난 것으로 이를 넘기란 매우 어렵다. 전혀 다른 목소리와 체험에 익숙해져 있는, 다른 문학 공간에서 온 독자라면, 그는 언어나 몸짓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낯선 땅을 찾은 방문객이 그런 언어나 몸짓 앞에서 당황하듯 마주친 문학 작품을 어떻게 읽고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당황할 것이다. 이야기되지 않은 것과 내적 침묵, 속삭임과 울음, 기쁨과 고통, 시의 내적 본질을 구성하는 이 모든 것들은 번역이 불가능한 언어를 구성하는 요인들이다. 자명한 사실이지만, 번역이 불가능함은 그와 같은 요인들이 다른 문학 공간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을 시작하며 필자가 말한 바와 같이, 한국의 시는 그것이 씌어진 언어가 한국어라는 사실 때문에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시가 발원한 곳이 한국이라는 문학 공간이기 때문이며, 시가 탄생한 곳을 휩싸고 있는 침묵이 한국적인 것이기 때문이고, 시에 일깨우고 의미를 확인케 한 삶 체험이 한국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권에서 씌어진 시를 단순히 어휘에 맞춰 축어적으로 번역하는 경우, 이는 외국의 독자들을 당황케 할 것이다. 그들은 시가 그들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기에 그 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듣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로 이제까지 필자가 논의하고 있는 상호 이해가 불가능한 문학 공간이라는 문제의 핵심이 놓인다. 여기에 또한 시가 번역 불가능한 이유가 놓인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이국적인 새로움을 찾아서도 아니고 순간의 즐거움이나 매혹적인 여흥을 위해서도 아니라, 한국의 최근 역사에 친숙한 상태에서, 작품에 표현된 인간의 삶에 대한 한국인 고유의 시선을 발견하려는 의도에서, 한국의 시를 읽는 방법을 익혀 온 비한국인 독자들은 곧 시의 관심사를 이루는 인간에 대한 사랑 및 작가의 인도적 감수성을 파악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적어도 그런 한에는 이 같은 독자들은 세련된 상상력과 인간적 공감의 힘에 의지하여 한국인의 시적 공간에 들어갈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인류가 모여 이룬 하나의 가족을 구성하는 일원이라는 확신 아래, 그들은 지난 120여 년 동안 또는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한국의 역사를 수(繡)놓은 아픔이 시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기 어려운 것들을 표현하는 방법을 빈번하게 탐구하는 시를 탄생하게 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이해하고자 할 것이다.

한국의 시를 아무리 훌륭하게 번역한다고 하더라도, 비한국인들은 한국인 독자들이 한국의 시에 반응하는 것과 동일한 정도로 즉각적이고도 강렬하게 반응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고, 이를 그들에게 기대해서도 안 될 것이다. 비한국인들은 한국인들 특유의 ‘우리’라는 느낌―한국의 시인들이 시에서 일깨우는 공간, 인물, 사건, 감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한국인들만의 마음―을 공유할 수는 없다. 일단 번역이 되면 한국의 문학 작품은 항상 여타의 다른 민족적‧문화적 공간에서, 원래 씌어진 곳에서 작품이 다루어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품의 질과 흥미와 관련하여 전혀 다른 기준에 의거하여, 읽혀지고 수용될 것이다. 정확하게 일치하는 문제가 역의 상황에서도 존재한다. 오늘날의 영국이나 미국의 시인들이나 작가들은 대부분의 경우 한국에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그들의 작품은 일반적인 한국인 독자들의 감성에 극도로 모호하고 호소력이 없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에, 또한 강렬하게 ‘낯설기’ 때문에 번역이 되지도 않고 출판이 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다른 대륙에서 씌어진 문학 작품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영어권 세계에서 출판되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출판인들은 수요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답답한 고립주의가 수많은 영어권 사회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들의 주장은 옳은 것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사람들 가운데 자기 나라의 친숙한 문학적 풍경 그 너머로 눈을 주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상황이 변하기 전에는 번역된 한국 문학은 대부분 ‘그들의’ 문학으로 취급될 것이다. 우리가 훌륭한 번역을 위해 제 아무리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번역 작품들은 그들에게 쉽게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난파한 배의 선원들이 쓴 구조 편지를 담고 있는 병처럼, 우리는 우리의 한국 시 번역물들을 파도 위로 떠돌아다니도록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어쩌다 아주 먼 곳에서 누군가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진실한가”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언어로 한 편의 시가 말을 하고 있음을, 살아 있는 목소리가 되어 사람들의 귀에 울리고 있음을, 이해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번역가들이 희망하는 보상이란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 장경렬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