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X.茶의 내일을 위하여 우리는 현재 살림살이를 영위해 나가는
嚴然한 현실에 살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이 이미
지금까지 선인들의 한국인 고유의 귀중한 독특한 규범에서 이루어진 모든 범절을 정통으로 이어
받았으니, 다른
겨례와 비추어 보아 더 나은 것이라든지 특색을 가지고 있다든지 옳고 좋은 예절—즉 우리만이 지니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자 주적인 문화민족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우리 겨레
자체만이 용납될 수 있다거나 아집에 사로잡힌 曲見이어서는 몹쓸 것이니 편견이나 사심에
치우치는 그리하여 남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음도 생각하여 볼 때, 우
리의 것을 아는 것과 나란히 똑 같은 처지에서 납을 알이이하지
거기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노력과 경이를 가져 경건한 태도를 공정성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충분히 과거에 생활을
영위하였던 先人들이 살림살이 하여 온 예속과 규모를 알어야 하며,
거기에서 이루어진 規短나
예법을 외람스럽게 낮게 여겨버리거나 부셔버리는 일을 하여 不忠이 되거나 不孝스러운 不肖의 후손이
될 것을 가장 두려워하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들은
정당 하고 정통적인 文化의 상속받은 嫡子임을 자처하는 바이다. 비록 이와 같은 사명감 내지 책암감을
이어받은 우리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어제까지 행
해졌던 범절에서 자처하고 싶거나 그 범절 이외의 것은 일 보라도 더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고루한 생각에 잡혀 있어서는 안 될 것으로 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지금까지의
그것은 어디까지나 眞善眞美의 극에 그쳐야 하며,
항상 어떤 한 생각에
매이지 않고 냉정이 오늘을 생각하여 보아야 할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들은 놀라운 先人들의 遺訓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선인들의 유지를 높게 이어받기 위해서는 그
분들이 뜻하고 힘써 왔던 같은 뜻을 이어받아 그와 같은 뜻과 정신의 後繼者로서 또 정당한
接班者로서 당면한 세계사적 광장에서 한국인 본유의 의무감과
사명감이 없을 수 없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제에서 오늘까지 “우리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것보다는 이로부터 다가오는 미래― 剋
實히
말하여 내일이 있다는 것,
그 내일에 있을 우리들 後人들에게 미리 일러 주어야 하며 또한 기어코
일러 주고 싶은 심정이 간절히 들기 때문이다.
특히 지나날 그 본뜻에 빗나가기도 하였던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서도,
여기 ‘茶의
내일’을 적게 된 것이다. 차생활을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의 참된 살림살이를 하는 주변을 살펴보아 몇 가지 들
것 같으면 우선 거처하는 곳-주택일 것이다.
그리고 입성, 服裝生活에 관한
것과 食生活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일상생활의 우리들 기호에
관한갖가지 취미 있는 분야등이 널려 있다. 이 기호에 있어서도 주택이나 의복, 음
식물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기호라고 표시한 것은 위의
세 가지 이외에 일상주변에 따르는 일이리라. 즉 주위를
장엄하는 花升 글씨, 그림, 그릇 등에서 직접 간접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우리의 생활 가운대에 한몫을 하고
있으므로
茶生活과 더불어 긴밀히 연관되는 거기에 대한 몇 마디를 하고자 하는 바이다. 1. 建物 우리가 차생활을 주로 하는 茶室을
가지고 있음을 지금도 다른 민족에게 자랑할수 있으니,
차취미의 격조 높은 건물이라고
지적되는것은전역에 건립되어 있는, 수많은 亭子나 樓豪며
모모 선생이 거처하였다는 占齋, 그리고 재실(齋室) 등과 같이 유서 깊고 매우
古雅한
절간의 僧舍, 僧房 혹은 庵堂 등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멋도 있고
아담스럽기도 하여 좋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이것에
붙들려 이 이외에 더 아담할 수 있고 또 아름답거나 조용해 보일 수 있는 건물이
자연을 멀리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은 경계하여야할 것이니, 우
리는 오늘과 함께 내일에 있어야 할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보고,
그것보다 더 크게 더 너르게 때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 적거나 할지라도
아무 불편함 없이 차생활을 해나갈수 있어야하 므로
건물 다시 말해서 차를 행하는 곳은 과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겠다. 이와 같은 見地에서 보다 낫게 행하기
위해서는 규범 없는 난립이나 조작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근원적인 美의
復元이어야 하며 復活이어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멋없는, 무의미한 조작이라는
것은 造作이 되고 만다. 이런
의미의 창작 보다는 건실한 中興이라는 말이 더욱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善意의 中興’이라는 것은 새로
이루어진 창작 보다도 더 어렵다는 말을 우리들은 傳하여 오는 것이니, 이 말은 위와 같은 것을 두고 한 것만
같기도하다. 2. 衣 지금까지 우리겨레가 입고 있던 의복이
반드시 나은 것이라든지 또는 매우 거추장하여 아무 곳에도 맞지 않는 부적당성을
갖고 있다는 등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 불 여지가 있다 하겠다. 첫째 그 常用하고 있는 의복이 빛깔이
기어이 흰색이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지금까지 白衣民族이라
불리우는 말에 사로잡히어 이 하얀옷을 언제까지나 고수하여 나갈 의무와 책임이 누구에게서 분부 받아
왔다는 말인가. 이 하얀 옷을 깨끗이 입기 위하여
가정의 주부들은 빨래하기에 그 수 발하기에, 꼭 매이어
다른
생업에 힘을 쓰지 못하여도 될 것이라는 말인가. 다시 옷들 가운데 웃옷인 저고리, 적
삼, 두루마기로부터 아래옷인
치마, 바지, 중의 등등의 옷과 그에 따르는 토시, 버
선, 행건, 허
리띠, 댓님, 배자, 조끼 등의 옷을 입고,
현대적인 도시생활, 직장생활에
서 편리성을 볼 수 있을지, 또는 의관에 있어서도
지나간 일이지만 갓이나 탕건, 망건 등은 이미 없어져
간 인상을 남기고
있으나, 이 같은 古事가 전연 무시되고 현재 유행 되는
歐美風의 제도에만 따라야 마땅하다는 단정을 내려 남녀
각기 그들은 양풍에 앞질러 유행의 첨단을 갈 뿐 아니라 그 일생에 한 번 있는 혼례의 경우에도 그
복된 자리에 양풍의 입성으로 서야만 할 것인지. 과연 우리 겨레가 반만년이라는 유구한
역시 가져오면서 더욱 이웃나라에까지 칭송하여 마지 않는 예절을 가장 아름답게
행하여 오는 민족으로 자처하며,
漢民族이 말하는 ‘君子國'의
옷이라 할 우리 겨레가 즐겨 써온 ‘지조 있는 선비’,
‘멋있는 아낙네' 또는
‘새댁’, ‘새아씨'들의 옷인 복건이라든지 청도포, 이
도포에 띠는 홍띠며 한삼이며, 신부가 입는 綠衣紅裝의
웃옷과 치마 등이 얼마나 그 예식에 맞는 점잖고 정중한 것이었던가! 이에 대비하여 양식의 大禮服인
후룩코트나 실크해트나 식전에 입는 웨딩드레스 같은 것과 비교할 때 어느 것이 더 고귀하고
아담한지에 대한 판별은 진정한 산사람의 살림살이를 하는 이에게는 자연 짐작이 갈 것이다. 어떤 것보다도 우리가 지니고 내려온
이 예복만은 좋다고 찬성치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 생활에 있어
피치 못할 재래의 식전에 거행되는 때의 옷은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이 일상 상용하는
옷에 있어서도 여자의 통치마 와 웃옷 등은 현대 행동하기 좋게 개선되어야 하며, 거
기에 따른 경제성 좋은 신을 아울러 착용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우리 국민이 새마을 생활의 실천화를 외치는 이때에
있어 가장 알맞은 국민복이 한시바삐 소개되어야 할것이다.
이런 작은 듯한 개선의 이모저모가 새마을운동과 같은 깊은 정신적인 방면과
함께 다른 나라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이
겨레의 남녀노소를 보게 될 때, 과연 유구한 역사와
그에 이어 받은 특이하고 고아함을 보고 뜻 있는 이로
하여금 우리의 좋은 것을 보고 그들의 나라에까지 파급 전파되지 않으리라고 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볼수록 그
가능성은 충분 하다고 믿어진다. 3. 食 내가 특히 뼈저리게 느꼈던 일 가운데
가장 절실히 생각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우리 민족이
일제의 군국주의적 폭력인 鐵砲와 왜인의 ‘마사무네’ 라는 예리한 칼날 아래에 국권을 잃고,
인간의 가장 존귀스러운
자유를 박탈 당하여 있었을 그 무렵이나 지금 해방된 오늘에 있어, 구미의 사회풍조가 남 북 없이 휩쓸고 있는
이때에 이르기까지 가장 우리 민족이 모자라는 점이 食事를 행하는 때이다. 대부분이 가정에서 그가 식사를 하거나,
또는 많은 사람들과 會食하거나 혹은 외국인과 같이 식탁을 사이에 둘 경우
대체의 몸가 짐새등이 좋지못하다. 그리하여 日帝 時에는 日帝의 하급
병졸 卒吏들에게까지 “조선사람은 밥 먹을 때에 예절이 없이 그냥 밥상 위에 짐승처럼
지저분하게 어질러 놓으며 먹는다”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들에게는 식사에 대한 예절이 행동으로 보여졌으므로 아무 항변도
없이 그 치욕
왔던 것이다.
오늘에 있어서도 구미 사람들의 풍습으로 양식을 먹을 때는 양식에 따르고,
구미식의
연회석상의 에티켓이나 또는 식탁에서 이루어지는 신사풍을 모방 하고 있음은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하루 세끼 때마다
먹는 음식에 다하는 예의가 없단 말 인가.
그냥 밥그릇이다 국그릇이다
여러 반찬을 담은 그릇이며, 밥 국 반찬 등을 그냥
자신의 숟가락이나 젓가락이 닿은, 그리하여 몇 번씩이나
떠먹은 김칫국이나 된장찌개 그리고 먹다 남은 그대로 그냥 남겨두어야 할지 아니 면 몇 번이나
헤엄치듯 한 그
음식을 그냥 버려야할지. 또는 남은 음식을 먹 어야할
경우에 어떻게 깨끗이 위생사의 문제를 생각하여 간수해야
할까히는 문제를 우리 선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저같이 행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결단코 그렇지 않았다. 이보다 훨씬 높고,
현재의 어떠한 교양 높은 문회수준이 월등한 국가나 민족보다도 더욱 더
훌륭하고 아름답게 행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것이다. 그것은 佛敎人인 나로서 편파된 말을
하 근 것이 아닌, 지금 어느 절이든지 그 절의 소위 修行僧이라는 미명을
쓰고 있는 대부분의 승려들이 그들이 말하는 供養時에 행하는 食堂作法을 참관하여 본다면 그 아름답고
깨끗하 고 가장 예절 있는 平等供義올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 행하는 사람의 고귀하거나
천박함을 물어가면서 좋고 궂고 할 것이 아니라,
단지 식사히는 예절이
어느 나라, 어느 민족, 그 누구에게도 그런 정신적인 행사가 있을 것임을
앎과 동시에 우리의 겨레에게도 수천 년동안 지속하여 내려온 식생활의 작법이 있음을 그것으로서
충분한 모범이 되리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차를 하는
사람들의 茶禮에 있어서도 일본에서 성행하고 있는 일본식 차례가 가장 좋은 예식으로 알거나 심지어
우리들이 하고
있는 作法이 일본식을 따른 별 것이 아닌, 우리에게는
별로 없다고 단정 하고 있는 것은 철없고 설멋진 맹탕들의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행사하여 오던 차례의
典型 몇 가지를 들기로 하자.
먼저 앞에서 말한 바
있는 現 佛僧들의 공양하는 행사에 있어, 五觀이나 三級
또는 三輪淸淨 등의 정신과 施者와 受者와 施物에 대한
관심과 이것을 나누어 드리고 받들어 먹는 그 자체가 어떠한 태도로서 그 예절을 취하는 가에 대한
것이 그 예의 하나이다. j五觀 一.
量彼來處 … 먹는 물건의 온 과정을 헤아려 본다. 二.
付己德行… 먹는자기 자신의 한 노릇을 생각한다. 三.
防心離過 · 貧等爲宗(24 24 효당은
施心爲過 食等爲從으로 하였기에 수정한다.) ···마음을
지켜 과담을 여의는 것이 으뜸임을
관한다. 四.
正思良藥 바로 내 몸의 건강을 누려가는 좋은 약, 영양소로 여긴다. 五.
爲成道業 자기가 하여야 할 道業, 다시 말해서 자신의 어버이로부터 또는 국가,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더 나아가서는 세계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주변에서
받은 유형무형 간에 이어 받은 모든 은혜를 갚기
위 함이다. 그리하여 세계인민을 위하여 공을 이루며
복된 일을 행하기 위한사명을성취하기 위함이다. 위의 다섯 가지를 五觀이라고 부르며, 이
五親의 깊은 생각을 ‘밥’이라는 음식을 먹는 동안 깊이 느끼게
된다. 이것을 생각하며 먹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간추려 말한다면 報恩, 感謝의 생각을 철저히
생각하며 실행한다는 뜻이 되리라. k
三緘은 緘口한다는 뜻으로서
밥 먹는 동안 五觀이라는 것을 깊이 새겨 나가는 데에 있어서는 입을 열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말을 안
한다는 것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입을
다문다는 것은 다물 뿐이요, 그 다문 입을 참으로
다물고 봉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옛사람이 말하기를
“三其口學金人”이라는 말이니, 이 뜻은 “입을 다물기를 等像으로 된 부처님 입처럼
하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우리 민족이 연중행사로서
행하고 있는 명절에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차례를 지낸다.
행사하는 동안에 앉고,
서고, 절하며,
그 음식인 祭需物은 어떤 그릇에
담으며, 어떤 순서로 그 제상에 괴어 놓으며,
향을 피우고 헌차를 하면서
제전을 받들어 가는 행사 이것이야말로 차례가 아닌가. 그리고 성년된 남녀가 맺어지는
결혼식전을 거행할 때나 식이 끝난 뒤 신부가 처음 시댁으로 가는 그 무렵의 행사는 이미
차례에서 말하여 둔 것이므로 이에는 줄이는 바이나, 이러한 우리의
전래되고, 풍습으로 행하고 있음을
알이야하겠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행사를 들 수
있으나 너무 번다(須
多)하므로 줄인다.
문제는 지금까지 행하여 온 것이 그 장소로 말하더라도 대청마루나 온돌방
혹은 제실 등에서 행하여 졌다하여 반드시 앞날에도
마루나 온돌방에 앉고 서고 하는 것 이외의 양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겠다. 의자에 앉아 그 앞에 테이불을
두고 오가는 손님들을 접대도 하며, 때로는 독서나
사색도 하거 나글을 쓸 수도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재래식의 물을 끓이는
방법 혹은 음식을 장만하는 데 있어 나무나숯,
연탄등의 연료를써 오던
부엌이나 화로등을 가져 이용해왔 다. 지금은 도시를
비롯하여 향촌 일부에까지 전열이나 가스연료를 이용하여
취사하는 경우를 생각하면서 앞날에 올 다른 열량을 이용하게 될 때에 보다 편리하고 더 멋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여하튼 보다 나은 개변이 있다
할지라도 문제되는 것은 차생활이라는 것은 적절한 창의와 투철한 견해가 바로 서서 어렵지
않게 처신해 나갈 때,
진정한 茶人의 면모가 드러난다 하겠다. 차인이었던 阮堂 김정희 선생이
한말가운데 ‘‘怒氣로서 대를그리고 기쁜 생각으로 난초를 그린다”라고 한 말은 가장 투철한
말일는지도 모르나,
그러나 喜笑怒篤’라는 빛나는 문장만은 못하다고 한 말을 뜻 깊이 새겨두고
음미해야 할 것이다. 4. 花卉 화훼에 있어서는 四季를 자랑하며 그
계절을 알려주는 모든 꽃이나 꽃나무,
이와 더불어 하여야 할
돌까지가 이 부문에 논급될 것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서는 꽃꽂이 같은 花道의 경우도 이에 넣어 말해야 하리라. 이 중에서 매화나무와 대 같은 것을
비롯하여 보통 우리에게 오래부터 불러지는 국화나 난초 같은 지조 높고,
그 특이한 개성을 높이
평가하여 정원에 심기도 혹은 분재로서 관상하기도 한다. 그
리하여 차를 하는 문인들은 그 차의 선적(禪的)
견지에서 앞질러 그들에 대한 독특한 미를 발견하여,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의 광범위한
지경에 널리 나가자면 너무 번다스러우므로,
이에 대한 우리들의 주의를
요하는 점을 말하기로 한다. 꽃은 그 잎시귀와 가지는 물론 그
가지에 근원되는 줄기까지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꽃이라고
불리는 것은 꽃노릇을 하고 제 구실을 하는 그 시간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완당의 말씀을
빌리면 “惡將除去無非草 好取看來總是花”에서 뜻하는 바와 같이 아무리 좋은 꽃 중의 모란이나
함박꽃이라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이 다 피어 떨어지거나
말라붙을 경우와, 국화처럼 서리를 능가하는 절개 있는
꽃이라도 그것이
다피고구실 올 다하여 그 줄기가 마르거나 시들어져 있을 경우에는 이미
미에서부터 추 함으로 전락(轉落)된 것이므로 잡초와 다름없이 우리의
미의 범위 내에서 제거하여야한 다. 아무리 미미하고 곰팡이와 같고 이끼와
같은 풀일지라도 그 정원 바닥에 거칠게 인상 주는 무취미한 황토빛의 드러남 보다는
덮여 있음으로써 말할 수 없는 우아한 느낌을 준다. 이런 경우에는 그
보잘것없는 풀일망정 그 어떤 아름다운 꽃보다도 좋게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지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일러주는가. 이
것은 간단한 것이니 자연스러운 미를 늘상 추구하고 자연스러운 미의
욕구에 해당됨이다. 미는 산란한 것이 아니고 자연
그것이 꽃에 대하여도 적용된다 하겠다. 흩어져 있는
것은 자연의 미가 아니므로 꽃으로서의 제격을 이루고 상우 맞게 된 조화, 그것이
제격인 것을 알고 우리들이생각하고 즐길 수 있는 멋의 경지인 것이다. 이 멋이야말로 차인들이 그 主眼으로
삼고 있는 경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차인들이 꽃을 즐겨하며
차하는 會席에 기어이 그 철에 맞는 生花를 꽂기도 한다.
그리하여 자연의 미를,
큰 조화를 얻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꽃다운 차생활의 경지에 이끌어 들게
하므로 꽃은 그 계절에 따라 문화의 극치를 보고
가는 멋을 찾는 차인에게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그리고 명절의 茶禧 때 꽃으로 주위를
장엄케 하기 위해 꽃을 피우며,
향올 피워 자리를 맑게
한다. 그리고 花信과 같이 맹서하자는 뜻에서 花婚의
禮式을 거행하면서 향촉을 밝히니 이 얼마나 빛나고,
꽃답고, 향기로운 예속이
아닌가! 5. 書 우리 일상주변의 좀 높은 자리라 할까, 일
단 우러러 보아야 할 위치에 글씨가 걸리거나 장식되어진다. 이 글씨에 있어서도 유명한 작가의
것도 있을 수 있고, 또는 일상 잠언같이 수양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액면으로나
말축의 형식으로 표구사 손을 거쳐 작성되어진 것이 일쑤다. 따라서 글씨의 경우에 있어서도 한글인 경우도 있겠으냐
대부분은 오랫동안 漢文字생활을 하여 온 관계로 한자의 경우가 압도적이 다하겠다. 漢文으로 말하면 우리 겨레의 독립된
주관으로 볼 때에는 다른 민족이 삽사천년 동안 계속 연구하며 표기하여 온 것이기는
하나,
지형적으로 여러가지 문화적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온 우리로서는 전연
이민족인 漢人들이 전담하여야 할 성질의 것만은 아니라 하겠다. 그것은 이 漢字를 만들어낸 유력한 한
사람으로 불리는 蒼頡 같은 이는 그대표적 인물이다 東夷즉 우리 나라 고대의 칭호를
韓民族들은 夷라고 불리 웠는데 이 ‘夷’字는 오늘날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아는 것과 같은 ‘덕놈’의
夷자가 아님은,
孔子이전 또는 孔子이후
漢唐에 이르기까지는 ‘夷'자는 ‘仁耆의 뜻으로 ‘군자가
사는 빛나는 나라’의 뜻으로 호칭되었던 것임을『論語』의「子空篇」에서
보면 알 수 있다. 漢文字의 발생 창작의 사적고찰을
말하는 소위 六書 또는 說文을 書學的으로 살펴보면 상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현재 지목되는
근 천여 개 되는 글자를 중심으로,
事物을 指摘하여 만들어진 指事에 속하는 글자가 약 백여 자 가량 된다.
會意로 이루어진
明, 初와 같이 된 글자가 약 칠팔십여 자,
이 와 같이 상형 지사,
회의로 된 것을 다시 轉展하여진 것을 轉注라 한다. 이 전주의 글자를 하나로 예를
들면, 음악의 ‘樂'자 같이 風樂의 경우에는 ‘악’이지만 풍악을 들을
경우에는 快樂을 느낀다는 의미에서 즐거울 ‘낙'자가 된다.
다시 즐거운
것을 보고 듣게 될 때에는 그것이 탐구된다는 것은 마음으 로 조화한다는 뜻으로 ‘요'자로 되는 것처럼 전주된
글자가 수 삼백여 자가 된 다. 다섯째는 聲諧로서 段에서 이루어진
다시 말하면 音이라는 소리를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 글자로 오만 이삼천 자가량 되며
거의 모든 한자를 차지하고(대략八할)있다. 이 이외에 외국에서 들어온 외래어를
아무 뜻 없이 음사하여 만들어진 문자를 假籍文字라고 하며 여섯 번째의 部種에 넣기도
한다. 이 한자로 된 글씨에 있어서도 그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쳐 오면서 표기되었는데 甲骨文字에서 비롯하여 木牌文字와 金石
등에서 표기되어 있는 것 가운데에 전서(篠書)라고 이르는 書體가 있는가 하면,
이 전서를 보좌한다는
의미에서 좌서(左害) 또는 예속적(禮俗的)으로 이루어진 서체를 예서(隸占)라고 부른다. 다시 이 예서에서 精簡시켜진 것을
諾書라 하고, 이
해서를 速記하고자 쓰여진 것이 行書인 것이다. 다시
이것이 超急書體로 된 것이 초서(草書)라 하여 흘려
쓰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한자의 모든 복잡한 부분을
우리 동양 문호인들, 더 나아가서는 茶가 가진 구색을 정비한 이후로는 그
차를 행하는 차인들은 이러한 글씨들을 표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표기로부터 미의 지경에까지
提高시켰으며 승화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占가 곧
그림의 극치를 보고 가는 것이라 하여 완전히 예술적인 심미를 깨답게 되며, 우리들로 하여금 審美의 극치인 조용한 곳으로 마음을 이끌어 간다.
이런 의미에서 차인은 그書의
아름다움올 관조하며 鑑賞하기도 한다. 우리 한글의 경우에는 거의
오백년이라는 시일을 경과하면서, 선인들 중에는 남녀를 막론하고 한글 문학의 시조와 歌諦를
즐겨 썼다. 그리고 그 쓴 것을 한 문자로 된 거와
같이 감상하였으나 지금까지의 수량으로 보아서는 한자로
된 것에 비하여 약一할이 못되는 정도인 것이다. 이 한글 글씨와 문자로 된 문학은
지금까지로 보아서는 하자의 그것에 비 하여 매우 미미한 처지라 하겠으나,
이에 우리의 뜻을 붙여
말한다면 우리 겨레의 큰 병통 되는 버릇인 사대주의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에서 창의적이 며
平易스러운 지경은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예술에 숨어 있음을
생각하고, 그 곳에서 참되고 알찬 예술을 확립시키는 데
노력할 것이 지금부터 이후의 내일을위해 기대된다하겠다. 6. 畵 畵는 글씨와 함께 書畵 혹은 繪畵라고
불리며, 순
수한 우리말로는 그림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그림에 있어서는 최근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油畵 등에 대하여 東洋畵 라고 부른다.
그 진지한 뜻으로 말할
때에는 우리들이 동양화라고 부르고 있는 南畵 文人畵와 사생적으로 실물에 가까운 표현으로 이루어진
北畵의 두 가지 계보가 있다 하겠으며 이 가운데에
서로 인물 화훼 등의 모사를 주로 하는 것이 있으니, 남
화의 경우에는 실물에 가까운 형식적인 모사보다는 그
특징적안 내면을 표출코자 하는데 그 주안올 둔다. 동일
한 산수, 화훼기맹절지,
역모의 경우 사실적인 실감을 주안으로 숭性근화풍을 북종화라고 이른다.
여하튼 이 같은 그림의 유래를
말하자면 중앙아시아의 비단길 혹은 종이길이라는 동서문화의 교통로를 거쳐 오늘날의 유화와
같은 화풍을 錦帛 등에 그려진 채색화가 있는가 하면 다시 그러한 채색에서 탈퇴하여 순 墨色 위주의
墨韻을 중시한 것이 문인화라고도 남종화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동양화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山水畵이다.
이 山水畵는 산과
물을 그리는 것으로서 산에서도 나무, 바위,
산봉우리,
절벽, 골짜기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人家, 樓豪, 虛亭, 石進, 人物, 神仙, 새, 짐승 같은 것과 물에 있어서도
강물의 경우와 폭포인 경우 그냥 냇물인 경우가 있다. 그
냥 강물인
경우에 있어서도 냇가와 같이 川邊의 갈대나 창포 같은풀이 있는가하면 楊柳桃李梅雀寒邪,
거위,
기러기, 해오라기,
갈매기가 있는가 하면 魚舟,
魚翁 외에 돋는 해나 달이 있다. 그리고 山과 들, 강,
바다 사이에 雲霞의 자유 자재한 현상을 운치 있게 그려진 것도 있다. 이러한 그림에 있어서 예술가인 그림
작자로서의 자유자재스러운 사상을 구사하는 데에 六댑I와 六妙로 불리는 원칙이
있다. 妙境의 부문을 말하는 가운데에 廣求怪理와 같이
오직 예술가의 天分에서 이룩될 수 있고,
터득 하여지는 경우가 있다. 이
같은 예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계절에 따라 피는
꽃이 화면에서는 자연스럽게 한데 어울려져 있으니 四季群芳이라는 畵題를 통해 그 그림의 그
경지를볼수 있는 것이다. 이같이 심묘한 관찰은 오직 天眠을
가진 예술 작가가 이루어낸 작품이면 서도 우리들은 그 그림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고요한
곳으로 이끌어 들이며 차의 생활과 같은 심미의 지경에 도달케 된다. 그
러는 동안에 차인들은 가장 현실적인 처지인 과학적 자세에서 현실
그대로를 관찰하며 事物의 正量因果的인 경지에서 물건을 판단한다. 이 같은 판단의 안목을 肉眠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앞에 말한 예술성의 경지를 天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그 그림에서 보여주는
사상 즉 철학적 방면을 인식하는 경우에 그 모든 것의 그 낱낱함이 동등하고 평등한
것으로서,
서로 대단한 조화를 이루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경지를 慧眠의 경지라 말한다.
그 그려진 사물
자체의 평등한 가치에서 一大 큰 조화를 성취하였다는 平等性의 인식이라 고도한다. 이와 같이 하여 이루어진 인식은 그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큰 거울에 모든 현상이 비추어질 때와 같이 여긴다
하여 大圓鏡을 포착한 경지라고 이르는데,
이것은 이 그림 자체가 대원경 그것이 될 경우도 있고 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에 따라 마치 거울에서 여러 현상이 일어남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그들 자신이 대원경 일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경우를 法眼의 경지라고 한다. 그리하여 肉眼,
天眼, 慧眼, 法眼 등의 경지를 그 경우에
따라 모든 방면의 차원에서 각성된 차인의 생활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살려가는 살림살이의 깨친
안목이라 한다. 이를 ‘끼친 눈’ 또는 ‘깨친 사람의
눈’이라 뜻으로 佛眼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의
뜻은
차를 마시며 각성의 생활을 하는 살림살이의 눈으로는 그 어느 지경에 있어서도 때와 사물에 대해서
그 합당한 지경을 잘 판단하고 그 모든 것을 달관할
수 있다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달 관할 수 있으므로
차인에게는 그림이 필요로 되며, 이 그림을 보는 것과
그 리는 경지를 ‘畵禪一致’라고도 하며 차와 화가 일치되었다는 의미에서 ‘茶畵三昧’라고도 이르던
것이다. 그리고 그림을 말히는 대목에서 우리
한국사람으로서 하나 크게 주의하여 말하고 싶다.
佛敎에서 ‘曼茶羅’라고
불리워지는 부문은 그림과 조각 내지 탑과 같은 건조물에 나아가서 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이 만다라의 객관적이
현상을 자연 그대로 그리고자 하는 방면을 ‘胎藏界曼茶陀羅’라고 부른다. 작가 자신―즉 그리고자 하는 지경
그 자체를 증득한 작가 자신의 自內證을 그려낸 것은 ‘金剛界曼茶羅’라고 이르는데, 이것은 佛敎의 大宗을 자
처히는 비밀불교 (密敎)에서 크게 주장히는 것이다. 이 금 · 태 兩藏올 처음으로 창안하여 성취시킨
분이 신라시대의 玄超라는 위대한 스님이었다.
이 스님이 唐代에 유명한 惠果의 스님이며 一行의 스님이기도 한 것이다.
이 혜과스님은
금 ·
태 兩藏의 만다라로서 그 일생을 마쳤던 密敎의 대행자로서 이 큰 행자를 이은 이가
日本의 불교에 있어 제 일인자라고 칭할 수 있는 弘法大師라 하겠다. 이
弘法大師 空海는 이 밀교 를 전파하는데 있어 현초스님이 창안한
금태 양장 만다라를 가져 日本에 종교적인 불교문화를 선전하는 동시에 이로 인하여 일본 美術의
表像되는 큰 영향력을 주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현초의
영향력을 받았는지 혹은 이 스님이 칭안한 것과 같은 공통된 예술의 경지를 고구려인
담징(曇徵)이나 신라의 솔거(率居)도 터득된 분인지는 알수 없으나
여하튼솔거나 담징 역시 동일한 우리의 선인들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예술적인 특이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강토가 가지고 있는 산수 모두가 자연 그대로 그림의 경지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山紫水明’ 글자 그대로
아름답고 멋진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동서남의 해안 자체에서 발견되는 대자연의 풍치야말로
그와 같은 천분을 지닌 민족을 길러 낼 수도 있었고 이러한 彊域에서 환경에서 자라난 先人들이
예술성을 아무런 걸림 없이 그대로 發閩시켰던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대사건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해서 짜임새 있는 상우가
이루어진 곳에서 제작이 맞고 제격을 얻어 본우리 겨레 고유의 자생활이 영위(營爲)된 것도과히 이유 없지 않다
하겠다. 이러한 기경을 그려 얻을 수 있고 이 같은
대자연을 익혀
본 사람들로서는 그 묘사력과 안목이 서쪽 대륙에 들어서는 漢人들로 하여금 남종화에 큰 영향력을
주었으며, 이 남종화의 작가는 우리 先人들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나라를 보고 싶어 하고 우리의 산수를 기어이 보아야 하겠다는 열망을 갖 게 되었다.
그러한 말 가운데에 ‘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이라고 하였고, 그들이 보고 싶어 하여도
도저히 볼 수 없던 ‘江山無盡圖' 같은 것은 閑麗水道
에서 넉넉히 볼 수 있으니,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은 대자연의 풍경을 발견할 수는 없으리라! 이렇게 역사적으로 동양화의 발전
과정을 볼 때에 동양회 근 적어도 山水畵에 관히는 限 ‘高麗畵’라고 호칭하여야 할
것임을 특히 주장하는 바이다.
비록 漢土에서 난 뛰어난 예술가
王維라는 사람을 들어 말하면서 이 王維를 初祖로 삼는 南宋畵라는 것은 실은 楊子江
이남의 광막한 평야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거기에서 어찌 산이나 섬 등을 쉽게 볼 수 있었겠는가. 실제로 보지도 않고 단지
작가의 構想에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작가의 내면에 있어 허구와 망상적인 생각을 뿐이니,
실제로 실감을
하지 못한 사람으로는 확신 있는 참된 그림을 그렸다는 자신을 못가지게 된다. 이러한 작가들에게 실지의 확신과
신념을 갖게 하고 그 예술적인 지경으로 이끌어 들인 것은 적어도 왕유 이전 시대에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의 문화에서 얻어졌던 것임은 상상하고 남음이
있다 하겠다. 그가운데에서도 특히 중국의 기나긴
역사를 통하여 가장 문화가 모든 방면에서 꽃피우던 시기의 하나였던 송나라 徽宗 때
高麗國人인 李寧이 그린禮成江圖'는 지극한 심미안의 소유자로 알려지는 휘종의 아끼는 바가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어려운 국난에
처하다가 몽고족이 세운 元나라에 정치적인 간섭은 계속 받아 오면서도 문화적인 예술의 분야에서는
독자적이고 독 특한우리 겨레만이 이룰수 있는솜씨를계속지녀간점은그냥설풋
넘어 갈 성질의 것은 아닌 것이다. 아무튼 우리 겨레가 가져온 차생활의
깨친 살림살이는 이러한 유구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오늘 우리 茶人이 그림을
보면서 즐기는 것과 같이 來日의 茶人들은 더욱 더 이와 같은 그림에 있어서도 창의와 창작의 끊임 없는
天票의 발휘가 있을 것임을 믿는 바이다. 7. 그릇 來日 의 茶에 있어 그릇을 말한다. 여
기에서 그릇이라고 말하는 것은 차살림에 쓰이는 茶溶이다.
이 차기에 종류에 있어서도 화병 화분 향로를 들 수 있으며 더 직접적인
것은 茶 또는 찻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게 될 때 宋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宋窟를 비롯하여 明窟,
淸窟 등이 있는가 하면
동쪽나라 日本에서 造作된 京黨를 비롯하여 각 시대 를 거쳐 만들어진 樂憲 등과같은차그릇도 있다. 그런데 이 차완에 관한 세계인은 우리
高麗窟로 된 고려차완을 가장 높 이 주시하여 우러러 보며,
여러 나라 사람들의 차회에
있어서도 이 고려요의 명칭이 붙은 차완이 아니면 그 참된 차회의 盛況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까지
말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보통 부르는
고려차완이라는 것은 其實은 고려시대에 이루어진 고려청자의 차완은 아니다.
그것은 王朝朝鮮 시대에
들어 이름 없고 지식 없는 계급이 가장 밑바닥 가는, 그
리하여 그 시대에는 거의 下賤視 되던 이들이 불운한
사회적 처우 아래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 만들어지는 그대로의 작품인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이 놀랍게도
차완으로 이용되고 차완의 이용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순수한 최고 絶妙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은 不可思議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숭고 無邪한 純情 의器皿은 그 미를 발견 할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 숭고한 미를 日本 차인들이 發見한
것을 독특하고 뛰어나는 審美眠的인 안목의 소유자가 그들 자신들인양 자처하고 나서는 것은 우리
한국의 차인으로 보아서는 다소간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미 신라시대에 이루어졌으며
또 百濟나 高句麗에서 이루어진 그릇 가운데도 그와 같은 美가 없었다는 말인가? 모든 制度를 唐代의 그것으로 즐거이
받아들이고 당나라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던 統一 新羅의 作品인 塔이나 佛像 그 외의
모돈 石物 등에 있어서 唐나라 工藝家의 모방을 하였다는 말인가? 도저히 긍정되지 못할 노릇이다. 당
나라의 불상이나 탑을 비롯하여 당대의 그릇 같은 것이 우리 신라의
그것과는 판이하고 아무리 동일한 처지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어도 누구 나가 우리나라의 작품을 우러러
보게 되며 그작품 앞에 머리를 저절로 숙이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거의 부서져 없어질 정도인
안압지라는 신라의 옛 궁전 안의 정원을 바리볼 때에 이것은 낮잡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놀라움을 받게 되니 그造景의 美가 有限된 면적에서 헤아릴 수 없는 廣大無邊함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겨레는 超絶無比한 천진의
天性에서 만들어내는 작품을 이룩할수가 있었다.
이룩하는 그 사람 자체에서
볼때에 美나酸의 대립적인 관념을 念頭에 떠난 인간성의 본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겸하여 우리 겨레의 천성적인
久遠實性의 不器와도 직결된 것이라하겠다. 이와 같이 茶具의 순수한 미에 살아온
지난날의 차에서 지금까지의 차인생활이 있었던 것을 “한국은 그 위대한 茶文化가
王朝朝鮮에 와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고 개탄한 日本人 歷史家인 三品彰英 박사의 말과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네들이 잘못 안 것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 차인들은,
그들이 우리 선인들의 작품에서 멋을 발견하고 그 美에 놀라는 것처럼
히는· 그 사람들의 호의에 대해서는 한 경의와 인정은
갈 수있어도 그들의 본뜻을 높이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曲見의 원인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깊이 우리 차인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원인은 우리 겨레가
여러 번이나 반복하여 다소간 많은 시간이라고 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가져온 애꽃은 현상인
것이라 하겠다.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 겨레 가운데에
정치적 또는 시대적 각광을 받았다고 자처하면서 그들의 권위를 가져 철모르게도 자기상실을
하면서도 그것도 모르고 남을 의뢰하였음은 예나 이제나 다를 것이 없다 하겠다. 권
세 있다고 보는 남의 나라에 아부하고 그 나라의 이싱야릇한 것에
정신을 혼란케 하며 그에 엎드려서 외세를 빌려 자국내(自
國內)의 문물을
업신여기며 순수한 사람들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들까지에도 그들 만이
이 위에서 있어야 한다는 지위와 권위를 자부한
실로망국적인 의식이 내외에 나타낸 소치라 하겠다. 이러
한 철없는 행동이 결국은 자기 겨레 자신이 가지고 온
천진성을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바깥으로는 외국에 있는 양심 가진 인사들에게까지도 이 같은 착각을
일으켜 놓은 것이라 하겠다. 그리 하여 일부 식자층에의
그릇된 自國觀과 그러한 이들과의 교유로 마치 이 겨레의 모든 것을 알아버린 듯이 여긴 외국인의
물정 모른
어두움에 거의 우리 겨레 人人쿠두 모른 듯이 지녀온 것이나 그러나 끊임없이 아끼며 즐겨왔고
이루어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부터 내일을 바라보는
차생활은 이러한 과거의 業障이라 할까 罪障을 철저히 청산하여야겠다.
동시에 모든 대중의 深層밑바닥에
깊이깊이 뿌리박아야 될 것이다. 그리고 이 純粹한 천진을 더욱
키워가며 가꾸고 기루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찻종 같은 조그만 일개 기명(器
皿)에서도 찾아내어야할 美의
극치를 기뻐히는 동시에 더 나아가서는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 널려 있는 책상, 벼루집, 연적할 것 없이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순수한 고유미의 천진스러 움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순수하고 천진스러운 물건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데 적극
노력하여야 하겠다. 이것이 내일을 바라보는 차살림의
한일거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제까지 전하여 오는
천진성을 가진 순박미의 기명에 있어서는 그 보관과 간수를 잘 하여야 할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더불어 일상 부리면서 그 그릇에 대한 취급의 성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물건을 잘
간직하면서 앞으로 만날 천진스럽고 순수한 도구를 가치 있게 만들면 그 만든 것을 잘
가져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더욱 더 그 살림이 불어나갈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