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I.한국의 차인들 1. 신라시대 -薛聰
선생을 중심하여- 그 이전의 茶人에 대한 說話와 그
후에 있어 茶행사에 대한 것을 간략히 기술하기로 한다.
설총 선생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元曉스님의 아들로서 우리 나리에 있어 孔子를 중심으로 하는 儒學에 대하여는 처음 가는
名賢이니, 그를 존칭하여 弘儒候라고 불리는 분이다. 그 분이 아직 삼십대 남짓한 시절에
실라는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통일한 太宗 武烈王의 위를 文武王이 이어받아 큰 공적을
남겼으며,
다음 王位는 神文王 (681~691)(*7)에게 繼承되었다. (*7 神文王:
신라 제31대왕.
‘韓國의 茶道’에서는 재위기간을 681년에서 691년으로
표기하였으나 다른 역사서에서는 神文王의 재위기간을 681년
에서 692년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한해 여름 장마철이었던 어느 날
궁중에서 왕과 단 둘이 차를 마시던 중,
왕은 선생에게 재미있고
유익한 이야기를 청하였다. 그 때 선생은 왕에게 유명한
이야기를 하였으니, 곧「花王戒」라는 이름으로 전하여
지고 있는 것이 다. 이「花王戒」의 설화 가운데에는 茶에
관한 말도 나오는가 하면, 동시에 사람의 교유(交遊)하는 바에 있어 올바른 사람과 이와 반대되는 사특하고 간사한 사람과 사귀어지는
데에 따라
그 사람의 옳은 노릇을 하는 것과 그른 데에 떨어지는 일이 있음을 말한다. 지금도 그러려니와 옛날 中國에
있어서도 孟子 같은 이도 바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종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茶話는
우리에게 크게 가르쳐 주고 있음을보아,
선생께서는 그 아버지인 원효 스님이 뱀백이와 같은 茶를 마시던 茶儈이었으니
그 아버지의 영향을 이어받았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元曉의 弟子라도고 하고 혹은
孫子行의 제자도 된다는 審詳大德은 日本 奈良에 건너가 그 나라의 朝野를 크게 교화
시켰다.
그리고 그 시대에 있어 日本社會에는 茶가 盛行되고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때, 특히 日本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 茶를 ‘차(cha)’라는 음으로서
傳來하여 오는 점 등을 미루어 보아, 이 事件은 적어도
審詳大德을 中心으로 하여 관련지어 생각하여 보는 것이 좋으리라고 추측하여도 본다. 이와 더불어 元晴大師로 말하더라도 그
분이 그 당시에만 茶生活을 하였다기 보다는 未來 영원토록 茶生活의 본뜻을 살렸다고
볼 수 있는,
참된 茶人이었음을 미루어 알수 있다. 다움으로는 新羅時代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 역사상 찬연히 빛나는 花郞 또는 郞徒라고 불리우는 분들과,
그 분들을 낳고 기르시던
어머니 와 그들을 지도하던 화랑의 宗匠들이 모두 하나같이 茶를 가져 그 규범을 삼고 생활하였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 그것은 高麗代의 李穀이
지은『東遊記』 기운데에 강원도 삼척, 강릉에 있는
寒松亭과 경포대에
화랑들이 그 지방에서 그들 자신의 心身을 수련할 때 사용되었던 차솥을 붙였던 차조(차부엌)와 차솥이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에도 분명함이 있듯이, 당시의 화랑들은 이
차생활로 그들의
일상생활을 통어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보아 우리 겨레의 주체 의식과
自覺된 의식은 주변에 있는 모든 도구나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눈으로, 그 모든 곳에서 참된
진리를 들어 왔었음을 넉넉히 알 수 있게 되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독특한 차생활을 전해오는 차인 한 분으로서
忠談스님의 이야기를 다음에 적는다. *忠談 신라시대의 유명한 차인으로 제35대
경덕왕(742~764) 때의 충담 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경덕왕 대로 말하면 신라가 통일을
이룩한지 백 년 가끼이 된 때로서 정치는 안정되고 국민들은 태평을 누렸으니,
이때에 이르러 우리가
지금도 세계에 자랑하는 세계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창건되고, 또한 무게 45만 7천여 근의 황룡사(皇龍寺)의 대종이 주조되는 등 신라 문화의 횡금시기였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의 평화로운 때에
살았던 차승(茶
僧) 충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심국유사(三國遠事)』가 전해 주는 바에 따르면,
충담은 스님이며 이름 높던시인이요. 또한멋진 차인이었다. 경덕왕24년(764)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이 날은3월 3일의 삽짓날. 茶僧忠談은 앵통(櫻筒. 통 표면에 벚나무의 껍질로
장식한 통)속에 차국내
빠짐없이 담아 메고, 경주 남산의 삼화령(三花嶺)을 향해 나섰다, 해마다 삼월 삼짓날과 가을의 중구일(重
九日. 9월
9일) 두 차례씩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차를 공양(供養) 올리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
터라, 이 날도 스님이
이일을 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삼화령에 도착한 스님은
곧 정성껏 차를 달여 미륵세존에게 공양을 드렸다.
설사 말없는 돌부처일망정
차승 충담은 무언(無言)의 차화(茶話)를 나누었고, 또한 스님이 신앙하는
그 미륵세존에게
차공양을 드리는 이 날이야 말로 더 없이 즐거운 날이었다. 스님이 차공양을 올리던 이 삼화령의
미륵세존과 좌우양협시 보살상(左右兩脇侍 菩薩像)이 지금은 경주
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이 미륵불의 만다라(曼陀羅) 조성(造成)을 살펴볼 때, 이 부처는 무주처열반
(無住處涅藥)의 견지에서
자비방편(慈悲方便)을 가져 중생을 섭화(攝化)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마(四魔)를 항복을 받고 무외(無畏)를 얻게 하는 표징으로서의 왼손의
결인(結印)과
연상조병(蓮上澡甁), 즉 감로수(甘露水)로써 중생의 죄구(罪垢)를 씻어 주려는 것을 암시하는
오른손의 결안(이 불상에는 뒷 光背에 蓮花紋을 조각했다)이 바로 이
시무외(施無畏)와
사마항복(四魔降伏)의 뜻을 가진 천고뇌음(天鼓雷音)의 지경을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미륵불의 좌우보처협시(左右補處脇侍
. 속칭 아기부처)는 무척
재미있는 불상의 한 형식이다. 이 보살은 그 신상(身像)으로 보아 시등신(四等身)인 것 이 분명하 다.
이 시등신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태어날 때의 모습 바로 그것이니,
이 사등신의 보살상은 희망과 발전을 일러 주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미륵세존을 협시(脇侍)하는 뜻과 아울러 그 미륵불로부터 받는 애무(愛撫)의 의미까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감로수로써 중생들의 죄구(罪垢)를 씻어 주고자하는 지경을 표상한 부처인만큼
차승 충담의 사상이나 그의 차생활의 모든 면에도 계합(契
合)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스님이 일년 중에서도 더 없이
좋은 계절인 중삼(重三)과 중구(重九)일에 차공양을 올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스님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삼화령의 미륵세존이 함께 계셨으니 미륵불이 일러주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즉 그 어느 곳에서도
구애됨이 없는 자유자재한 산 사람으로서의 차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륵세존에게 차공양을 올린 충담은
남산의 오솔길을 내려오면서 지난날 화랑 기파랑(嗜婆郞)의 인격을 기리며 불렀던 노래를
다시한 번 조용히 읊조려보는것이다.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구름 쫓아 떠가는 어디에 새파란냇물속에 기랑의 모습잠겼세라 逸劇 川
조약돌이 郞의 지니신 마음갓(際)을 꽃고자 아!
잣(栢)가지 높아 서리 모를 花判이여(8 ‘三國遺事’
李丙燾 意譯에 의함) 지난날 정답던 벗 기파랑의 추억에
젖어 어느덧 귀정문(歸正門)을 지나고
있을 무렵 황급히 그에게로 온 궁중의 한 사자(使者)가 왕이 그를 부르신다고
하므로 충담은 귀정문 누상으로 올라갔다. 왕이 기쁜
얼굴로 그를 맞으며 물었다. “스님은 누구신지요?” “충담입니다.” “어디서 오시오?”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차공양을
올리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 차 한잔을
마셨으면 하오.” 이에 충담은 앵통 속의 차구를 꺼내어
차도구를 벌려 놓고 차를 끓여 왕에게 올렸으니,
삼짓날 귀정문 누상에는
뜻하지 않은 차석(茶席)이 벌어졌고, 아름다운 차회(茶話)의 꽃이 피었다. “내 듣자하니 스님이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니 과연 그러하오?” “그러합니다.” “그러면 나를 위해 안민가(安民歌) 한 곡을 지어줄 수 없겠소?” 충담은
왕의 청에 따라 노래를 지어 바쳤다. 君은 아비요 臣은 사랑스러운 어미시라. 民올 즐거운 아해로 여기시니 구물구물 사는 物主들, 이를 먹여 다스리니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소냐 나라를 지닐 줄 알지로다 君답게 臣답게 民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 이 노래가 오늘날까지 전하는 신라의
사뇌가(詞
腦歌) 24수 중의「安民歌」이다.
왕은 마음 속으로 기뻐하며 충담이 궁중에 계속 머물러줄 것을 청하였으나
충담은 두 번 절하며 굳이 사양하니,
경덕왕은 이 차승의 마음을 함부로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차승 충담은 비록 왕에게「안민가료써
정치의 요제(要
諦)를 직언할 수는 있었으나,
스님의 몸으로 화려하고 편안한 궁중에 갇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것이다. 모진 서리마저 함부로 범하지 못하는
잣나무 가지인 양 높고 성성한 기파랑의 인격을 홈모하던 그 심정은 바로 충담의
인격이었고 구름
. 달 . 시냇물
. 조약돌 . 잣나무 등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어(詩語)에서 풍겨주는
아늑한 정서야말로 차승(茶僧)이자, 시승(詩僧)인 충담의 정서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2. 高麗時代 -大學國師
義天과 相國 李奎報의 茶生活- 고려의 앞 시대인 新羅는 그 최후의
왕이었던 敬順王의 거룩한 뜻으로 신라 천년의 왕업이라는 좁은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는 그 자신의 아들 보다도 새로운 국민의 소리와 새롭게 사회를 이룩하여
모든 人民을 덕으로 다스려 나가며 전 인민을 弘益하게 하려는
인물에게 선선히 全臣下와 합의 하여 그 全權올 고려에 이양하였다. 이리하여 고려는 신라 초부터 朴씨다
昔씨다 金씨다 할 것이 없는,
가장 德있는 사람이 人民올
거느려 비록 통치자의 姓은 다르다 할지라도 국가를 지배하는 이념에 있어서는 신라의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는 한편, 더 나아가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남의 영토가 된 고구려의 옛 땅을 찾기 위하여 그 이름까지 고려라 칭하고 그 국호로
정하였던
것이다. 이에 있어 그 구성분자들은 그 앞
시대에서 즐겨 茶를 가져 생활하였던 것이며,
자연 답습되게 되었다.
特히 고려의 문화가 찬연한 文宗(1046~1083) 王代에 와서 한층 빛나게 되었고,
이 文宗의 네 번째 왕자안 義天은 우리 민족으로서 세계적으로 문화사상
집대성시킨 탁월한 지위를 차지했다.
수많은 佛敎文獻올 집대성하였으니 그것은 고려속대장경의 간행인 것이며,
그 문헌의
분량이 얼마나 많았던가는 의천이 저술한 모든 문헌을 살펴보면 잘 알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줄이는
바이나, 그
가운데에 특히 그 문집 사이에 차에 대한 말이 여러 곳에 걸쳐 보이는 점을 봐, 그가 진정한 茶人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즐겨 五味를 맛보면서 그 국가적인
지도자로서 주의를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이규보에 대한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
규보는 그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불교 독신자로서 뛰어나는 文章과
식견을 가졌던 居上였다. 그가 불교에 있어 禪올
중시하고 그 시대의 禪風, 다시 말해서 ‘茶禪一致’의
경지를 개척한 분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저술로 전하여 지고
있는『李相國集』에 기재된 茶詩와 茶와 더불어 그가 매우 즐겨 기호하였던 술까지를 합하여 茶
.
酒의 취미를 재미있게 말 한 것은 차와술의 대차적인 성질의 것에 따라
색다른 인상을 우리에게 끼쳐 주고있다. 그리고 이미 차의 사적고찰에서 말하고
있는 고려 말엽의 儒者이며,
經世家였던 포은 정몽주
선생의 차에 얽힌 시의 내용을 짐작하여 보건대 이미 茶의 妙境에 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이리하여 고려시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가 성행되었으며, 그에 따른 세계에 자링히는 고려시대에 이루어진 靑磁는
그 대표적이라 하겠다. 이미 말 한 바와 같이 仁宗代(1122~1146)
에 中國의 한 외교관이었던 徐競이 지은 『高麗圖經』에 그려져 있는 그
당대의 行壯圖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차의 행사가 어디까지 갔는지를
알 수 있으니, 그 시대에 행하여졌던 차와 차행사는
이미 신라에서 이루어져 오던 것과는 달라져 있으니 宋代의
그것을 많이 영향 받았음을, 특히 茶禪一體 時代라고
이를 수 있는 모습을 짐작케 된다. 3. 王朝朝鮮時代 - 涵虛스님으로부터
西山大師까지- 麗末에서부터 王朝朝鮮으로 정권이
바뀌어질 그 무렵, 李
穡의 父인 李行의 방문을 받은 成桑谷과 會飮중에 茶話를 나누면서
“충주의 물맛이 천하의 제일이니 그 이유는 금강산 같은 명산의 물인 소치이며, 한강의 牛重水를 그 다음 간다고
하였고, 속리산에서 흘러 내리는, 三陀水를 다음간다” 라고 한 것을
미루어 보더라도 얼마나 깊이 茶人둘이 水質에 대한 것을 음미하였는지를 알게 된다. 왕조 조선 건국 초부터
차인의 물에 대한 敏感을 엿 볼 수 있는 일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기에 약한다. 이 시대의 차승으로서는 涵虛堂
得通禪師를 꼽을 수 있으니, 그는 무학 대사의 제자로서 茶禪의 一致를 말하는 바와
같이 이름난 선사였다. 그는 소위 선의 提高祖라도고
하며, 南禪의 宗祖로
지칭되는 慧能의『金剛般若經』에 대한 解義에 못지 않는 이 경의 해의를 붙여 세상에서 높이 평가되는
『金剛經五家解』의 일인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생활이 목표하는 살림살이의
運用에 있어 그 어느 곳에도 사로잡히어 있지 않음을 충분히 체득하였다.
이것을 無所住의 경지에서
而生한 바 이며 이 而生은 다시 차의 말로는 차생활을 철저히 하였다고 할 것이니, 이 분에 대한 茶詩는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말하였으므로 생략키로 한다. 淸虛 스님(1520~1604)은 우리가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민족이 크게 쓰라린 외적의 난―즉 임진왜란이라는
칠 년 간의 참혹한 戰禍를 겪고 있을 무렵 그의 제자 四漠大師와 함께 국난에 진력을 하였다.
그 또한 차생활
가운데에 읊은 시는 유명한 것으로 이미 말한 바이므로 줄이거니와 여기에 그 시의 맨 끝구인
“無限松風韻不齊”라는 데에 있어, 그가 禪僧의 생활로서
“차솥에 끊는 물소리(松風) 한없이
고르지 않다”라는 말처럼 차솔에 끓고 있는 물소리를 뜻 깊이 듣고, 그 심정을 나타내 보였으니 지극한 차선의
경지에서 생활하였던 차인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
민족이 역사상 유례 없던 큰 수난을 당하던 때에 시국에
향한 자세로 인민과 더불어 앞장서 국난을 막았던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차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생활은
필시 어려운 지경까지도 구제하계 됨을 짐작하계 된다. 왕조 초기부터 서산대사까지를 대개
말하였고, 다
시 임진왜란 뒤로부터 丁茶山선생을 비롯하여 이외에 완당 김정희,
초의 스님 차례로 적기로 한다. º丁茶山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실학(質學)의 집대성자
(集大成者)’, ‘한국 최고의 학술사상가 ’로
일컬어지고 있거니와, 동시에 그는 한국 최고의 차인의
한 사람이었다. 선생은
1762년에 남인(南人)에 속하는 관료학자(官僚學者)
정재원(丁載遠)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에는 희대(稀代 의) 천재로,
청년 시대에는 국왕 정조(正祖)를 비롯한 조야(朝野)의 촉망을 한 몸에 모운 대기준재(大器
俊才)로서, 혹
은 승지(承旨)로
혹은 암행어사로 혹은 부사(府使)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세기가 바뀌는 1800년을 전후해서부터
당시 반대파에 몰려 죽음 일보 전에서 20년에 가까운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귀양처 중에서도 특히 강진(康津)의 귤동 뒷산, 즉 다산(茶山)이라는 산의 초당(判堂)이 유명하다. 이 산 이름이 결국
그의 호(號)로
까지 되지 않았던가. 강진 귀양살이
18년 동안 그는 오직 “國憂民恤을 저술로나 寄託하리라 하여 …(중략)… 丹黃黙麻에 세월을 기울여서 조선
5천 년간 無二한 대부의
저술을 남기었다”라고 정인보(鄭寅普)는 평하였다. 그 때 저술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二書一表 (‘牧
民心點’ 『欽欽新書」 『經世遺表』와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평의(評議)이다. 그런데 선생이 유배 생활하던 귤동
뒷산에는 차나무가 야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산 이름이 다산(茶山)이 된 셈이다. 지리적으로 지리산의
일맥(一脈)인
관계로 자연적으로 번식되어 간 것인지, 혹시
그 이전에 귤동에 차를 사랑하던 선비가 있어 차나무를 이식하여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산초당(茶山艸堂)
부근에는 차나무가 무수히 야생하고 있었다. 선생은 저술하는 틈틈이 이 차나무를
돌보고 재배하였다. 다산초당 주변에 제전(祭田)을 일구어 거기에 차 모종을 하여 재배하기도 했다. 그리고 초당 뒤편 바위틈을 파서
약수터로 만들고, 그
이름을 약천(藥泉)
이라고 했다. 또 초당
앞뜰에는 크고 널찍한 바위를 옮겨다 놓고, 그 바위
위에서 차를 끓였다. 그 바위 이름이 바로 차조(茶竈 차부뚜막) 그 앞으로 대나무가
무성하고 소나무 사이로 남해바다가 건너다보인다.
선생은 이 아득한 하늘가절역(絶
域)에서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서 있다”고독백하였다. 산골에 찬 물소리 대밭을 혼드는데 봄별은뜰에 핀 한떨기 매화가지에 와
있네 아름다운 음악이 이 속에 있건만 아쉽다 이 정을 말할 이 없어 몇 번이나 앉았다 다시 일어나 이
뜰을 거니는고(意
譯) (寒聲澗到上包竹 春意庭存一枝梅 美樂左中無處說 廈回淸在起徘徊〕 그러나 이 아득한 절역에 홀로 서
있는 선생은 차로 그 고독을 이길 수 있었다. 茶山차와 약천의 석간수(石間水)를 차조 위에서 끓여 그윽히 마시면 “시원
하기가 마치 안개를 머금는 듯하다”고 했다. 선생은 붓올 들어 차시를 옮었다. 茶山艸亭에 도시 書籍이 없거니 오직 봄꽃이 만발하고 계곡물이 흐르네 봄비 개인후 귤나무숲의 아름다움이여
문득 바위틈새 약수를 길어 차병을
씻네 (都無書籍貯山亭 唯是花經輿水經 颇愛橘林新雨後
巖泉手取洗茶甁) 한문연구에 몰두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분망하던 선생은 다시 붓을 들어 병든 몸을 한탄했다. 약방아 찧는 일이 잦아지니 번거로이 곰팡이는 없다마는 차달이기 드물어지니 차로(茶爐)에는 고요히 먼지만 쌓이네 (頻春藥臼 煩
無蘇 稀煮茶爐靜有塵) 이렇게 차로서 귀양살이의 고독을
달래고, 차
로써 귀양살이의 통분을 이기며, 차로서 정신을
정화시킴으로 선생은 우리 역사상 무이(無二)의 대저술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은 “차를 마실 줄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고까지 갈파하고,
천하 모든 민족이 모두
차를 즐기는데 당시 우리 민족만이 차를 즐기지 않는다고 한탄하기조차 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차의 역사를 상고하여
한국에서 차를 처음으로 재배한 곳이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임을 밝히기도 하였다. 선생은 실학관계 저술이외에 많은 시문(詩
文)을 남겼거니와 그 가운데
차시도 많다.『차함시첩(茶盒詩帖) 』 차시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시들은 대부분 현존『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는 빠져 있다.
다행히 최근 『여유당전서』
보유편(補遺篇)을
만드는 측에서 이러한 새로 발견된 차시 (茶詩)들을 함께 편집하고 있다 하니 차인으로서의 선생의 면목을 밝히는 쾌사가 아닐 수
없다. 선생은 강진 귀양
18년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옴에, 그곳의 차맛을 잊지 못하여 제자들과 함께 차신계
(茶信契)를
만들었다. 이것은
선생이 차를 기억 하면서 차속에 제자들을 한 데 묶어 놓으려는 것이었고, 동시에 茶山차를 선생에게 보내게
합으로써 차신 속에 사제(師弟)간의 정을 나누려는 선생의 지극한 심정에서였다. “봄에는 곡우차(穀雨茶) 여름에는 입하차(立夏茶)”라 하고 봄도 여름도 아닌
가울에 유배지를 떠나는 선생은 못내 茶山의 곡우차와 입하차를 잊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차인의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지 않은가. 고향에 돌아간 선생은 다산초당에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편지를 띄워 고향에서의 생활이 그 곳에서의 생활 보다 못하다고
술회하면서 부디 茶山차를 잘 재배하고 철마다 보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차라고 하는 지극히 순(純)하고 고요한 음료에서 울려나오는 천둥 번개 소리가
삼국시대 신라의 화랑정신으로 화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거니와 茶山 선생의 경우에는 실학의
집대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차와
실학의 일체화(一體化)됨을 보게
된다. º秋史 金正喜 추사(秋史)는 세상이 다 아는바와 같이
19세기 전반기의 탁월한
실학자 (實學者)요, 금석학자(金石學者)이며, 동시에 우리 역사상 무비(無比)라 할 서예가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또한 한국의
진정한 차인(茶
人)의 한 사람이었음을 간과할
수없다. 실상 그의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의 밑바닥에서 차생활이
영위되었고, 서도(書道)의 밑바닥에는 차도(茶道)가 깔려 있었으며,
참선(參禪)의 밑바닥에는 차선(茶禪)이 함께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서 추사 역시
차시일관(茶詩一貫)이요, 차서일체(茶書一體)였으며, 또한 차선일치(茶禪一致)이 었던것이다. 그는 1786(정조 10년) 호조판서를 지낸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 (杞溪 兪氏)사이에서 태어났 다. 본관은 경주(慶州),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 (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과파(果波),노과(老果) 등 2백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차 생활과 관련된 호는 차로 (茶老), 고정실주인 (古鼎室主人), 승설학인(勝雪學人) 등이 있다. 그는 어릴 때 박제가(朴齊家)에게 사사(師事)하였으며 1809년(순조 9년)에는 동지사(冬至使) 박종래(朴宗來) 일행과 함께 연행(燕行)길에 올라 옹방강 (翁方綱),
왼원(阮元),조강(曹江) 등과 교유하여 경학(經學)과 서예를 담론하고, 또한 차도를
강론하였다.
秋史의 아호(雅號)
가운데 하나인 승설학인(勝雪學人)은 완원대유(阮元大儒)를 만났을 때 완원이 내놓은 승설차를 마신 데서 유래 한 것으로,
후에 그는 이 아호를 작품
속에서 즐겨 썼다. 그는 한때 충청좌도(忠淸左道),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
병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거쳤으나 그의
천재적이고 비타협적인 생활이 적을 많이 사게 되었고 마침내 소위 윤상도(尹尙度) 사건에 관련되어,
그 후 수십 년간 제주도로 북청(北
靑)으로 기구한 유배생활의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제주도 귀양살이를 할 때, 대흥사(大興寺)의 차승 草衣는 죽로차(竹露茶)를 보내고 또한 키우던
차나무들을 보냈다. 秋史는 그 차를 마시고 그
차나무들을 기르며, 유배지에서의
울분을 누르고 서도에 정전하였다. 이 때 秋史가 草衣의
차선물에 대한 답례로『반야심경(般若心經)』한 질(一帙)을 써서 보냈다는 것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시정(市井)의 속장(俗匠)들이 흔히 秋史의 글씨를 기괴한
것으로 마치 현대적인 조형미와 간단히 연결시키려 하고 있으나, 실상 그러한 찬양은 그의 진면목을 모르는데서 나온 천견(淺見)에 불과하다. 그는 일찍이 흉중(胸中)에 5천 자가 있어야 비로소 하필(下筆)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속장(俗匠)의 마계(魔界)일 뿐이라고 하였고,
또 “흉중에 청고(淸高)하고 고아(古雅)한뜻이 없으면 예법(隸法)을 쓸수 없고, 흉중이 청고하고
고아한 뜻은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지 아니하면 나타낼 수 없다”고 갈파하였거니와, 실로 秋史의 소위 ‘문자향’과 ‘서권기’는
차도 차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있다 하겠다. 그는 화법(畵法)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9천 9백 99분(分)까지는
도달한다 할지라도 나머지 1분이 가장 어렵다고 지적하고,
그
1분은 천기정묘(天機淸妙)한 것으로서 신운(神韻)이 있음으로써 이를 뿐이라고 하였다. 이
러한 秋史의
신운 또한 차도와 차선 없이는 말할 수 없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서도
짐작이 간다. 어느 날 신자하(申紫霞)가 秋史를 만나 “그대의 시상(詩想)은 차를 끓여 한 잔 하는
순간에야 민묘(敏妙)가 있군요”
하니 秋史는 웃으며 “과연 그러하오. 차를 끓여 마시는
선로간(扇爐間)에
서 나는 그것을 얻을 뿐이요.”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秋史의 주변에는 늘 차가
있고, 차
로(茶爐)가
있었으며, 그의 글씨와 시구(詩句)에도 늘 차가 있었다.
유배처에서 돌아와 과천(果川)에 있으면서도 그는 매화차(梅花茶)를 마시며 자신이 그린
매화병풍을 서재에 둘러치고 「매화백영시(梅花百詠詩)를 지었으며,
당호(堂號)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 하였다. 매화차를 즐겨 마시며
매화시를
즐겨 읊은 그가 스스로의 아호를 ‘매화구주 (梅花舊主)’라고 한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지리산 화개동의
죽로차를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죽로차는 중국에서
제일가는 용정(龍井) 두강(頭綱)보다 질이 활씬 나으며, 인도의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주변에도 죽로차만큼 묘미 있는 차는 없을 것 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므로 추사의 주변에는
늘 죽로차가 있었고, 그밖에 각종 차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누가 차를 선사해오면 무엇보다도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초의(草衣)로부터 차선물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것 같고, 秋史는
초의가 보내준 차를 마시며 차선을 다듬고 탈진습기(脫盡習
氣)를 몸부림쳐
갈구하며 때로는 붓을 들어 대필(大筆)로 ‘茗禪’ 두 자를 써서 존경하는
선사 (禪師)-초
의에게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차승 천일(天一)에게도 그의 차생활을 기리며
찬양하는 시를 보냈다. 南山의 仙人은 무엇을먹는가 밤마다산중에서 白石茶를끓여 먹으니 世人은그를일러 白石仙이라일컫네 한평생 나이는먹었으나 돈은쓸데 없었네 茶仙의食後뱃속은 편안하기 한량없어 72세 老峰에 肺肝이생생하네 진정한祖師가 이곳南山南에 있으니 나는 길이 멀다 탓하지 않고 그를좇으리 (南山仙人何所食,夜夜山中煮白石。 · 世人唤作白石仙,一生费齿不费钱。 · 仙人食罢腹便便,七十二峰生肺肝。 · 真租只在南山南,我欲从之不惮远) 차인 秋史는 정다산(丁茶山)에 이어 초의와 함께 허소치 (許小擬), 강추금(姜秋琴), 신관호(申觀浩) 등을 후학(後學)으로 두고, 차생활의 높은 구경 (究竟)을 이룩하며 차 속에서 書와 禪과
畵 및 실학을 더듬어 고행(苦行)하고 힘서 정진(精進)하였으니 그는 ‘죽로지실(竹遠之室)’이라는 그의 예액(隸額)
유작(造作) 한 폭은 안일한 삶에 빠진 후인(後人)들에게 길이 울림을
준다. º草衣 禪師 19세기 초 무렵 대홍사(大興寺)의 명승(名僧) 초의 선사(草衣禪師)는 한국차의 증홍조(中興祖)이다. 문자 그대로 차승(茶僧)으로 차를 논함에 있어 그를
빼놓고는
말 할 수 없으며, 그를 말함에 있어 차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된다. 그의 선(禪)은 차선(茶禪)이요, 그의 시(詩)는 차시이니, 이른바 ‘차선일체(茶禪一體)’가 되고 이른바 ‘차시일관(茶詩一貫)’이 된다. 그의 속성(俗性)은 장씨, 1786년(정조10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字)는 중부(中浮), 법명은 의순(意恂)이며 초의(草衣)는 그의 법호(法號)이다. 이 법호는 야운(野雲)의『자경문(自警文)』에 나오는 나무뿌리 나무열매로 배를 채우고 솔잎과 풀옷(草衣)으로 몸을 가린다 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15세에 출가하여 19세에
대흥사의 고승 완호(玩虎)에게 법을 받았으며, 완호 선사와
가끼이 지내던
丁茶山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다산초당 (茶山艸堂)에서 3년여를 수학했다.
그리고 丁酉山, 金秋史,
洪奭周, 申紫霞,
金命喜 申觀浩, 權敦人 등
당대의 홍학석유(鴻學碩儒)들과 넓게 교류하면서 당대 문화의 최첨단을 호흡하였다. 그러나 그는 폭넓은 교유(交遊)
• 새로운 호홉에만 그치지
않고 선(禪)의
오의(奧義)에
새로운 지경을 열어 놓은 학승(學僧)이요,
구도승(求道僧)이었다. 40여 성상을 노심초사 불이선(不二禪)의 오의(奧義)를 찾아 각고면려하였으며 대흥사의
일지암(一枝庵)에
들어가 ‘일지암의 구경(究寬)’을 터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지암의 구경은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한바와 같이 차를 통하여
차와 함께 전개되었던 것이다. 초의에 의하면 차라는 것은 범어(梵
語)로 알가(關
加=Argha)인데 그것은 ‘시원(始原)’, ‘원초(原初)’라는 뜻이라고 한다. 불교에 있어서
‘시원’, ‘원초’는
곧 무착바라밀(無着波羅密)을 가리키는데, 이는 어느 욕심에도
사로잡힘이 없는 순연한 본래의 마음을 말한다. 초의에
있어서 차란 곧 이러한
욕심과 번뇌 이전의 본래의 마음, 무착바라밀이다.
따라서 차승 초의는 옛날 성현들은 모두 차를 좋아하였다. 그
것은 차가 군자의 성품과 같이 사특함이
없기 때문이다.
(古來賢聖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 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초의는
1828년 (純祖
28년)에 한국 차의 근원지인
지리산 화개동 (花開洞)의 칠불암(七佛庵)에 있으면서 저 유명한 ‘차신전(茶神傳)’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차의 신묘한 행사를 저술한
것으로 채차 (採
茶), 조차(造
茶), 변차(辨
茶), 장차(藏茶), 화후(火候), 탕변(湯辨), 탕용노눈(湯用老徽), 포법(泡法), 투차(投茶), 음차(飮茶), 색미(色味), 점염실전(點染失眞), 차변불가용(茶變不可用), 품천 (品泉), 정
수불의차(井水不宜茶),
차구(茶具),찻잔(茶蓋),식잔포(試蓋布),차위(茶衛) 등의 20개 절목으로 되어 있는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앞서 차도용심(茶道用心) 항목에서 자세히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초의의 제자격인 범해각안(梵海覺岸
1820~1896)이 초의의 차생활을 기록한
것을 보면, 초의선사가 법제한 차는 4월 중순의 곡우기(穀雨期)의 맑은 날 황아엽(黃茅葉)을 따서 밀실에서 잘건조시켜 찐 뒤에 외기(外氣)가 닿지
않도록 엄장(嚴藏)한 것이었다고 전하면서 그야말로 찻잔에 선향(禪香)이 감돈다는 것이었다. 또 차를 끓이는 찻물도 소위 경(輕),
청(淸),냉(冷),연(軟), 점(點),불취(不臭) 등의 팔덕(八德)을 (9. 佛經論의여러곳에 나오는
八功德水는 대체로 輕, 淸, 冷, 軟, 美, 調適, 不患이다. 효당은 經,
點으로 하였기에 교정자가 輕, 美
로 수정한다.)
갖추어『茶神傳』에서 스스로 말한 그대로 차가 찻물의 신(神)이 되고 찻물은 차의 체(體)가되어 말할수 없는 진경(眞境)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초의와 추사(秋史)는 서로가 서로를 드높여 이해하는
남다른 사이였다. 실로 차성(茶聖)과 서성(書聖)의 교유하였다고나 할까.
추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초의는 許小痴를 통하여 추사에게 손수 법제한 차를 보내고 또한 차나무 모종을 보내기도 했다.
추사는
초의가 보내준 차나무 모종을 귀양살이하던 주변에 심어 놓고 아침 저녁 정성껏 차나무를 키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차를 마시며 서(書)와 화(畵)에 정진하였다고 전한다. 추사는 차를
받은 보답으로 ‘반야심경’을 명필로 써 초의에게 보냈는데,
초의는 그 ‘반야심경馮若心經’을 그의 일지암(一枝庵)에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일지암이란 “뱁새는 항상 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 가지만 있어도 편안하다.”라는 한산시(寒山詩)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차숭 초의는 이 일지암에서 참선하면서
전선(專
禪)했다는 말을 쓰지 않고
지관(止觀)했다
는 말을 쓰고 있다. 그것은 원효 성사(元暎聖師)의 뜻과 통하는 바라
하겠거니와
추사는 초의를 평하여, “크계 포용하여 하나의
평등세계에 이르고 보니 무엇을 버릴 것이 있겠느냐”라고 말하고
있다. 차성 초의는 쌍수도인(雙修道人,
阮堂 김정희의 道號)에게 보낸
차시에 이르 되, (10. 글귀마다 번호를 달고 뒤에
原詩文을 붙이고 주를 가(加)하였다.) 1. 인생의 천만사는 봄눈처럼 허무한것이나 그중에서 이 일단만은
뉘라서 깎아없애랴! (一. 萬事從來春消雪
誰知個中自有一段難磨滅) 2. 가을밤달빛같아서 청적(淸寂)이나 화경(和敬)을 가져 그맑음을비할수없어라 (二. 秋空淨涵明月光 淸和難將比皎潔) 3. 잘생기고 못생김을 그뉘와 의논하며 진짜니 가짜니가 다 한 가지 초절(超絶)만 해 (三. 殊相劣形誰擬議 眞名假號總元絶) 4. 구원실성(久遠買成)의 불기(不器)라고 보매 뉘라서 향화(香火)의 옛 연분(緣分) 맺었다 하리 (四. 始未相動那伽定 誰知香火舊緣結) 11 那伽定: 몸이 용처럼
되어 깊은 뭇 속에 定止함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곳에서는 聖人 이 아직 사람들을 위하여 起動도 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그 덕을 追仰하여 香火같은 것 울 올리고자
하는 연분을 맺고자 한다는 것은 안 될 말이라는 뜻으로
쓰아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들의 本性 자리라고냐 말할까,
또는 사람들의
本然의 面目은『妙法蓮華經』「如來壽量品」에서 말하는 ‘久遠實聖’이라는 說明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孔子가 밀히는- ‘君子不器’의 뜻도 된다.
이러한 뜻을 종합하여 “久遠賀聖의
不器라고 보매”라고 抽譯한 것이
다.
아어 다음 句의 香火의 옛 연분이 맺어졌다 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역하였다. 5.
똑같이 진짜니 가짜니 찾아 볼 곳도 없고 함께 살자 죽자고 껴안을 나위도 없어라 (五. 雙放雙收沒處尋 同生同死休提挈) 6. 그래도 어느 한모퉁이에서 참된 면목을 나타내 주며 그러할 무렵마다 환희스러워 어떠한 심정인지 더욱 간절키만 해 (六. 一廻見面一廻歡 有甚情懷可更切)
7.
준엄한 삼십 주장의 관문이 있다 해도 부질없이 세연(世緣)따라 대비원을 행하자니 (七. 三十柱杖曾不畏 等閑隨雲下嶻嶭) 12 三十柱杖: 黃蘖 希運禪師(9세기 중엽)가 그의 弟子인 臨濟 玄義(9세기 중엽)의 如何是佛法的的 大意에
三十棒을 쳐서 때렸는데도, 임제는 再次 물으니 황벽은
재차
30대를 때렸다. 세 번째에
임제가 물은즉 이번에도 황벽은 임제에게
30대를 加하였다. 이러한
것을 禪家에서는 ‘關門’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人生生活의 現買面에 있어 數많은 난관 올뜻한다 13 等閑隨雲: 政然히
因緣 따라 자기의 所信대로 어떠한 곤경이나 역경에도 그 悲願대로 行한다는 뜻이다. 8. 바로 그자리가 청정무구(淸淨無垢)한 維摩거사의 방장실임을 알아보리라 (八.却看維摩方丈居14 白玉界中黃金) 14 維摩方丈: 維摩居士가
居處하는 방을 말한 것으로서, 유마거사가 이 세상 뭇
衆生을 위하여 고난을 같이하여 生活하는,
다시 말해서 유마 자신의 개인생활과 전 인류와 直結되는 자리의 방은
白玉처럼 깨끗하고 황금처럼 불변하고 平等하다는 것을
말함이다. 9. 옥 같은 아가씨는 때로 천화(天花)를 가져 홑이나 만수(曼殊)의 처렴상정(處染常淨)은 임의자재(任意自在)해 (九. 玉女時將天花散 윷殊15芬陀莘相揮) 15 曼殊: 만수는 文殊菩薩의
뜻으로 ‘維摩經’「問疾品」에 있는 故實로서, 大乘
文殊菩薩은 現實社會의 欲界生活에서 연꽃처럼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고 모든 誘惑, 이를테면 아무리 玉같은 아가씨,
天花와 같은
좋은 誘惑物을 써온다 하여도 거기에 빠지지 않고 속박됨이 없이 自由自在하다. 10. 향기로운 밥은 어느곳에도 있고 말없는 곳에 참된 법문(法問)도 얻어듣노라 (十. 無底鉢擊衆香飯 沒根耳聽無言說) 11. 처렴상정의 생활에서는 다시 뉘라서 맑아질 것을 원할까 보냐! (十一. 熱惱塵垢16無着處 有誰更願濯淸洌) 16 熱惱塵垢: 煩熱과
塵世의 모든 不淨된 것에서 초탈한 생활을 연꽃에 비유하여 處染常淨의 生活이라한다. 12. 유마의 불이법문(不二法門)
중에서 三十大보살들의 광장설(廣長舌)일망정 최후 유마는 묵이부답(熟而不答)해 (十二. 不二門中三十人17
都無所用廣長舌) 17 不二門中三十人: ‘維摩經’「不二法問
品」에서
나오는 말인데, 世上 眞理인 絶對境을 ‘不二法門’이라
이르며 三十六人의 佛弟子인 文殊를 위시한 대승보살들이
佛法의 珪深微妙한 절대경을 廣長舌로서 說示한 다음, 다
시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그둘이 說示코자 하는佛法의
深妙한 뜻을 물은 측 유마거시는 默으로써 答하였다. 13. (여러분이 알듯이) 부처님이 임종시에 도통(道通)의 뜻을 설파할 때 「광명 ― 정대와자비심을」 . · .(伊)자에 겨누니 이 세 점의 배열을 세로 나가로 하면
알지 못하게 될 . · . 字라
해 (十三. 君不見末後18都將伊字19喩 縱橫幷分也難別) 18 末後: 佛陀 釋尊의
임종울 뜻한다. 19 伊字 三點의 喩:『涅槃經』二卷에 何等名爲秘密之藏 猶如伊字三點 若竝則不成伊 縱亦不成 如摩醯首羅面上三目 乃得成伊 三點若別亦不得成 我亦如是 解
脫j之
法 亦非産藥 如
來之身k亦
非埋槃 摩
詞般若l亦
非埋槃 三
法各異 亦非埋槃 이
라설명하고있다 j解脫:
正大 k
法身(如來之身):光明 l般若:慈悲 14. 굳이 나에게 말을 하라면 지은보은 하는 감사와 기쁨을 가져 먹기로 하면 바록 어쿠20일 망정 허용되리나 (
十四. 我從長者請下一轉語
法喜供21禪悅22食
還23將容 20
우리말로는 '어쿠’라는 獸名을
말하는 것으로『한글큰사전』에는 빠져 있고,
다만 ‘어귀어귀’ 또는 ‘아귀아귀’라는 “욕심 사납게 음식을 물고 씹는
꼴”로만 나오고 있다. 21
法喜供: 法喜供義의 略인데
法喜食이라고도 한다. 修行人이 그法을 修學함에 있어
聖者 인 佛菩薩의 말과 진리를 얻어듣고 歡喜心을 내어 社會史的 의식을 가져 身과 心올 길러 나가는
것을 뜻한다. 22
禪稅食: 修行者가 止觀(또는 禪定)의 樂을 얻어 能히 모든
根을 길러 나가는 것울 말한다. ‘法喜供’ ‘禪悅食’은
澄觀의『華嚴經』「大疏」十九에
있는 出世五食의 願食, 念食, 解脫食에 加하여 있는 말이며 또『增一阿含經』四十一의
九食說중에 나온 것울 말한다. 다시 말 해서
知恩報恩하는 감사 기쁨을 가지고 먹는다는 食悠일 것 같으면 도리어
비록 ‘어쿠’처럼 탐욕심을 가지고 먹으려 하여도 容認될 것이라 한다. 23 饕餮:『辭源』에는 惡獸名 貧財爲饕 貧食爲餮
謂貧耆飮食曰饕餮 或作有首無身 是也 古鍾鼎葬器多祿刻其形以爲飾 이라설명하고있다. 초의의 ‘不二’의 경지는 이러한
차원에서 차생활에 내재하였던 것이다.
초의는 정조(正祖)의 부마(射馬)였던 해거도위(海居都尉)
洪顯周의 부탁을 받아저 유명한『동차송
凍茶頌)을지었 다. 이『東茶 頌 』과『茶信傳』은 가히 한국차의 성전(聖典)이요, 중국에 있어서 육우(陸羽)의『차경(茶經)』에 비견되는 명저이다. 『동차송(東茶 頌)』
의 높은 경지를 어찌 속된 문구로 표현할 수 있으랴!
다만 그 내용만을 간단히 개관하건대, 차의 체(體)인 탕수(湯水)와 신(神)인 정차 (精茶)가 합하여 그중정(中正)의 도(道)를 찾아야 할 것이니 그중정의 도를 찾는 본질적인
원리가 구체적인 차도용심(茶道用心)이라 하였다. 초의의 유저(遺著)로는 『 草衣詩集』과
2권이 있으며 그밖에 『 震
默祖師遺巧 』 『四辨漫語』 『 東茶頌 』,
『 茶神傳 』과 약간의
서화(書畵)가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옛 유지(遺地) 一枝庵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차승
(茶僧)이 심은 차나무 몇
그루가 우거진 숲속에 자라고 있다. 이상 열거한 차인들 이외에도 수많이
차를 즐겼던 茶人들이 있었으며,
실제로 차생활이 지향하는
바의 본뜻에 따라 생활하였던 茶人이 적지 않은 바이나 煩을 피하여 가장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었던 몇 분을 들었으니, 제각기 어려운 여건 가운데에
茶를 통하여 깊은 통찰력과 여유 있는 德스러움으로 민중의 어려움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는 未來의
전정한
茶人들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