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
茶와멋 차생활에 대해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였지만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곧 멋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차생활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우리들 인간의 기호(呼好)나 취미에 있고, 이 취미나 기호는
바로 무한한
멋을 동경하고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멋’이 어떤 것인가 하고
따져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는 없다.
『독서신문』(§178
리차드 러트 주교가r독서신문』에
연재한 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짐작된다)에 “한국문화의 진수는 멋이고,
이것은 또한
한국인만의 독특한 감
각이다”라고 한 리처드
러트 주교의 말처럼 우리들의 혈관깊숙한곳에 흐르고 있는
독특한
감각을 나타내주는 말임에는 확실한데도 이 멋을 풀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많은 지성인이 이 멋에 대해 저
나름의 풀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객관적인
사례를 통한 설명이 많은 것 같고, 멋 그 자체의
내용을 분석 설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필자 역시 이 말의 깊은 내용 그
근저(根
底)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피상적인 것이 될지는 모르지만, 차생활을 통해서
객관적인 대상에서 느끼는 멋과 주관적으로 체달(體達)하는 내면의 멋으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생활의 주변이나 환경 즉 주택, 정
원, 차실 등으로부터 놓여
있는 차도구, 걸려 있는 서화 내지는 상대방의 옷차림,
말씨,
행동거지 등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인 모든 대상을 멋이라는 한마디로 평가할
수 있다. 생활의 대상이 되는 그 모든 멋이
어떤 장소, 어
떤 때에 꼭 맞게 잘 어울릴 때 ‘멋있다’고 하고 그렇지 못할
때 ‘멋이 없다’고 한다. 이럴 경우의 멋이란 아무래도
조화(調和)나
제격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 한 사물이나 한 대상을
멋이 있다 멋이 없다 하고 결정 지울 수 있는 것은 그 대상이 되는 사물 자체의
조화나 제격이 일차적인 문제이긴 해도 다분히 대상을 보고 평하는 사람 자신의 안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니,
이것은 주관적인 내면의
멋이 더 큰 문제가 된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내면적인 참 멋은 우주 인생의
총체적인 체성(體
性)을 체달한 완전한 덕(德)을 가짐으로서 가장 신나는 때가
아닐 수 없다. 초의(草衣)는 잘 끓은 물의 건령(健靈)과 차의 신기(神氣)가 용하게 어울리어 우러난 차를
‘신령(神靈)스
럽다’고 하고, 또 음차(飮茶)에 있어서도 간 맞는 좋은 차를
혼자서 마실 때가 가장 좋다고 하여 ‘신(神)’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신령스럽다’고 하는 것은
무한절묘(無
限絶妙)함을 말하고,
혼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신’이라 한 것은 신령스러운 차를 마시는 차인(茶人)
자신이 영원하고 무한한 천지 대자연과 통하고 삼매경(三昧境)의 법희선열에 젖을 수 있는
신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할 때가 바로 내면적인 멋의
극치에 이른 지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은
‘귀신’이나 전지전능한 신으로 표현되는 따위의 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내면적인 멋이란 참된
각성의 커다란 환희의 생활에 있으니,
이것은 ‘신난다’라는
우리말이 그 본뜻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천진난만하고 원기에 넘치는 아이들은
“야! 신
난다”라고 소리친다. 이
말에는 곧 그 자신에게 ‘신이 살아난다’는 것이니, 이
순간이야말로 자기 본래성 (本來性)의 진면목(眞面目)에 조금도 손상 없이 활연(豁然)히 나타남이다.
또한 이때야말로 자기와 타안생(他
人生)과의
분별이 없어지고 자아(自我)가 세계, 세계가 자아로 되어 이
천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고 영원한 참삶의 환희에 젖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멋의 무한성(無限性) • 영원성(永遠性)이 있으니 내면적인 멋의 가장 극치인 신나는 때야말로 자아의 여러 가지 한계가
없어져
무한으로 이어지고 현재에서 과거도 미래도 동시에 살아 영원으로 이어져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
계급적인
것, 모두를 포괄한 시방세계(十方世界)에 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른들이야 인생에서 가장 신나는 때를 당할 때 아이들처럼
‘신난다’고 소리치지는 않는다고 해도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멋있다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차를 통해 우리의 선인들은
신나는 인생 멋진 삶을 누리려 했던 것이니,
함허 득통 선사(涵虛得通禪師 1376~1433)는 마땅히 이 한잔 차로 한번 맛보고 한맛에 한량없는 즐거움을 내어야 하네 (當用一椀茶一當一當應生無量樂) 라고 읊었던 것이다. 참다운 멋의 생활은 결코 사유(私
有)가 아니며 혼자의 멋도
대중(大衆)의
것이 되고 요사나 잔솜씨나 흉내나 조작으로는 체득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제 구색, 제 장단, 제 가락이 아니면 이는
‘설멋’에 흐르고 마는 것이니 맹탕 (萌湯)’이나 ‘일간이’가 되고 말뿐이다. 이
를 차인 완당(阮堂)은 난초를 그리기 수십 년 세월 제대로 된 적 한번도 없었는데 우연히도 그려졌구나 오래 두고 생각하던 바로 그 지경이 어쩐 일일까 문을 닫고 두루 살펴
찾아보니 아!
이것이 곧유마의 둘이 아닌 지경에서 이루어졌구나 (不作蘭花二十年偶然寫出性中天閉門克堯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라고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잘 해보겠다는 생각이나 욕심이
사라지지 않았을 때는 아직 명예 나 이해타산이 남아 있어 사람의 천진성의 진면목이
나타나지 않으나,
둘이 아닌 지경(不二禪),자타(自他) 주객(主客)의 무분별심(無分別心)에 이르러서만 이 참멋이 되살아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멋은 대중의 것이지 결코
사욕의 자리가 아니며 차의 생활, 멋의 생활은 전
사회인이 공동으로 성취하여야 될 공동의 광장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부언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의
취미생활, 즉
멋을 지향하는 생활은 아무래도 정서적인 방면에서 이야기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정서적인 감각이 진리성의 진(眞)과 심미(審美)의 지경인 아름다움의 세계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지적인 추구나 의지적인 행동은 계산적인 타산과 아울러 생활에 피로를 가져다주기
쉬운 반면, 정서적인 취미의 생활이야말로 아무리 복잡한
생활과 어려운 지경에 부딪친다고 해도 그것을 잘 조절하고 무마해서 도무지 싫은 생각이라고는
없는 크나 큰 환희의 신나는 생활로 이끌어 줄 수 잇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지
. 정 . 의(知 . 情 . 意)를 골고루 조화롭게 갖춘 사람을
전인(全人)이라
고 하듯이, 정적인 방면의 생활만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까다로운 이유 없이 우리의 삶이 감사와 환희의 멋진 산
사람으로서의 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정서적인 안정이 절실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그감정의 실머리를풀어 읊어
보기로하면 눈을떠(*5)
눈이 열리어 間이터져 어간이 터져 귀가 트이어 귀문이 열리어 숨을 쉬어 숨구멍이 터져 (*5)
불타 최초의 法門으로서 그 뜻을 기록한 경이 곧『初轉法輪經』이라 하는데,
이 경에서
불타는 자기가 도통한 다음 제일 먼저 그와 同學이었던 다섯 사람의 학우인 수행자에게 대하여 처음
말하기를, 자기는 눈을 떴으며 그 눈 뜬 것이 밝은
지혜와 자비로 성취되었다는 뜻. 계란이 병아리가 돼 間이 터져 껍질이 터져 깨침이 돼 解脫이라네 道通이라네 見性(*6)이라네 (*6
이 현성을 흔히둘 견성이라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 안된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현字로 보아야 한다 그 에 犯하는 것이요, 또한
객관적으로는 볼 것이라는
것이 현성이라 하여 모든 것의 자연성=法爾 그대로
나타난다.) 어느것에도제작을봐 상우를 알아 제작인 구색을 알아 모든 不正은 상우 안맞고 제격이 못되어 설멋져 안타까와라 멋을 알고 멋이 되고 구색이 맞고 가락이 된다 羅代의 聖母는 차례를 하고 화랑을 낳아 갸록하여라 멋지게 살도다 멋은 大衆의 것 私有는 못돼 道가 되고 禮가 된다 도는 신봉하는 것 예는 행사하는 것
信은 참되고 알뜰하며 禮는 성스러워! 알뜰한 禮는 범절이라네 범절은 차례에서 오고 차례는 멋에서 난다 멋은 차에서 빛나고 차는 멋에서 산다 멋은 제구색인 것 제작을 이루고 멋은 한없어라 크고 넓고 깊고 奧妙해 그 어느 것의 合算이 아니며 그 온건함을 말하느니 사람은 가도 예절은 살아 범절은 살아 반야바라밀이라 멋은 영원한 生命 터지고 깨치고 自由로워라 우리들 살림살이 멋진 살림살이 그 누구도 하질 못해 敬仰일 뿐이지 花郞은 살아있다 멋의 넋을 이어 받은 四月獅子는 石窟庵을 보라! 生命은 영원한 것 멋있어라 유마(維摩)의 오막살이 이러하단다 모르고는 안돼 멋을 모르고는 철몰라 못써 철이 나야지 私心은 망하고 공동의 멋은 살아라 내사 좋아요!
차맛이 나는 좋아요! 순박한 그맛은 내 멋올 자아내 내사 좋아요! 멋은 원효대사 아닌 밤중에 촉루도 마시고 創作의 차도 마시고 차는 멋에서 나고 멋은 차에서 산다 그는 確信이기에 위맹스럽고 正邪 정사는 빨라 대담코 용감코
슬기로워라 멋은 어느것에 나도 다른 用數를 허용 않으니 어떠 한조각이나 요사는 이룩되지 못해 차맛이 좋아 어쩐지 좋아 作爲 없이 질박한 것 정답고 마음에 들어 차맛은 써 좋아 덟어도 좋아 신것이 달고 달아도 시어 짜잖은 것 싫어요,
내사 싫어요 잔 솜씨 여러 양념 군맛이 싫어 구성 없이 짜잖은 것 열없어 싫고 싱거우면 못써 간이 맞아야 제 가락제 구성에 제 청이라오 장단이 빠져선 안 돼 장단이 맞아야
가야금 열두 줄에 두리 둥덩실 우리 멋님 내리시나신이 나는다 얼싸!
이것이 산 이로구나 산사람이로구나 멋있는 분이 산 이로구나 멋진 대중이 산 이로구나 멋은 혼자서도 대중의 것 대중은 멋을 좋아하나니 멋 없어 못 써 설멋져 죽어 산이로구나 멋의 大衆은 산 이로구나 열반이로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