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茶와禪 대저 禪이란무엇인가? 바로 수행의 방법 그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佛家에서는 이를 두고坐禪 또는 修禪이라고도 한다. 심지
어 이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宗派까지 생겨나게 되었으니 곧 禪宗이 그것이며, 이의 宗祖를
大師라이른다. ‘禪’이란 인도의 말로서 禪那라는
한자회(漢
字化)한 말의 약칭이다.
일찍이 인도에서는 그 백성들이 수행하는 방도로서 선나 또는 요가,
사마디,
삼매(三昧) 등으로 불리는 수행을 즐겼는데
설혹 그 방법은 서로 각양한 것일지언정 내용은 같은 뜻을 지닌다. 행(行) • 주(住) • 좌(坐) • 와(臥) • 어(語) • 묵(然) • 동 (動) • 정(靜) 등이 그 방법이다. 그러면 이를 통해 무엇을 얻는가? 이러한 행동을 통해 흐트러짐이 없이
침착하고 고요한 가운데 모든 사물이나 자기 속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것을 정관(靜觀)하는 일이다. 이
정관(靜觀)이
소우주를 자기 마음에 키우는 것이야말로 바로 동양의 지혜요 동양다움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선도(禪道)나 차도(茶道)를 통하여, 자기가 없어도 우주,
인생이 있을 수 있고, 자기도
없고 우주도 없는 마침내는 안생 또한 없이 하여 주는 경지 곧
자기와 전 우주인생이 함께 호흡하고 같이 움직이는 힘을 얻는다. 드디어 때로는 한 생각으로 마음을
모으기도 하고, 그
모아진 한 생각까지를 없이 하기도 한다. 이러한 동안에
그 심경은 맑아진다. 마치 고인 물이 흐르는 물로
말미암아 드디어 맑은 여울을
이루는 것과도 같은 경지다. 그러한 까닭으로 茶와 禪을 익힌
사람은 그 마음이 맑고, 고요하기 때문에 남의 눈에는 자연 거룩하게 비치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그것은 모든 사물에 달관(達觀)되었으므로 그 인간은 이 욕락(欲樂)의 먼지땅을 떨쳐나 있기 때문이다. 고
요히 시물을
관찰하고 그로써 일상의 모든 몸가짐을 이성적으로 하고, 그
행동에 있어 조용하고 침착하고 부드럽고 슬기롭게
하는 일이 어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바로 ‘茶와 禪'은 그러한 경지를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 육신과 심정을 가볍고 쾌하고
편안하고 부드럽게 하는 길이 곧 이 ‘茶와禪’을통해서이다. 그런데 차성(茶聖) 초의(草衣)는 이 禪의 길을 禪이라 부르는
것보다 止觀 이라고 즐겨 말하고 있다. 이 止觀이라는
말은
止라는 뜻과 觀이라는 뜻을 가진 合成語로서 된 것인데, 쉽
게 말하면 우리의 마음과 몸이 한 경지에 이르렀을
경우를 止라 하고, 觀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시시각각으로 객관적이건 주관적이건 간에 일어나는 현상을
어떠한 올바론 인식으로서 처리해야하는 깨우침의 생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止는 어디까지나 觀行의 과정인
것이며, 이 경지의 止가 숙련된 경우에는 언제 어디서
어떠한 때를 막론하고 올바른 판단 하에서 생활하여 나가게
되므로, 이것을 깨친 견해, 깨친 행동이라는 뜻에서 觀行이라고도 말한다. 이것을 원효대사는
그『金剛三昧論』中에서 크게 밝힌 바이며, 그 이전 중국의 天台智者 大師도 밝힌 바이요,
또 보조선사(普照禪師)도 定慧雙修라 고말하고있는바이다. 어쨌든 이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다시
말해서 불을 피워서 물을 익혀 먹는 인생생활의 그 어느 지경도 茶生活의 전부인
것이므로,
茶는 모든 것을 그대로 그 특성을 살려가면서 생활한다는 뜻으로 우리들은
이것을 ‘살림살 이’라는 말로서 즐거이 쓰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중국의 趙州라는 禪師는
그 제자들이 佛道의 大意를 그에게 물을 때나 혹은 祖師의 깨친 지경을 물을 때마다
언제나 똑같은 말로서 ‘‘차 한잔 마시게나” 하는 대답을 하였다는 것인데, 이
것을 後人들은 그냥 禪 문답이라는 公案이라 하여 알기 어려운 의심의
표적이 되는 話頭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것은 趙州禪師가
묻는 제자들에게 복잡한 문제꺼리를 제시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각성생활(覺醒生活)이라는 것은 일상생활의
平常心이 곧 道라는 것을 지적한 것에 있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茶生活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주변 측 살림살이 하는 데 있고,
이것이 禪의 편에서 볼
때는 그것이 곧禪의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草衣禪師같은 이는 “無時禪 無處禪”이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요, 阮堂선생은 “靜坐處
茶半香初”라고도 하고 “妙用時 水流花開”라는 자연스럽고 평범한
지경을 우리들에게 일러주고 있다. 또 한편 茶는 일상 우리 인간어
나면서부터 물기를 먹고 마시며 살아온 인간의 본능적인 食生活과 계절 따라 입어야 하는
입성생활,
그리고 집을 지어 거처하며 그 주택의 주변인 정원을 꾸며 꾸려나가는
생활의 영위를 하는데 있어, 그 어느 것이나 살림살이
않고는 못 배기는 현실에서 크게 착안 한 것임을 볼 때 茶道의 너르고 너른 광장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反하여 禪은 그 자체가 현실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광범하게 말하는 한편 너무 범박하고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추상적일 수도 있으므로 이 방면을 치중하여 가는 禪客들이 구두선(口頭禪) 또는 야호선(野狐禪)에 떨어져 한갓 공상에 빠져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것을 때로는 보게 된다. 이러한 뜻에서 우리는 禪이 趙州禪師나
草衣茶聖의 편에 서서 그 실다운 힘과 생생한 話路가 열렸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茶로
가는 길에 禪의 길이 있다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