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茶道 차도는 일상생활의 도(道)를 끽다(喫茶)에 붙여 강조하는 말이다. 이미 차를 운용하는 사람의 마음자세, 실
제로 차살림을 하는 방도(方道)와 예의 범절 등에 관해서 이야기했지마는, 차의
정신적인 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필요가 있을 것 같다. 차도에 대해 차성(茶聖) 초의(草衣)는 그의『東茶碩』에서 차의 체(體)가 되는 탕수(湯水)와 차의 정수(精勒)인 ‘신(神)’이 완전할지라도 중정(中正)의 도(道)를 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 ‘중정의 도’라는 것은 차의 신기(神氣)와 참된 수성(水性)이 서로 잘 어울리고 융화된 것을
뜻한다.”라고 하였다. 또 차를 채취할 때는 묘하게 하고, 제
차(製茶)할
때는 정(精)해
야 하고, 차수용(茶水用)으로는 진수(眞水)이어야 하며, 점차 할 때에는 그 중도(中道)에 맞이야 하고, 탕수와 차의 신기가
잘 어울려서
간이 맞고, 차의 건(健)이 탕에
참되게 알맞어야 하며, 이에 이르면 차도는 궁진(窮盡)된 것이라고 했다. 이에서 보면 차도는 어디까지나 그
궁극의 목적이 일상생활면의 기호에 있고 다만 물을 끓여서 간맞게 하여 마시면 되는
것이다. 이 기호는 건실한 인간생활의 중정(中
正)의 대도(大
道)를 실천할 것을 그 본지 (本旨)로 한다. 그리고 차인(茶人) 생활의 본회(木懷)라는 것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양식으로 삼고,
묵묵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행원(行願)을 그 목표로 삼는 것이니, 차성
초의가 산천도인(山川道人) 김명희(金命喜, 阮堂 金正喜의 아우)에게 보낸 시에 옛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사랑했으니, 차
는 군자와 같아 그 성질이 사기 (邪氣)가
없기때문이다. (古來賢聖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 ) 이라고읊었던것이다. 또한 차도는 각성의 참된 인간생활을
목표로 한다. 차
도에서 각성의 생활을 강조하게 되고, 또한 차생활을
통해 각성의 생활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고 하는 일상적인 생활이나
체험을 통해서 그 온전함을 자각하고 터득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먼저 우리는 차가 지니고
있는 물리적(物
理的) 성질에 주목하게 된다.
술은 우리 인간의 의식을 몽롱하고 혼미하게 하는데 반해 차는 우리의
두뇌를 맑게 해주고, 우리의 몸을 상쾌하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이 점 초의는『동차송凍茶領)』에서 “술을 깨우고
잠을 적게 함은 주성(周聖)이 증언(證言)한 바이다”라고 하였고, 허준(許浚)의『東醫寶鑑』에도 ‘다리와 눈을
밝히고 이변(利便)하게 하며, 갈증을 덜어주고 잠을
적게 하며,
모진 독(毒)을 풀어 준다”라고 하였다. 차가 잠을 적게 하고 몸의 피로를
풀어주고 머리를 맑계 해주는 등의 성질에 대해서는 현대과학에 의한 차의 화학적 성분
분석에서도 이미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끽다를 통한 각성의 생활을
강조하게 되는 근본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차생활을 통해 익혀가야 할
자각의 생활은 차실(茶室)의 분위기,
옷차림, 차기(茶器),꽃꽂이, 청소 등 모든 일상적인 생활 하나 하나에도 요구되고, 또 알뜰한 생활에 계합(契合)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차에 있어서의 오미(五味)의 음미와 차실(茶室)에 있어서의 적 . 청 .
화 . 례(寂 . 淸 . 和 . 禮)의 분위기를 강조하는 것도 바로 알뜰한 각성의 생활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즉 끽다에서 맛보는 쓰고 젊고 시고
짜고 단(苦
澁酸鹽甘) 다섯 가지 맛으로
해서 인생의 쓴맛의 의의와 단맛의 기쁨을 음미하는 것이며, 차실의 분위기 에 있어서도 차분히 가라앉아 고요하고
깨끗하며 평화롭고 경건힘(寂淸和敬)이 감돌게 하여 드디어는 차 마시는
사람이 어느덧 寂淸和敬의 정신으로 된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면 차실에
꽃을 꽂을 경우 그 꽃은 자연스러워야 하겠고,
차실 내의 분위기,
옷차림 등에 있어서도 여름에는 시원한 인상을 겨울에는 따뜻한 느낌을
봄가올에는 경쾌하고 산뜻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해야
한다. 자꾸만 변하는 계절에 따라 그 계절의
감각을 잃지 않고 높고도 자유로운 안목으로 잘 처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어느 것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없는 인생 생활을 따라 잘 처리하고 임하는
것이 바로 산 사람으로서의,
철이 난사람으로서의, 각성한사
람으로서의 알뜰한생활이다. 우리는 화로에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며 찻잔을 씻고, 차
실을 청소히는 등의 하잘 것 없는 일을 통해서 현실생활의 중요성을,
그리고 물이 끓는 소리를 송풍성 (松風聲)이라
하고 달과 백운(白雲)을 벗 삼아 고요히 사색에 잠기며 차기나 서화(書畵)나 정원 등에서 예술적인 멋과
아름디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또한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기까지에는 정성 들여 만든 차를 비롯해서 물 불 기타 차구 등 갖가지가 있어야 하고, 이 하나 하나들이 서로
돕고 어울리고 하여 한 조화를 이룰 때 정말 좋은 차가 된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차인(茶人)이 모든 사물을 보는 눈이란
현실적인 것, 예술적인
것, 철학적인 것 등을 자유자재한 관찰과 안목으로
처리할수 있어야만 온전한 각성의 차생활을 영위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 草衣의 차시 가운데에 향기로운 밥은 그 어느 곳에도 있고 말없는 곳에서 청정무구한 법문도
얻어들어라 (無底鉢擎衆香飯 沒根耳聽無言說) 라고 한 구절이 잘 일러주고 있다. 밑
구멍이 빠져버리고 없는 바루(그릇) 속에 뭇 향기로운 밥이 있다고 하는 안목이야말로 어떠한 사물에서도 그것의 제작
(天作) 제 격(格)을 발견하는 차인의 눈이며,
귀청마저 떨어져 버린 귀로서 더구나 말없는 진리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놀라운 깨달음이다. 우리도
알뜰한 자세로 차의 생활을 한다면 눈이 뜨이고,
귀문이 열릴 것이다. 앞에서 “차는 다만 물을 끓여 간맞게
하여 마시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차의 생활이 어떤
형식이나 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호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잔의 하로 목을 축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차생활이라고 하더라도 문제는 있으니, 바
로 ‘간맞게 한다’는 그것이다. 이 간 맞는 좋은 차가 되기 위해서는
차도용심(茶
道用心)에서 자세히 이야기한
바 물, 불, 차 등이 알맞게 되어야 하는 것이니, 이
점이 차도에서 강조하는 중정(中正)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차도에서의 중정은 어디까지나 차의 간이
잘맞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모든 음식은 간이 잘 맞아야만 하듯이
차도 간이 맞아야 한다. 음식의 간이 맞을 때 그 음식의 진미(眞
味)를 맛보게 되듯이 차도 간이 잘 맞아야만 좋은 차가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들 모든 인간생횔에서도 중정(中
正)을 잃지 않는 것이 찹
멋인 것이니, 이 점이 바로 차의 생활을 통해
인간생활의 중정의 도(道)를 발견하고 치우침 없는 생활태도 사고방식들을 유지함으로써 온전한 생활 영위할
수 있게
된다는 근거이다. 도(道)는 생활에 있고, 생활 그것은 바로 중정을 잃지 않는
온전한 것은 말한다. 중정을 잃지 않는 온전한 생활이란
제 빛깔(自己本色),제 질수 (自然의 妙理)로 제작(天作)에 이르는 것이니, 원효성사〈元暎聖師)가 말한 ‘묘계환중(妙契環中)'즉 ‘용하계 중정의 대도(大道)에 계합한다’는 것을 음미해 불필요가 있다. 원효의
‘묘계환중’은 유무(有無), 진속(眞俗), 염정(染淨), 시비(是非)의 양극(極)의 치우침을 여의고도, 그 중간에
처하지 않고 독정(獨淨)한 일심(一心)의 원천(遠天)으로 환원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옳은 이치가 아닌 듯
하면서도 이치가 지극하고,
그렇지 않은 듯 하면서도
크게 그러한 (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바로 그것을 말함이다.
간이 맞는 좋은 차의 음미를 통한 생활에서의 중정의 유지,
이것은 바로 음식의 간이
잘 맞아야 참된 맛이 있듯이 사람이 중정을 잃지 않을 때 참맛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간이 맞은 차의 진미(眞味), ‘묘계환중’의 생활, 이런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멋’이란 말과도 크게 통하는 바 있으니 이점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기로 한다. 차인의 본회(本懷)는 법희선열(法喜禪悅)을 양식으로 삼고,
묵묵한 대자비 (大慈悲)의 행원(行願)을 그 목표로 한다. 차인은 한 잔의
차를 통해 한없는 은혜와 감사를 느끼며, 그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차인은 한 잔의 차로 목을 축이되, 그
차를 통해 무한한 은혜를 느낀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天地) 대
자연의 한량없는 은혜가
깃들여 있다는 말이 다. 때문에 이 때 차인은 정성과
공이 깃든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는가 하고 스스로
반성하게 되며, 따라서 어떤 순간적인 갈증의 해소나차의
맛과 향기에 끌려서만 탐하지는 않는 것이다. 한 방울의 물 한 잔의 차를 통해
한없는 은혜로움과 감사를 자각할 수 있을 때 그의 생활은 기쁘고 반가운 것으로 변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인의 심정을 차성(茶聖)
초의는 그 참모습 나타날 때 환희스러워 어떠한 심정인지 더욱 간절키만 해 (一廻見面一廻歡 有甚情懷可更切) 라고 읊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한 잔의 차를! 통
해 만유(萬布)의
진면목 (眞面目)의 나타남에 환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은(知恩)의 심정이 절실할 때 대비원(大悲院)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도 더욱
굳어지는 것이다. 수많은 인생행로 난관 있다 해도 엄연히 비원대로행하고자 (三十柱杖會不畏 等閑隨雲下巀嶭) 라고 한 초의의 차시에 의한 구절은
이러한 심정을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다(至恩報恩)는
것은 바로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되며,
이것은 자비(慈悲)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가는 길에 수없이 많은 장애와
관문이 앞을 가로막는다고 해도 두려움으로 물러남이 없이 오직 크나큰 비원을 성취하고
말게 된다. 인생의 천만사(千萬事)가 다 그 소종래(所從來)를 따져 보면 봄눈처럼 허무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생활중에서 결코 꺾아 없앨 수 없는 일단이 있으니. 이것은 바로 지은보은(知恩報恩)하는 감사의 기쁨 즉 법희선열(法喜禪悅)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지은보은'하는 기쁨으로 차를
마신다면 비록 차를 지나치게 탐한다고 해도 허용될 수 있다고 초의는
말했다. 법희선열의 생활이야 말로 용하게도 진리의
생활에 계합(契合)한 것이므로 “불연지대연 무리지지리(不
然之大然 無理之至理)”하는 온전한 생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온전한 생활, 그것을 일러 알뜰한
살림살이 올바른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말의 ‘살림’이란 말의 어원은
‘살리다’라는 타동사에서, ‘삶이라는 말은 ‘살다’라는 자동시에서 연유된 것이니,
이 ‘살립’이나‘삶’이란 말이 이미 내 포하고 있듯이 ‘알뜰한 살림살이’,
‘올바른
삶’이란 바로 어떠한 것도 죽이지 않고 잘 활용해 씀(妙
用)으로서 그것의
가치와 공용(功用)을 최대한으로 발휘 하게 하고 살려 간다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식물이나 동물만을 죽이지
않고 살려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주변의 모든 것을 선용(善用)하고 활용하여 그것의 지닌바
사명을 크게 살려 가는 것이 바로 ‘살림살이’인 것이고, 이 ‘살림살이’를
잘하는 생활이야 말로 올바른 삶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잘 살려가고 알뜰한
살림살이를 하고자 해도 자비로운 마음,
‘지은보은’ 하는 알뜰한
마음이 없고서는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지은보은'하는 확실한 자각,
이를 통한 자비의 실천만이 온전히
살려 가는 길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바로 자심불살(慈心不殺)인 것이다. 차인의 알뜰한 차살림은 곧 법희선열을
양식으로 한 대비원(大悲院)의 실천에
있고, 묘용(妙
用)에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