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茶生活의 史的考察

 

 

1.     新羅時代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차생활에 대한 사적 고찰을 할 것 같으면, 대체로 차나무 엽아차(葉茅茶) 이전의 차생활과 차나무가 역사상 등장한 이후의 시대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차 나무가 역사상 등장하기 이전의 차를 말하면 초의 선사 (草衣禪師)가『東茶 領』에서 언급한 백산차(白山茶) 즉 장백산중(長白山中)에 있는 식물의 잎을 따서 알맞게 물에 달여 마셨다든지 또는 오곡 특히 보리, 콩등을 볶아달여 마셨다던가그 외에 오갈피, 오미자(五味子), 구기자 (拘紀子) 등의 열매를 따서 마시던 시기를 말한 다. 이것은 건국 초부터 삼한 한사군시대에 있어서는 이미 한족(漢族)이 우리나라에 와서 수백 년간 한민 족(韓民族)과 함께 섞여 실아왔던 관계로 차는 자연 한토(漢上)로부터 직간접으로 그 마시는 기호 취미와 실제로 차나무의 이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그러나 실제 우리 한토(韓土)에 차나무가 나타난 것은『三國史記』의 기록에 밝힌 바와 같이 선덕여왕 시대부터이다. 흥덕왕 3년에 입당회사(入唐廻使)인 金大廉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오자 왕은 그 차씨 (茶種) 지리산(智媒山) 남녘에 심계 하였다. 이것은 丁茶山선생이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오늘날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에 나생(羅生)되어 있는 차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지리산 화개동에 있는 쌍계사(雙 破寺)의 창건 연대가 신라말 () 진감국사(眞鑒國師) 시대이므로 절도 없는 화계동에 심었을 리가 없다는 이유로, 차나무를 처음 심은 곳은 구례(求禮) 화엄사 (華嚴寺) 근처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화개동에는 쌍계사 창건 이전에 이미 옥천사 (玉泉寺)라는 옛절이 있었으며 그곳의 기후 풍토가 차나무 발육에 가장 적당하고 지금에 와서도 그 근처가 다른 어느 곳보다 가장 발육이 왕성하고 가장 많이 나생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茶山 선생의 견해가 역시 타당한것같다.

그리고『三國史記』에 의하면 흥덕왕 3년 에 이르러 이 차생활이 성행했던 것을볼수 있으며, 경덕왕이 연승 충담사 (緣僧 忠談師)를 궁중에 맞아서 차를 마신 기록과 이 기록 가운데에 충담사가 앵통(櫻 筒)을 졌는데 그 안에 차구(茶具)가 구비되어 중삼중구(重三重九)마다 팽차(烹茶)하여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공양(供養)하였다 한다. 다시 왕의 청에 따라 일구(一祗)의 헌차(獻茶)에 왕과 시신 일동은

 

차의 기미(氣味)가 신기하여 입안에 이상한 향기가 가득 찼다

(茶之氣味異常區中異香郁烈)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 등은『三國史記』에서 볼 수 있으며, 이 충담은 안민가(安民歌)와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의 작자로서 유명하다.

또한 고려 중엽의 문인인 이곡(李 穀)의 기행문-『동 유기(東遊記)』 가운대에 그가 사선(四仙)들의 차구가 동해빈(東海濱) 지방에서 실물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을 목격하였다 한다. 경포대에도 옛적 화랑들이 차를 마시던 석조 등이 있었고, 한송정(寒松亭)에서도 사선들의 석조(石竈)와 석정(石鼎 돌 솥) 등이 전하여 있었다 한다. 이를 미루어 보아 신라시대의 통일성업을 성취한 화랑들은 이미 차생활의 모든 범절을 체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 화랑의 그 불타는 의기(義氣)의 근저(根抵)를 이루는 차생활의 깊은 뜻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차를 마시는 민족이러야 흥한다”는 茶山선생의 말을 연상하게 된다.

이어서 고려의 대학자인 李奎報가 전라도 扶安 邊山에 있는 원효방 (元曜房)을 심방하고 元唯와 뱀백() 간의 차생활에 관해 홍미 있는 옛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전감국사의 비문(碑文)에도 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으며, 또한 화랑의 차생활을 참고하여 볼 때 차와 신라 호국불교(護國佛敎)와의 관계도 엿보게 된다.

그러면 차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차생활은 모든 방면의 진리를 자기 자신의 체험에서 찾아 그 참됨을 스스로 깨치고, 참으로 위대한 것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면의 참 된 체험에서 얻어진다는 오묘한 경치를 체득하게 해 준다.

그러므로 화랑들이 일심으로 관찰한 것은 ‘卽是光明覺照’의 세계였고, 이 각조의 세계는 참으로 밝은 것이었으며, 모든 것이 한 방향으로 나갈 것을 널리 비춰준다. 이것은 모든 쟁론(爭論)을 초월한 것으로서 자연 대조화(大調和)의 평화를 이룩하계 하는 멋생활이었다.

이러한 차생활의 멋은 그 형상도 없는 것이며 무엇을 한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 큰 사랑이었으므로, 그 어떤 때 그 어느 곳에서나 인간다운 참생활을 잃지 않고 누리는 생활인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떨떠름하고 시고 달고 쓰고 짠 인간사회의 모든 삶의 맛을 차를 통하여 움미하고 초극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차는 삶의 떨떠름하고 신맛을 재생시키면서 정화시켜 정신의 원력 (原力)을 회복시켜 주었던 것이다. 실상 창조의 원동력은 이곳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연고로 지금까지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인물이나 기타 일상 일어나는 일들이며 제반 도구등을 평할 때 대개는 이 미각을 빌려 논평하는 수가 많다. 이를테면 “그 사람 싱거운 사람이다”, “그 여자 찹 짭짤하다”, “저 사람은 시고 건방지다” 하는 등의 습관으로도 보아 이 차생활에서 영향이 미친 것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으며, 이것이 실상 차와 현실과의 관계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차생활은 위대한 현생활(現生活)을 가져온다. 현실을 등지고 도피하는 것을 차생활로 착각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丁茶山 선생이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차 를 모르는 민족은 쇠()한다”고 언급한 것은 이러한 사실과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음에 일러두고 싶은 것은 우리들이 ‘차’라고 발음하는 데 대해서 올바른 지견을 갖지 못한 이가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도 이 ‘茶'를 ‘오차’라고 발음하는데, 이러한 일본 발음은 그 유래가 신라 당시의 우리 발음의 소전(所傳)인 것이다. 그 이유로는 ‘茶'자의 음은 장가반(丈加反) 또는 택가반(宅加反)으로 되어 있는『강희자전(康熙字典)』등의 문증(文證)에서 볼 때에 중국에서는 ‘차’로 와()하여 발음된 것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그 음에서 짐작할 수 있다.

또 그 시대에 우리나라 불승(佛僧) 들이 일본에 불교를 널리 전파하여 왕래가 성행하였으니, 당시의 사회상에 비추어 볼 때 불교문화인의 본능적인 기호생활 (昭好生活)이던 차생활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하겠다.

중국의 ‘茶’가 우리나리에 와서 ‘차’로 정착되었던 것이고, 그것이 그대로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의 차도(茶道)를 낳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茶'는 ‘차’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찻집’, ‘차례,’ ‘찻종’ 등으로 부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역사적으로 정당하다.

 

 

2.     高麗時代

 

고려시대의 차생활을 설명하기 전에 앞서 본 지리산 죽로차 (竹露茶)에 대한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에 이름이 드러나 있는 이 죽로차는 천하의 명차 (名茶)로 신라 홍덕왕 3(828)쯤에 김대렴 (金大廉)이 당나라에서 가져와 심은 후로 우리나라의 차인(茶人) 정다산과 차성(茶聖) 초의(草衣)등 여러 대가들이 이 화개동 소산의 죽로차를 찬양하였다.

특히 초의는, 화개동 죽로차 나무가 나 있는 지역은 무려 4~5십리나 되므로 차숲, 차밭으로서는 이곳보다 더할 곳이 없으며, 또한 이 죽로차 역시 천하에 제일 가는 차라고 칭찬했다. 그는 그 까닭을 설명하기를, 차는 본래 돌자갈이 있는 곳의 차가 상품(上品)이고 사질양토(砂質壤上)가 그에 버금하며, 특히 산골에 있는 것이 더욱 좋다고 했으니 바로 이 화개동 차원(茶園)은 이에 알맞다.

전부가 골짜기로 자갈이 섞여 있는 사질토에다가 산의 영기(露氣)가 서린 안개에 싸여 생장되고 있으니, 차에 대한 모든 조건이 자연적으로 구비된 곳이어서 차의 약성분(藥成分)도 우수하다. 그러기에 차성 초의(艸衣)는 자기가 평가한 화개동 차원의 차에 대하여 중국에서 제일가는 차인(茶人)인 이찬황 (李贊皇)과 육우(陸羽)도 자기의 말에 과장이 없음을 시인할 것이라 하였다.

또한 완당 김정희(阮堂 金正喜) 선생은 화개동 죽로차는 중국에서 제일가는 용정(龍井),두강(頭綱) 보다 질이 나으며, 인도의 유마거사(維摩居士) 주방 (廚房)에도 이처럼 좋은 묘미(妙味)의 차는 없을 것이라고 극찬하였다.

이러한 천하 명차는 다시 고려시대에 와서 고려차완(高 麗茶腕)을 만나게 되었다. 말하자면 고려시대는 천하명차와 천하명품의 자기-고려 차완이 결합함으로서 차생활의 절정을 이루었다. 비유컨대 용()이 여의주(如意珠)를 얻은 격이라고나 할까!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팔관회와 국가제의(國 家祭儀)에서 고대의 습관이 통행되어 제주(祭酒)와 이 차가 공히 사용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차가 더 중하게 여겨졌던 것이 다.

그리고 군신 간에 이 차에 대한 의식이 성행하였던 것은 물론이요, 임금으로부터 태자이하 여러 신하에게 성대한 사차식(賜茶式)을 빈번히 행하였으므로, 하나의 폐단이 되어 이 예식의 폐단을 막기 위하여 성종(成宗) 원년에 중신(重臣) 최승로(崔承老)의 상소()로 보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차는 그 건실한 인간 생활에 있어서 기호 이상으로 예식화하고 형식화하여 고정화한 말절(末節)에 구속되어 오늘날 유교의 형식화한 예문(禮文)과 또는 지금 일본 등지에서 보는 차도의 형식화 또는 사차화한 것과 꼭 같은 일이 우리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풍조로는 이러한 불건실성을 건실히 고치려 는 것보다 도리어 그것을 개탄하고 개혁코자 하는 최승로를 조문(制間)키 위하여 차를 보내기까지 하였다.

고려 인종 원년(1123)경에 송나라 사절단 중 일원이었던 서긍(徐 約이 저술한『선회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鬪經)」의 기록에

 

土産茶 味苦, 不可入口. 惟貴中國臘茶, 幷龍鳳賜團. 自錫𧶘之外, 商賈亦通販, 故邇來頗喜飮茶. 益治茶具, 金花烏盞, 翡色小甌, 銀爐湯鼎, 皆竊效中國制度. 凡宴則烹於廷中, 覆以銀荷, 徐步而進. 候贊者云, “茶遍乃得飮” 未嘗不飮冷茶矣. 館中以紅俎, 布列茶具於其中, 而以紅紗巾冪之. 日嘗三供茶, 而繼之以湯. 麗人謂湯爲藥, 每見使人飮盡必喜, 或不能盡以爲慢已, 必怏怏而去, 故常勉强爲之啜也

(고려에서 생산되는 차[土産茶]는 맛이 쓰고 떫어 마실 수 없을 정도이다. 〈고려 사람들은〉 오직 중국의 납차(蠟茶)와 용봉단차[龍鳳賜團]를 귀중하게 여긴다. 하사해 주신 것[錫賚] 이외에도 상인들이 또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매우 좋아한다. 더욱이 〈고려 사람들은〉 다구를 잘 만드는데, 〈예를 들어〉 금색 꽃 무늬가 그려진 검은 잔[金花烏盞], 비색의 작은 찻잔[翡色小甌], 은제 세발 화로[銀爐湯鼎] 등은 다 중국의 다구를 모방한 것이다. 대체로 연회 때는 궁궐 뜰 가운데서 차를 끓여서 연잎 모양의 은 뚜껑[銀荷]을 덮어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다. 그런데 임무를 맡은 사람[候贊者]이 “차를 다 돌렸다[茶遍]”라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냉차(冷茶)를 마시게 된다. 객관 안에서는 붉은 소반[紅俎]을 놓고 그 위에 다구를 벌여놓고 붉은 비단 보자기[紅紗巾]로 덮는다. 매일 세 차례 차를 마시는데, 뒤이어 또 탕()을 내놓는다. 고려 사람들은 탕을 약()이 라고 하는데, 사신들이 그것을 다 마시는 것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혹시라도 다 마시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면서 원망하며 가버리기 때문에 항상 억지로 그것을 다 마셨다.)

 

이라 함을 보아 차회식의 사치스러움 - 값진 외국산 차와 또는 부화(浮華)스러운 차구의 사차 등은 모두 송대의 그것과 같은 제도의 형식으로 볼 때 확실히 고려시대에는 지나 대륙에서 유행되던 차식을 모방하였던 것이 분명 하며 또한 차회의 그릇된 타락의 일로를 족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말하여 둘 것은 이른바 차()와 선()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에 따로 항목을 설정하여 살펴보려고 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은 우선 여기에서는 생략해 두기로 한다. 다만 중국의 불교사(佛敎史)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차()와 선()이 결부된 이른바 ‘차선일체(茶祈一體)’의 형태는 고려에서는 적어도 그 중엽 이후에 가서 일반화되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고려 초기까지는 차와 선이 결부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차인이 곧 선객(禪 客)으로서 차선일치(茶禪一致)의 경지가 한껏 추구되고 여기에 고려 차완(茶腕)의 예술미가 가미되어 격조 높은 차생활이 영위되었던 것이니, 그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고려 차완의 진면목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고려말 이행(李行)의 방문을 받은 상곡(桑谷) 성석린(減石 )은 충주, 원주 (原州)의 물맛이 천하제일이라고 꼽았다. 그 이유는 금강산 같은 명산의 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강중의 우중수(牛重水)를 제2라 하고, 속 리산의 삼타수(三陀水)를 제3이라고 말하였다. 옛 차인들은 차생활의 체()가 되는 물맛에 이르기까지 이렇듯 예민하였던 것이니, 그들의 차생활의 경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3.     朝鮮王朝時代

 

조선 왕조 오백년간에는 대대로 궁중에서는 관례이던 차례의 제전이 계속되고, 한편 민가에 있어서도 차인이 끊이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선조 때의 명승(名 僧) 서산대사 (西山大師 1520~1604)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유명한 차시(茶詩)에서

 

만국의 도성(都城)은 개미집과 같고

천가 호걸들은 하루살이와 같도다

밝은 달 흰 구름을 벗한 차회(茶 會) 자리에

차솥 (茶鼎) 물끓는 소리 하염없이 둘리네

(萬國都城如議塚 千家豪傑若隨鷄 一窓明月淸虛杭 無限松風韻不齊)

 

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서 볼 때 차승(茶僧)인 그는 명월을 촛불로 벗하고 백운()을 베개로 벗 심아 차솥에서 무한히 끓는 물소리(松風)가 한갖 소리만이 아닌 무한성을 고요히 관찰하였다고 볼 때에 청허(淸虛) 또한 철인(哲人) 생활의 차승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앞서 고려 말의 정포은(鄭團隱) 선생은 그의 생애를 읊은

 

보국(報國)에 공효 없는 늙은 서생(書生)

차 마시는 버룻되어 세정(世情)올 모르도다

눈보라 치는 밤 고요한 집에 홀로 누웠으니

돌차솥 물 끓는 소리 정답게 들리도다

(報國無刻老書生 契茶成辯無世情 幽齊獨臥風雪夜 愛聽石昇松風聲)

 

의 시를 통하여 불 때 그가 얼마나 고독에 처하였을 무렵에도 차에서 고요한 경세가(警世歌)다운 침착성을 보이고 있음을 움미할 수 있다 하겠다.

또 다산(茶産)이라고 자호(自號)한 정약용(丁若鏞) 1818년 유배지인 강진 (康津)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폴리어 서울로 돌아올 때

 

곡우절 무렵에 어린 차잎을 따다가 들볶아 차 한 근을 만들고, 입하절 (立夏節)전에 잘 익은 차 잎을 따서 병차 (耕 茶) 2근을 만둘어 시찰 (詩札)을 동봉(同封)하라

(穀雨之日取微茶炤作萱斤立夏之前取晩茶作耕二斤右菓一斤耕茶二斤與詩札同封) (‘茶信契節日’에서)

 

라고 부탁하고 있다. 다산은 차신계(茶信契)를 조직하여 그 절목(節目)까지 제정했으며 차의 적기(適期) 채취와 제품법까지를 상세히 이르고 있는데, 그는 어디까지나 경세가적 견지에서 이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다산은 그보다 앞서 적거(諦居) 중이던 보은선방(寶恩禪房)에서 10세 가량 연소한 아암 혜장(兒庵 忠藏)에게 차를 배우는 한편, 그 아암에게 역()을 가르쳐 주었다 한다. 이 아암은 지금 전남 해남군 대흥사 (大興寺)의 학승(學僧)이었는데, 대홍사로 말하면 당시 조선왕조의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에도 불구하고 임란공신 (壬 湖功臣)-서산대사 (西山大師)의 수충사(蘭忠祠)라는 서원이 이곳에 있는 관계로, 그 이후 대대로 학문승이 즐비하게 배출되어 12대종사 (十二大宗師) 12대강사 (十二大講師)라고 호칭하는 학승이 나오기도 한 명찰 (名刹)이다.

그뿐 아니라 그 지대가 남해, 강진, 보성 등 전라 남단인 데다가 제주도로 가는 길목에 처하여 있어서 조선왕조시에 불우 정객의 유적지(流 諦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불우한 때를 만나 정치가벌 (政治家閥) 인사의 내왕이 빈번하여 문화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에 놓였던 곳이며, 게다가 차의 명산지였던 관계로 산야의 차인들이 차생활을 영위하는데 가장 적당한 장소이기도하였다.

또한 대흥사의 초의 의순(艸衣 意拘 1786~1866)은 다산보다 24, 아암 보다 14세 연하요,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와는 정동갑이면서 완당보다 근10년 더 장수한 학문승이었다. 그는 불교학문에 있어 특히 선리(禪理),율문 (律文), 범고(梵考) 등에 조예가 깊었고 그 외에 제자서(諸子書)에 도 정박하였으며 시문, 서화등에 도탁월한 경지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차에 대해서는 한국의 육우(陸 羽)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는 김정희와 서로 마음을 허락한 사이로 깊이 사귀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차생활에 대한 서신에서 완당은 승설도인(勝雪道人)이라고 하는 차이름을 따라 그 아호(雅 號)를 사용하기까지 하였다.

초의는 정조(正祖)의 부마(駙馬)인 홍현주(洪顯周 호는 海居道人)가 진도(珍島) 부사 변지화 (호 北山道人)를 시켜 초의에게 차도를 청문하므로 그는 동차송(東茶項) 일편을 지어 홍현주에게 보낸 사실이 있다.

그는 그글에서

 

근자 海居 洪顯周로부터 차도(茶道)에 관한 물음을 받고, 나는 옛사람의 전하는 뜻을 따라서 삼가『동차송』한편을 기술하여 진헌(進 獻)하였다.『동 차송』이 말에 창달치 못하였으나 옛사람이 지은 본문을 초하여 나에게 묻는 뜻에 대답 하는 것이다. 글이 번거로워 높은 물음을 더럽혀 극히 송구스럽다. 혹시 가고 (可考)할 만한 글귀가 있으면 고치는 노고를 아끼지 마십시오.

 

近有北山道人承敎, 垂問茶道. 遂依古人所傳之意, 謹述東茶行一篇以進獻. 語之未暢處, 抄列本文而現之, 以對下問之意. 陳辭亂煩, 冒瀆鈞聽, 極切主臣. 如或有句可存者, 無惜一下金篦之勞

 

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형 홍석주(洪奭周) 역시 귀족출신의 신분으로서 경학(經學)의 대가(大家)이면 서 도격조 높은 차인이었다.

 

한편 초의대사는『차신전(茶神傳)』의 끝 부분에서

 

무자년 곡우절 무렵 스님을 따라 방장산(方 丈山)의 칠불(七 佛) 아자방 선원(亞字房 禪院)에서 등초(騰抄)해 와서 다시 정서(止因)하고자 했으나, 마침 병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때마침 시자(侍者)들이 있는 방에서 차도를 알고자 하므로 사미승(沙彌僧) 洪으로 하여금 정초(止抄)하계 하였다. 또한 병이 끝나지 않으므로 좌선(坐禪)하는 틈틈이 굳이 붓을 들어 마침내 끝냈다. 유시유종(有始有終)이 어찌 군자(右子)에게만 있겠는가. 절간 수도장에도 간혹 趙州스님의 처풍 (茶風)이 있으나, 그러나 다 알지 못하는 고로 이것을 초하여 보이는 것이니 가히 두렵다. 경인년 봄에 병중의 休庵이 눈 내리는 창가에서 화로를 안고 삼가 쓴다.

 

戊子雨際, 隨師於方丈山七佛亞院, 謄抄下來. 更欲正書, 而因病未果. 修洪沙彌, 時在侍者房. 欲知茶道, 正抄, 亦病未終. 故禪餘强命管城子成終. 有始有終, 何獨君子爲之. 叢林或有趙州風, 而盡不知茶道. 故抄示可畏 庚寅中春, 休菴病禪, 虛窓擁爐, 謹書.

 

고하였다.

 

초의는 차의 고향 화개동의 칠불암 (七 佛庵)에서 등초(讚 抄)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실은 그의 저술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이『차신전(茶神傳)』의 문체와 그의 저작인 “동차송(東茶項)” 의 문체와 술어가 꼭 같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 글의 끝머리에 보이는 “叢林或有趙州風 而盡不知茶道 故抄示可畏”라함을보아도 알수 있는 것이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