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제 생각해 보니 家嚴이 늘 즐겨
마시던 茶에서 비롯한 나의 차생활은 열네 살 되던 해를 전후한 그 무렵 나로서 생각한
바도 있었고,
특히 두 어버이의 뜻하던 바를 따라 부처님 곳을 찾게 되면서부터 더불어
육십여 년 간 맺어지게 되었다. 그 부처님 계신 집이라는 곳이 지금
내가 거처하는 多率寺이다. 이 다솔사로 말하면 서기 504년
靈嶽스님이 지었다는 절로서 그 절 주변에는 雀舌 나무-다
시 말해서 차나무가 숨겨져 자라고
있었다. 그 당시 늙은 스님들의 口傳에 의하면
이 多率寺 雀舌茶의 風味가 河東花開茶 보다도,
求禮 華嚴寺 茶보다도
낫다는 말이 있었으며, 심지어 그것을 실험까지도
하였으니,똑같은 분량의
물과 같은 조건아래 소고기 살점을各各의 茶와 달여 본 결과 화엄사 所産茶는 그 살점이 단단하고,
화개소산
차는약간부드러워져 물렁하며, 다솔사차에 달여진
것은호렁흐렁 물러 그 모양이 없어질 정도였다는 말이 있었다.
이 같은 이야기는 그 세 종류의 차가 갖고 있는 성질에 있어 이 다솔의
차가 매우 우량한 것임을 표시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나는 가정에서부터 받은
인상 그대로 차에 대한 홍미를 갖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찻잎을 따서
茶를 만들기도 하였고, 그 만든 것을 달여 마시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 뒤로부터 海印寺에 가서 바라던
八萬大藏經각을 참배케 되었고,
그 곳에서 여러 스승님께
佛經을 배우기도 하고, 傳道의 수행을 지도하는 스님들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그 당시의 수삼 백 명의
道伴과 함께 聞法聽講 如說修行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의 隊任에
참여케 된 것은 우리 卍海 韓龍雲先生의 영향을 받은 바였다. 그러한 일을 겪고 난 삼년쯤 지난 후에 日本의
수도인 東京에 가서 뛰어난 고국 친지들과 交遊하기도 하면서, 그 나라의 紹神과 명망 높은 佛僧들과 사귀는
좋은 기회도 갖게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내가 어릴 적부터 즐겨
온 暗好品이었던 茶를 그네들이 盛히 마시며 줄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이 마냥 나에게는
홍미롭게 여겨졌으며 이 차에 관한 그 분들의 아름답고 貸한 예속을 알게도 되었다. 그리하여 차츰 나의 심정으로는
그분들이 행사하는 飮茶의 예절과 우리 나라에서 傳來하여 오는 예속과 자연 비교하여 불
기회를 갖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점을 마음 깊이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태어난 겨레며, 자라난 지역을
생각하계 되었고, 이러한 때에 우리들이
겪어야하는 것이 어떤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과정을 어떻게 통과하며, 어떠한 代案이 있어야 하는가,
이와 같은 것을 때로는 뼈 저리게 느낀 일도 있었으며 때로는
뜻하지 않던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럴 때 마다 이 茶에 들어 있는 맛을 岭味하면서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나는 苦樂 간에 茶와
더불어 오십여 년 이상 반세기에서 일세기를 보고 가는 세월이 흘러 간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 참고 되고
생각 되던 바 있어「茶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써본 것이 이 표제에 명시된『韓國 의 茶道』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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