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서와 종교

안 선재 (서강대학교)

초서를 연구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어 왔고, 지금도 계속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학문적 전문가들에 의한 연구와 교실에서 초서를 가르칠 때 요구되는 접근 방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문적 초서 연구는 이야기의 반어적인 전략에 관한 담론, 사회 속에서의 권력 행사, 성이나 성의 정체성 등의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시대적 유행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종교는 초서에서 보에티우스라는 서브 텍스트의 존재가 자유와 필연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논쟁을 상당히 불러일으킴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나 프로이드적인 접근 방법이 아니면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교실에서는 시간의 제한과 학생들의 능력의 한계로 인해 초서의 작품을 임의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가령, 강의 계획표가 『캔터베리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면 「기사의 이야기」는 작품의 길이 때문에 수업에서 종종 제외되지만,「바쓰의 여장부 이야기」의 경우 여장부의 덕분에 여성문제에 관하여 소개될 수 있는 다양한 질문들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엄청난 인기를 누린다. 학생들의 재미있는 수업을 위해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나 「수녀원장의 이야기」는 꼭 포함되지만,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는 『캔터베리 이야기』와 대체되지 않는 이상 일반적으로 강의 계획서의 어느 항목에도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논문은 "누가 「시골사제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무엇을 읽느냐?" 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떻게 읽느냐?" 라는 질문이다. 지금 우리는 『캔터베리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있는가? 초서의 작품을 읽으면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것을 얻을 만한 다른 작품이 있는가? 지난 백여 년 동안 「총 서시」는 찰스 디킨스의 등장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생동감 넘치는 등장인물들의 "묘사" 때문에 위대한 걸작으로 환영받으면서도 종종 소외당해 왔다. 지금도 「총 서시」는 초서 수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등장인물의 묘사는 때때로 "계급풍자"의 예로 여겨져 "사회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다루어진다. 우화적인 이야기들이 과거에는 부도덕한 것으로 비난받고 읽혀지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우리도 단편적으로나마 남아 있는「종자 이야기」에 대한 밀턴의 열정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방앗간 주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책장을 넘겨 다른 이야기를 뒤쫓아가자" 라고 말한 순례자 초서의 제의는 오늘날 교훈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들에 자주 적용된다. 이런 모든 면에서 『캔터베리 이야기』는 각각의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문학적 정체성을 손상 당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받아들여져 읽혀지고 가르쳐질 수 있는 이야기 모음집으로 간주되고 있다.

본 논문은 종교적인 질문이 『캔터베리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며 작품의 모든 부분에 통일적으로 접근하는 열쇠라는 것을 검토하기 위해 시작한다. 이 문제는 최근에 나온 로저 엘리스(Roger Ellis)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종교적 담화의 양상』(Croom Helm, 1986)이라는 책의 주제였다. 초서의 종교적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은 미니스(A. J. Minnis)의 『초서와 이교문화』(Cambridge, 1982)에서 논의되고 있다. 두 책이 본 연구의 출발점 역할을 할 것이고, 이를 통해 종교적 관점에 입각한 초서 읽기가 단편적이고 미완성으로 이루어진 초서의 위대한 작품을 더욱 깊이 있고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임을 보여줄 것이다.

최근에 초서를 가르치는 사람들 중 몇 명이 전자 우편 방식을 통해 수업시간에 『캔터베리 이야기』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제시하는가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되었다. 토론의 핵심은 초서 자신이 말하는「멜리비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특히『캔터베리 이야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시골사제의 이야기」와 작품을 결론짓는 초서의「철회」(Retraction)를 포함한 많은 이야기들이 간과되고 있는데, 실제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수업에서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초서는 종교개혁 시대에 무엇보다 그가 쓰지 않은「농부의 이야기」덕분에 종교개혁의 선지자로서 작품이 출판되고 읽혀졌다. 정전(Canon)에서 초서의 제일 위치는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먼저 초서의 작품에서 "종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서의 허구 세계에 종교적 측면이 있다는 것은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측면이 전적으로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다.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기사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많은 이야기들에는 파괴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도 신들을 등장하기도하며 기독교 이전의 우주를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캔터베리 이야기』에 그 초점을 집중해 보면, 캔터베리로 향하는 순례여행은 교회 건물 내에 있는 순교한 대주교의 무덤을 찾아가 그곳에서 종료 의식을 수행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아울러 최소한 명목상이나마 기독교인들의 순례라는 점에서 그 출발점부터 작품은 종교적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최종 목적지가「총 서시」나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실제로 언급되지 않고 숨겨지는 방식은 초서의 신중한 은폐 전략을 암시해준다.

「총 서시」에서 세부적으로 길게 묘사된 일곱 명의 순례자들은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교회와 관련되어 있다. 수녀원장, 수도승, 탁발승, 교회서기, 시골사제, 소환리, 면죄부 판매인은 열 네 명의 속인들(기사, 종자, 향사, 상인, 법률가, 시골유지, 요리사, 선장, 의사, 바쓰의 여장부, 농부, 방앗간 주인, 식료품조달인, 청지기)과는 분명 비교된다.

교회서기와 시골사제―교회서기는 열심히 학문에만 전념하고 시골사제는 진정한 복음 말씀대로 살고 있다―를 제외한 다른 교회 인물들은 신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삶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수녀원장이 애완견을 애지중지 키우고, 죽은 쥐를 보며 울며,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입을 닦는 것은 종교인에게 중요한 흠이 될 수 있다. 수도승은 많은 돈을 들여 사냥용 말들을 키우면서도 정작 기도는 자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다른 이들도 탐욕, 폭식, 음탕함에 물들어 살지만, 그 가운데서 특히 소환리와 면죄부 판매인은 기독교가 지향하는 이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속인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기사와 종자처럼 향사를 비롯하여 법률가나 요리사의 경우, 이들이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시골사제의 모습과는 매우 상반되게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다. 시골사제의 동생인 농부만큼은 속인들 중에서 올바른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비추어볼 때,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활동은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여기지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의사의 황금에 대한 사랑, 청지기와 방앗간 주인의 도둑질, 잔인한 해적으로 그려지는 선장의 모습이 그러하다.

최근의 연구들은「총서시」를 배경으로 "계급풍자"와 "반 기독교적인 풍자"를 자주 언급하기도하며 대부분의 독자들은 내레이터의 목소리에서 풍자나 아이러니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 또한 놀란다. 『캔터베리 이야기』의 틀(성지순례 배경)에서 내레이터는 일반적으로 "순례자 초서"로 불린다. 그것은 내레이터가 『캔터베리 이야기』의 "작가"인 초서와는 분명히 별개의 등장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분법의 장치 때문에 작가인 초서는 그런 찬사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조차도 "훌륭한" 이라는 말을 자주 들먹임으로서 초서는 입가에 조용히 번지는 풍자적 웃음을 짓게 된다고 많음 비평가들은 말한다.

순례자 초서는 캔터베리로 동행하는 사람들과 놀랄만한 거리감을 두고 이들은 묘사한다. 예를 들어, 그는 수도승의 의견을 비판 없이 수용하며 이들 삶의 다양한 모습들에 대해 "좋은," 심지어는 "완벽한" 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한다. 선장은 "좋은 동료"이고, 의사는 "매우 완벽한 의사"이며, 바쓰의 여장부는 "좋은 아내"이며 "훌륭한 여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청지기에게만은 그러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 않으나, 소환리의 경우, "잡놈치고는 상냥하고 온정도 있는 편이었으니, 그보다 더 근사한 악한을 찾기 어렵다" 라고 작가 초서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흔히 "풍자"라고 일컬어지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있으며,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판단은 내레이터로부터 아무런 암시도 받지 못하는 독자에게 전적으로 맡겨진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 등장인물들이 순례여행을 시작하나, 여기서 독자는 인간의 삶 또한 전통적으로 순례로 여겨지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것은 아마도 기독교 사상에서 인간 순례의 목적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과 연결되고, 적어도 초서시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천국과 지옥, 축복과 저주라는 두 가지 가능성으로 열려 있었을 것이다. 순례자들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천국 아니면 지옥?" 이라는 질문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 순례는 아마도 반성, 회개, 개종의 시간을 순례자들에게 제공했을 것이며, 그리하여 지옥으로 가고 있던 사람도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도왔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초서를 가르칠 때「총 서시」의 마지막 부분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할애하는가? 여관주인의 소개와 여행하는 과장에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그의 파격적인 제안은 각 순례자들에 대한 묘사만큼 중요하다. 여관주인이 순례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농담하다," "즐기다," "위로하다," "즐거워하다" 등의 용어에 독자들은 주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순례자 초서는 이미 앞에서 여관주인을 "한 인간으로서 (여관주인이) 빠지는 것이 하나 없었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죄는 "유일하게 인간적"일지 모르지만, 인간다움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야기하기 시합을 제안하고, "성적이 가장 우수한 사람"이 누군지 결정하는 심판이 바로 명랑하고 남자다운 모습의 여관주인이다. 심판은 보통 하나님의 역할로 여겨지지만, 여관주인은 "가장 교훈적이면서도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을 의미할 뿐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여행도중 순례자들의 중심 활동은 이야기하기(tale-telling)이다.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읽은 이 작품에서 다양한 순례자들이 동료 순례자들에게 어떤 것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것"의 대부분은 이야기, 다시 말해서 다양한 종류의 문학적 허구들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듣고 있는 내용이 사실일까 아닐까' 라는 의문을 달지 않을 수 없다. 초서 시대에 이야기의 진실성 여부는 그 이야기의 기원이 얼마나 믿을 만한 권위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진리의 궁극적인 기준은 성서이다. 초서는 성서를 번역할 때 정확한 번역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교회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유명한 학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온갖 논쟁에서 "권위자"로 언급되었다. 대학교육은 진리를 구별하기 위해 그 같은 권위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논쟁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경향이 학생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챈티클리어(Chauntecleer)와 퍼텔롯(Pertelote) 뿐만 아니라 바쓰의 여장부도 자신들의 의견을 지지해줄 만한 권위자들과 권위있는 서적들을 부지런히 언급한다. 하지만 진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진리든지 진리와 사건의 참 의미를 알아내려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필요가 있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은 스스로 그 권위를 찾을 수 없다. 개인의 경험은 권위의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라도 권위자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야기하기를 통해 남을 가르치는 활동은 일반적으로 "저술"이 아니라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꾼은 과거의 권위들에 의해 인정받은 진리를 제 목적에 맞게 수정하여 말함으로써 청중들을 감화시키려고 애쓴다. 이러한 번역 활동은 굳이 다른 외국어로 바꾸지 않더라도 예전의 진리를 새로운 형태로 바꾸어준다.

판단하는 것은 참된 의미의 관점에서 보면 평가하는 것이다. 삶은 하나님에게 판단 받는다.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는데, 『캔터베리 이야기』의 순례자들의 경우에는 본인의 결정이 최종적이라고 선언하는 여관주인의 독재적이며 일방적인 판단을 받는다. 그는 자신이 "재미(solaas)"와 "교훈(sentence)"을 알아볼 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주장한다. 『캔터베리 이야기』가 "독자반응 비평"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사실이 아니지만, 이야기하기 활동이 본질적으로 철저히 종교적이다라는 것은 오늘날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간단하다. 시작부터 『캔터베리 이야기』의 구조는 우리에게 우리의 읽기 활동을 의식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가 우승해야 하는지에 대해 동의하게 될까? 결국에는 어떤 이야기도 우승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할까? 우리는 또한 각각의 이야기를 들을 때 이야기를 듣고 있는 순례자들과 전능한 여관주인을 계속 상기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교훈 아니면 재미? 진실 아니면 오락거리? 로마의 비평가인 호레이스가 주장하듯이 이 두 양상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재미는 죄악일까? 최고의 선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늙은 목수 존이 밧줄을 끊고 곤두박질하여 팔을 부러뜨리는 장면에서 웃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우리는 "놀라운 이야기" 라고 말한다. 다른 이야기에도 비슷한 웃음들이 존재하는데, 여관주인은 이런 웃음을 "농담(jape)" 이라고 부른다. 그는 웃음을 즐긴다. 우리도 웃음을 즐긴다. 웃음 이론을 이 작품만큼 충실하게 반영한 작품도 거의 없다. 하지만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만 생각해 볼 때, 다치거나 크게 화상을 입은 사람들, 깨어진 결혼 약속, 악용된 우정을 보고 실제 현실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웃음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고, 그 웃음은 어떤 도덕적 관점을 지지하는가? 웃을 수만 있다면 만사형통인가?

「총 서시」도 그 가운데 하나겠지만, "세상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세속적으로 묘사한 꽤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교활한 이들, 도둑놈들, 거짓말쟁이들이 의심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희생자들을 거뜬히 속이고 그것을 떠벌리며 자랑해도 이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내려지지 않는다. 몇 개의 이야기에만 "눈에는 눈"이라는 그럴 듯한 교훈이 존재할 뿐이다. 즉 복수만이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한 분명한 인간적 반응인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의로서 어떤 희망이 있으며, 부당한 고통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캔터베리 이야기』가 "미완성의 작품" 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사실이 작품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정확한 관점을 세우지 못하게 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역시 미완성의 작품이다. 『캔터베리 이야기』가 다양한 사본의 형태로 전해지는 것으로 볼 때, 초서가 죽었을 때에도 이 작품은 단편적인 형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이 단편적인 형태로 뒤죽박죽 배열되어 있다고 해서 중요한 양상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

『캔터베리 이야기』가 「총 서시」에서 시작하여 「시골사제의 이야기」와「철회」로 끝난다는 사실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여관주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이 순례 여행의 진정한 "끝"이 런던으로의 귀환과 각 이야기에 대한 그의 판결이며, 그 후의 잔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관주인에게 캔터베리와 그곳에서의 종교적 활동이 이야기의 도중 하차이자 불행한 중단을 의미할 뿐이며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만약 초서가 충분히 오래 살았더라면 이 작품이 완결된 형태를 갖추게 되었을 것이라고 어느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러한 가정이야말로 사실이 아니지 않을까? 만약 이 작품을 통제하는 천재가 제프리 초서가 아닌 서더크의 여관주인이었다면 『캔터베리 이야기』는 완결된 형태를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이라는 순례에서 진정한 목표 혹은 목적물은 무엇인가? 음식, 재미, 그리고 악한 이의 선택? 아니면 회심, 회개, 영원한 축복? 그 답은 독자 각자의 관점에 달려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캔터베리 이야기』가 대단히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삶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여관주인 해리 베일리는 서더크에서 순례가 시작될 때 순례 여행을 강탈하려고 애쓸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 자신의 제한된 통찰력으로 진실의 과정에 참여하는 한 명의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이 작품의 많은 등장 인물들처럼 그 역시 사건이 진행되는 방향을 알지 못하며, 사건을 아주 어설프게 통제할 뿐이다. 작품의 실제 결말은 여관주인의 처음 가정과 달리, 죄를 이기는 은혜의 승리에 대한 강한 확신이고, 또한 문학적 허구의 궁극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부정인 셈이다.

이것은 캔터베리에 관한 또 다른 근본적인 사항과도 통한다. 많은 이야기들이 작품 전체의 구조와 명백한 연결고리도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때로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기도 하다 (콘스탄스에 대한 법률가의 이야기, 캠비스칸에 대한 종자의 이야기, 늙은 제누어리에 대한 상인의 이야기, 아베리거스와 도리진에 대한 시골유지의 이야기, 그리고 성 세실리아에 대한 수녀의 이야기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단편적인 특징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들을 아주 쉽게 탈 구성하며, 이러한 단편적인 구성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작가인 초서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작품과 시인/작가의 관계를 "낭만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인해 『캔터베리 이야기』는 지리멸렬하고 연결이 없이 부서져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초서의 작품처럼 우리의 삶과 지식 또한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안다"(고린도 전서 13장)고 성서도 말한다. 따라서 『캔터베리 이야기』도 단편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총 서시」에서 잔인한 기사의 모습에 독자는 공감하기 어려운가? 그렇다면「기사의 이야기」에서 이야기만 분리시켜 초서가『캔터베리 이야기』를 쓰기로 의도하기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카치오의 작품을 개작한 내용으로 그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자. 하지만 그렇게 읽는다면,「기사의 이야기」가 왜 모든 주요 사본에서 「총 서시」 바로 뒤에 나와 전체 이야기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지, 그리고 이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들 사이의 주제적 연결고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기가 힘들어진다. 이 첫 번째 이야기에서 사랑은 의형제를 숙명적인 원수로 바꾸고, 고귀한 왕자들을 야생동물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그야말로 파괴적인 열정으로 그려진다. 그리스도가 아직 태어나기 전의 이교도 세상의 신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고통을 덜어주기에는 무기력하다. 인간은 가장된 조화를 지키기 위하여 고안된 임의적 잣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삶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죽음뿐이다.

그렇다면 종교의 문제는 첫 이야기부터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왜 불행한 일들이 인간에게 일어나는가? 고통은 꼭 있어야 하는가? 모든 사본에서「기사의 이야기」에 뒤이어 방앗간 주인이 여관주인의 계획을 뒤엎고 주제넘게 참견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데, 이것은 십중팔구 초서가 바라는 바였을 것이다. 순례자 초서가 말하듯이 방앗간 주인이 촌놈이고 그의 이야기가 귀족들의 세련된 작품과 대조적으로 촌스런 이야기라고 말해 버리기에는 뭔가가 부족하다. 이 두 이야기가 서로를 보완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는 좀더 얘기할 필요가 있다. 성적인 야망은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하며, 질투와 복수는 인간을 극한의 폭력으로 몰고 간다. 신들이「기사 이야기」의 알시테(Arcite)에게 행한 부당한 속임수는 방앗간 주인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니콜라스가 반죽통속에 들어가 있는 존에게 행한 장난과 유사하다.

그런데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에서만 기독교적 배경이 나타난다. 이야기의 중심에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신약성서는 노아의 방주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세례의 형상이라고 본다. 니콜라스가 존의 바람난 부인과 "성교"를 하는 사이, 모든 사람이 익사하지 않도록 갖은 애를 쓴 후 녹초가 되어 구원의 방주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노인 존의 모습은 보쉬(Hieronymus Bosch[1450-1516]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특히 지옥의 고통에 관한 종교화를 그림)의 작품에 견줄 만큼 초현실적이다. 여기서 다시 질문이 던져진다. "천국에는 근심이 있는가?" 한편으론 불평의 소리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른다." 아니 알고 있나?

『캔터베리 이야기』를 다양한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도록 돕고 그래서 그 행동을 멈추고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애쓰는 등장인물들을 작품에서 독자들은 만나게 된다. 성공 혹은 실패의 문제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판단에 맡겨지거나, 아니면 이야기꾼의 말과 삶의 일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예가 콘스탄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데, 그녀는 노아의 방주에서처럼 악인의 모든 계략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은혜로 계속 살아남아 이교도 세상의 수많은 무리를 개종시킨다.

이와 대조적으로「수녀의 이야기」에서 성 세실리아는 천국에서 성인의 지위를 받는 최고의 영예를 얻게 되는데, 그녀의 신성함은 이교도들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아서가 아니라 그녀의 순교를 통해 확인된다. 심지어 그녀는 머리가 거의 완전히 잘려진 순간에도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가르침을 전한다. 이 이야기는 문학적인 기교는 상당히 떨어지지만 삶과 메시지는 일치되고 있다. 이 이야기의 원본은『성인전』에 수록된 한 이야기를 아주 보수적으로 번역한 글이다.

초서가 이야기들 사이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서랍에서 이 오래된 번역본을 꺼내어 이야기마다 채워 넣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수녀의 이야기」를 전체 작품의 구성 요소로서 보고 있지도 않은 것이다. 또한 수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숨은 아이러니를 느낄 수 없다고 우리가 불평한다면, 우리는 "매력적인 디킨즈 종류의 인물들"의 나무 껍질을 벗기고 있는 것이다. 「수녀의 이야기」는 다음의 중요한 개념을 증명하고 있다. 이야기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적 효과를 위한 자의식의 탐구는 피하면서 가능한 원작에 가깝게 이야기를 겸손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목적이 듣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저 엘리스가 『캔터베리 이야기의 종교적 담화의 양상』에서 말했듯이, 「수녀의 이야기」는 「법률가의 이야기」와 많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100). 법률가는 자신의 서시에서 제프리 초서라는 당대 시인의 작품에 대해 상세하게 비평하는 고도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캔터베리 이야기』에 담겨 있는 문학에 관한 근본적인 토론은 "선한 이야기"를 어떻게 지어내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을 선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누가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여러분이 머리가 거의 잘려나간 순교자가 아닌 담에야!

『캔터베리 이야기』의 대부분은 "교훈," 즉 취지가 분명하지 않다. 문학성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작가 혹은 화자의 취지를 알아내기가 종종 더 혼란스러워진다. 이에 대한 최고의 예가 그리셀다(Griselde)에 관한 교회 서기의 이야기이다. 그리셀다의 고난은 구약에 나오는 욥의 고난과 관계가 있지만, 「기사의 이야기」의 새턴(Saturn)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월터를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문제를 진짜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교회 서기가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취지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방식이다. 교회 서기는 그리셀다의 이야기가 고난 속에서도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교회 서기는 청중들을 둘러보고 나서 갑자기 그리셀다를, 아마도 바쓰의 여장부 때문이겠지만,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힘든 반여성주의적인 아내의 전형으로 묘사한다. 이로 인하여 대부분의 이야기꾼이 청중을 기쁘게 하려고 의도에서 비롯된 이야기의 개작은 결국 이야기에 잠재되어 있는 진실을 표현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것은 진실이 이야기꾼이나 청중의 입맛에 다소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이야기꾼들의 경우, 특히 우화시 형태의 이야기를 할 때, 이들은 자신들이 말하려던 진실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캔터베리 이야기』를 종교적 관점으로 읽다 보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이는 듯한 중요한 순간들이 발견된다. 이 순간들 중 하나가「면죄부 판매인의 이야기」에 등장한다. 이 이야기에는 세 명의 난봉꾼에 대한 <도덕적 일화>가 등장한다. 꽤 이른 아침 여인숙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여인숙 주인과 여전히 졸리는 소년의 시중을 받던 난봉꾼들은 옛 동료의 갑작스런 죽음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뜻밖의 죽음에 대면하게 되면 흔히들 <메멘토 모리>(죽음의 경고)를 떠올리며 양심 점검과 자기 반성에 들어간다. 이러한 과정이 『만인』(Everyman)에도 그려져 있다. 하지만 세 명의 난봉꾼은 상당히 다른 반응을 보인다. 우선 그들은 술에 너무 취해서이거나 너무 어리석어서 현실과 허구(의인화)를 구별하지 못하고 전염병이 모든 사람을 죽이고 있는 가까운 마을에 '죽음' 이 살고 있다는 여관주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팔라몬과 알시테를 흉내내어 영원한 형제애를 선언한 뒤, "죽음이라는 악한 반역자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세 난봉꾼은 그들의 탐색, 곧 순례를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얼마나 극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수녀원장은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 고 적힌 브로치를 달고 다니지만, 이 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수녀원장은 세 난봉꾼에게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린도 전서 15장 54절)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난봉꾼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위치에 놓고 그분이 한 일을 되풀이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맹세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귀한 몸을 갈기갈기 찢는다" (707행).

여행을 시작한 세 난봉꾼은 한 가난한 노인과 우연히 만나는데, 이 장면에 대한 비평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노인은 겸손하게 종교적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713행)이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러나 세 난봉꾼은 "오만함"에 가득 차서 「바쓰의 여장부 이야기」에 나오는 젊은이처럼 노인이 늙었다는 이유로 그를 무례하게 대한다. 노인은 찾아오지 않을 죽음을 열심히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후, 그들에게 성서의 문구를 들먹이며 노인과 이야기할 때의 바른 예절을 그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난봉꾼들은 노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도, 아무 것도 배우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노인이 자신들을 축복하며 말을 마친 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죽음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묻게되며, 이에 대하여 노인은 작은 숲에 있는 참나무로 이어지는 굽은 길을 가리킨다. 물론 그곳에서 그들은 황금더미를 발견하게 된다.

확실히 이 모든 장면은 종교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그 장소에 가려면 그들은 올바른 길을 벗어나야 한다. 구약 성서에서 참나무와 작은 숲은 모호한 장소이다. 아브라함이 묻힌 마므레(Mamre)의 참나무처럼 신성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거짓된 이교도 신들에게 봉헌되기도 한다. 노인은 세 난봉꾼에게 그 장소를 일러주면서 두 구절을 상기시킨다. 하나는 "돈에 대한 사랑이 모든 악의 뿌리이다"(이것은 면죄부 판매인이 주창하는 설교 내용이기도 한데, 그 역시 돈을 사랑하는 자의 예가 되고 있다)이고, 다른 하나는 "죄의 삯은 죽음이다" 라는 것이다. 두 구절 모두 성서에서 따온 것이다.

노인이 세 난봉꾼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인류를 구해주신 하나님께서 자네들을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시기를 빌겠소"이다(764-5행). 여기서 우리는 초서의 작품에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인간애에 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구속(노예/예속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치료(사죄)를 구하면서 그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사죄)대로 바꾸고자 진심으로 애쓰며 당신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푼다. 노인은 세 명의 쾌활한 젊은이들이 자초한 멸망으로 가고 있을 때 대단히 무서워하나, 한편으로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뿐이지만, 그 기도가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그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면죄부 판매인의 서시와 이야기를 살펴보면 아주 복잡한 종교적 허구를 발견할 수 있다. 서시에서 면죄부 판매인은 소박한 시골 사람들에게 연설할 때 그가 사용하는 기술을 설명한다. 이 부분은 『캔터베리 이야기』 전체를 포괄하는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면죄부 판매인과 순례자들은 자신들이 꽤 높은 사회적 계급에 속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면죄부 판매인은 그의 교묘한 속임수를 선보이고, 소박하고 가난한 그의 희생자들을 비웃을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화자들이 사용하는 간단한 용어 "여러분 (Lordings)"과 권력층 사람들에게 전하는 충고를 담고 있는 몇 개의 이야기는 수녀원장이 그녀의 "궁정풍" 식사 예절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교묘하면서도 어리석은 속물 근성과 사회적 오만을 암시하고 있다.

면죄부 판매인의 말은 정말로 모두 사실이다. 그는 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능란하게 전하는 "번역가"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말은 그가 말할 때마다 자신의 죄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폭로하기 때문에 자멸적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의 끝에서 면죄부 판매인이 갑자기 순례자들에게 "구매 권유" 연설을 시작할 때 비평가들은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심리학적 사실주의 방법을 사용한다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면죄부 판매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순간이야말로 그에게는 "진실의 순간"이다. 운이 좋으면 그의 수사학적 달변이 효력을 발휘하여 순례자들 중 몇 명은 종교적인 불안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는 많은 순례자들 중 한 명의 돈벌이꾼에 불과하고, 청중들 대다수도 그들만의 "장사 속임수"를 가지고 있다. 청중들은 "한 마음"으로 면죄부 판매인을 나무라는데, 그 중에서도 여관주인이 가장 심하다. 그 결과 그들 사이에는 시끄러운 말다툼이 벌어진다. 결국 이야기는 면죄부 판매인과 여관주인간의 화해의 입맞춤이라는 고도의 상징으로 끝난다. 그들은 형제이고, 한 통속이며, 이들 만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디모데전서 6:10)" 라는 메시지에 힐책을 받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면죄부 판매인의 이야기」는 다양한 종류의 죄를 일종의 서열이나 죄의 무거움에 따라 등급을 분류하려는 긴 연설로 시작한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인간의 선택과 행동이 상호작용으로 나온다는 것, 즉 하나가 또 하나의 죄를 이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면죄부 판매인이 "삶의 개선"을 전혀 다루지 않고 오직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죄의 결과를 피하기만 하는 것은 그의 영적 이해력이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죄의 이유와 은혜의 적용에 대한 질문은『캔터베리 이야기』에서 필수적이다. 왜 초서는 다른 방식으로 이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모든 이야기들이 인간 삶에서 죄의 경계선, 즉 본성과 은혜,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 사이의 얇은 경계선을 뒤쫓는다. 『캔터베리 이야기』의 모든 말들을 합쳐보면 『신곡』의 밑그림이 나타나는데, 그 말들이 삶에 더 가깝고 단편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단테의 말보다 더 진솔해 보인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완벽한 형상을 볼 수 있고, 그 형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보고 말하는 것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러나 이것은 종종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틀리기도 한다. 우리는 특히 문학적 허구로 표현을 할 때, 진실을 전달하지 못하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재미)만 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교훈)은 주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이 타락하는 것을 쉽게 허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그런 식으로 자신을 대하기 때문이다.

면죄부 판매인에게 바쓰의 여장부가 필요하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얄궂게도 모든 남성 순례자들 중 그가 그녀의 상대자로 가장 부적합하다). 면죄부 판매인의 죄에 대한 분석은 돈, 탐욕, 분노, 살인, 과소비, 이기심을 포함하고 있지만 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바쓰의 여장부는 그의 이야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도 완성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성적 쾌락에 대한 욕구가 경제적 안정에 대한 욕구보다 부차적일 뿐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젊은 남편들은 그녀가 세 명의 늙은 부자 남편들을 죽이고 그들이 소유한 부를 상속한 후에야 등장한다. 그녀가 자신의 방식에서「면죄부 판매인의 이야기」의 세 젊은이들만큼 잔인하다는 사실은 종종 너그럽게 보아지지만, 예루살렘, 로마, 그 외 다른 지역으로 이어진 그녀의 여행은 종교를 빙자한 관광 여행이 아니라 분명히 종교적인 참회 여행이었다! 그녀가 자신이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권위 있는 원전을 들먹임으로 인하여 복합적인 아이러니가 생기는 것도 면죄부 판매인의 경우와 유사하다.

확실히 성과 돈은 순례자들의 삶이나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 속 인물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초서 자신도 십중팔구 그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타락한 인간 본성을 표현하는데 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깨달았을 것이다. 비평가들이 시골사제와 농부의 묘사를 "이상화" 라는 용어로 칭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서는 환락의 길로 가는 가능한 대안에 대해 한두 가지는 알고 있었다.

『캔터베리 이야기』를 종교적으로 읽을 때 마주치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순간이 있다. 학생들은 알아차리지 못할지 모르지만, 교수들은 종종 「수녀원장의 이야기」의 첫 스물 여섯 줄을 "본문과 상관없는 여담"이나 "오도하는 시작" 등의 용어들 외에는 달리 설명하지 못한다. 가난한 과부의 묘사는 정말이지 그 뒤에 나오는 동물우화(많은 여담과 더불어)와 아무 관련이 없다. 『캔터베리 이야기』가 짧은 이야기 모음집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런 용어를 사용하여 작가로서 초서의 역량을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등장하지 않는 많은 것뿐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것은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 한 작품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다.

과부의 생활은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녀의 오두막은 "작고" 산골짜기의 작은 숲 옆에 있다 (작은 숲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되었고, 이 세계는 "눈물의 골짜기"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수입도 "적고" 돈을 주는 남편도 없기 때문에 삶이 "매우 검소하다"(『켄터베리 이야기』는 돈을 위한 결혼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실 과부의 수입은 아주 특별하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그녀는 바다에서 생을 보낸 콘스탄스나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처럼 자신의 생존을 신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삶에 대하여 절대 실망하지 않는다. 또한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사르밧의 과부(구약성서 열왕기상 17장)나 열왕기하 4장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아무리 작은 것도 딸들과 나누어 가진다.

그렇다 해도 그녀가 순수하게 이상화된 상징은 아니고, 그녀의 음식은 천국에서 바로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소와 양을 가지고 있다. 내레이터는 이런 사실을 "그녀의 침실과 응접실은 그을어서 거무죽죽하다" 라고 말을 통해 "간접화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과부가 자신의 먹고 자는 방(화덕에서 나는 연기가 나갈 굴뚝도 없는)을 귀족 저택의 개인 침실과 식당으로 간주하는 그녀의 생각 속에 내포된 즐거움은 전적으로 그녀의 것이다. 그녀는 아무 것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녀의 음식도 집과 비슷하게 소박하고 빈약하다. 내레이터는 그녀의 음식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총 서시」에서 미식가들이 즐기는 모든 진미들―를 몇 줄에 걸쳐 이야기한다. 이런 소박한 음식 때문에 그녀는 "과식"으로 병이 난 적도 없고 정말로 좋은 건강을 누린다. 다시 말해서 지나친 탐닉으로 인한 질병(통풍과 뇌졸중)을 겪지 않는다.

그녀의 건강 비결은 무엇인가? "적당한 음식 섭취 ... 그리고 운동과 마음의 만족"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달리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날마다 정원과 농장에서 힘든 일을 하는 것이 그녀의 비결이다. 그녀는 진실로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마음의 만족이 진정한 행복이며, 그것은 모든 욕심을 누그러뜨릴 때만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음의 만족이 아닌 욕망의 성취를 바랄 뿐만 아니라 과부이면서도 한시도 과부로 있지 않으려는 바쓰의 여장부와는 아주 다르다.

면죄부 판매인의 난봉꾼들이 술을 마셔서 파멸한 것이라면 이 과부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다. 그녀가 먹는 음식은 우유, 빵, 베이컨, 간혹 달걀 하나인데, 이러한 묘사도 흥겨운 어조로 왕실의 연회 장면처럼 그려진다. "그녀의 식탁에는 대부분 흑백의 음식이 놓일 뿐" 이라는 부분은 과부가 전혀 필요를 못 느끼는 포도주의 "흰 것과 붉은 것"이라는 부분에 뒤이어 수수께끼처럼 등장한다. 이야기의 끝에 가서 과부와 그녀의 딸들이 아무 효과도 없이 여우를 뒤쫓는 무리를 이끄는 것을 제외하고, 여기까지가 우리가 이 "천진난만한 과부"에 대해 알 수 있는 전부이다. 그녀는 너무나 겸손해서 우리가 그녀의 양들과 개들의 이름은 알지언정 정작 그녀의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들 가운데 축복 받은 여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아주 행복하다.

이 후 닭들이 있는 마당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오고가는 말들은 이 과부에게는 다소 낯선 세계이다. 그곳은 철학적인 논쟁, 분명한 결론이 없는 논의, 권위 있는 출전과 도덕적 일화들의 모호한 사용, 그리고 라틴어의 상투적 인용구의 오역으로 가득 찬 세계이다. 「수녀원장의 이야기」는 수많은 말들이 난무하지만, 정작 내레이터는 그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하나의 최종적인 교훈 이상을 제안하며, 결국에는 또 다른 성서 구절을 들어 어떤 것이 가지이고 어떤 것이 열매인지를 독자에게 결정해 보라면서 이야기를 끝맺는다.

「수녀원장의 이야기」는 대답이 불가능한 신의 섭리와 예지에 관한 궁극적인 질문을 한다는 점에서 종교적이다. 만약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 수 있다면 그 고난을 예방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초서의 흥미를 끌었고, 천문학과 보에티우스에 관한 그의 관심의 핵심이 되었다. 이 질문들이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를 비롯하여「기사의 이야기」 그리고 초서가 사용하는 필연, 운명, 우연, 숙명 등의 언어의 기저를 이룬다.

하지만 과부의 의로움은 다른 곳에서 등장한다. 그녀의 삶은 『캔터베리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시골사제는 그의 이야기를 "참회의 열매"와 "하늘의 한없는 축복"을 환기시키면서 끝맺는다. "인간은 이 축복의 통치를 가난한 영혼에 의해, 하늘의 영광은 낮음으로, 많은 기쁨은 굶주림과 갈증으로, 안식은 노동으로, 영원한 생명은 죄의 고행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과부의 삶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그녀의 죄들은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이름만큼 비밀스럽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녀는 심적으로 만족해하는 사람이며, 그녀가 천국의 나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관주인이 의도한 죄의 순례는 저녁 식사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골사제 덕분에 그의 계획은 틀어지고 만다. 「시골사제의 이야기」는 서시가 먼저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여관주인은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 우화 하나를 원한다. 시골사제의 대답은 북부 지방 사람의 전형이다. "나는 우화는 하지 않겠소." 시골사제는 성서에 근거하여 우화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허구를 거부한다. 그런 이야기는 늘 진리(진실에 근거함)를 저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운율의 사용도 거부한다. 이제 남은 것은 산문으로 된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 뿐이며, 그는 좀더 분별이 있는 순례자들의 수정 요청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시골사제의 선택은 급진적이고, 후대에는 그 선택이 "청교도적"이라고 일컬어진다. 그 결과는 모든 허구, 이야기, 혼란스런 논쟁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순례자 초서의 "멜리비"를 훨씬 뛰어넘는 "이야기"이다. 「시골사제의 이야기」는 청중들에게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데 완전히 집중하는 단호한 교리이다. 이 이야기는 더 재미있는 다른 이야기의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이야기꾼의 인간성을 담고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최소한의 아이러니도 정확하게 짚어낼 수가 없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A 학점을 받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말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본 작품의 방향을 지시해 주는 경우,「시골사제의 이야기」와 뒤이은 초서의 아주 모호한 「철회」를 학생들에게 제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충실하지 못한 선생이 될 것이다. 지나친 회의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시골사제의 흥을 깨거나 초서의 「철회」를 단순한 농담으로 여기게 할 것이다. 그러나 『캔터베리 이야기』의 모든 작품과 작가 모두 더 많은 존경과 깊은 관심을 받을 만하다. 자신의 삶이 종교와 거리가 먼 사람에게는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가 명확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은 분명 재미뿐만 아니라 생각이 깊고 철학적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종교적 성찰을 담고 있다.

번역: 이성은

Books for Further Reading.

The Riverside Chaucer. Third Edition. General Editor: Larry D. Bens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Chaucer: The Nun's Priest's Tale. Edited with an Introduction and Notes by Stephen Coote. Penguin Books. 1985.

A Companion to Chaucer. Edited by Peter Brown. Blackwell Publishing. 2000.

Cooper, Helen. Oxford Guides to Chaucer: The Canterbury Tales.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Dyas, Dee. Images of Faith in English Literature 700 - 1500: An Introduction. Longman.1997.

Ellis, Roger. Patterns of Religious Narrative in the Canterbury Tales. Croom Helm. 1986.

Mann, Jill. Chaucer: Medieval Estates Sat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Minnis, A.J. Chaucer and Pagan Antiqu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Pearsall, Derek. The Canterbury Tales. George Allen and Unwin.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