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번역한다는 것
- 안선재
20분이라는 시간 동안
이야기하기에는 ‘시를 번역한다는 것’보다 ‘한국
시를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이라는 주제가 더욱 현실적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발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얻어보고자 한다.
예컨대, '무엇을 번역할 것인가?', '왜
번역하는 것인가?',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그런데 "번역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말이다.
시는 특정한 언어로 쓰인 텍스트이다. 시는
일반적으로 "소리와 의미"의 결합체로 간주된다. 이 중에서 "소리"는 거의 모든 시에 존재하는 요소로,
심지어는 시인이 자신의 시가 두 눈을 통해 조용히 읽히게 되는
상황을
의도하며 썼을 때도 그러하다. 상당수의 한국 시인들은 낭독회나 행사에서 자신의 시를 크게
"낭독"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러나 한글로 쓰인 시는 본질적으로 시의 소리를
나타내는
텍스트이다. 이
점에서 한국어로 쓰인 시는 중국어로 쓰인 시와 차별화되기도 한다. 중국어에서는 "의미"라는 요소가 각 문자의
발음과는
별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국어는 표의문자로
이루어진
언어이지만, 한문으로
쓰인 시를 지배하는 규칙에는 운율이라는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요점은 시가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소리와 의미 모두가 변한다는 것이다.
특히 소리는 완전히 바뀌며,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들은 거의 근본적인 차원에서 달라진다. 최근 몇 년간, 나
는 많은 한국인이 품고 있는 소망, 즉 영어로 번역된
한국어 시는 원문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시여야 한다는 소망에 대해 꽤 자주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영시는 말 그대로 한국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출판사
측에서 번역된 텍스트를 한국어 시인에 "의해" 쓰인
것으로 규정한다 해도 그렇다. 김소월 시인이나 고은
시인은 단 한 번도 영어로 시를 쓴 적이 없다. 「어
제일리어(Azaleas)」라는 시 제목은 김소월 시인에 "의해" 쓰
인 것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고 싶다면 "YYY 시인이 쓴 한국시
XXX의 영어 번역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원시를 만들어낸 창조적인 행위가
번역이라는 행위를 통해 패러디될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원
작자인 시인에게는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있다. 그러나 "번
역문"을
생산해내야 하는 번역가에게는 그러한 자유가 없다. 현
대의 번역 트렌드를 따라 (거의) 정확한 등가물보다는 자유로운 "버전"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할지라도, 번역가는 어느
지점에 이르면 원문으로부터 가해지는 제약과 통제에 묶이게 된다.
번역가의 목표는 또 다른 언어를 도구로 활용해 원시의
"충분한 등가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충
분한 등가물"이란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번역에 대한 논고에서 나온 용어를
말한다. 그런데
어떤 번역문이 "충분"한
지 아닌지는 누가
결정하게 되는가? 번역문이 만족시켜야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영문판이 나왔을 때, 한국 사람들은
신속히 그 번역문의 원문을 찾아 읽고 "오류"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반사적으로 번역의 오류를
찾는 경향은 대부분의 문학 애호가들이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고 있거나, 몇 시간씩 할애해 학생들의 글쓰기를
교정해주는 일을 습관처럼 하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는 사람들이 번역가의 의무를 원문을
복제하는 것으로,
한국어 원문의 단어들을 순서대로 옮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 단어들의 "뜻(의미)"은 정확하게 복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에 부합하지
못하는 번역은 전부
"잘못"된 것이 된다. 사실
한국에서는 "좋은 번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품질이 "좋은" 번
역에 대한 기준이 한국어 원문에 있다고 간주되며, 따
라서
오역도 없고 원문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충분한 등가물"로서의
번역이 자동적으로 "좋은" 번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사할 수 있는 영어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음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시를 직접
영어로 번역한다. 자신이 원문에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으며 원문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에 찬 나머지
스스로 꽤 괜찮은 영문 등가물을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떤 시를 번역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 즉
번역가라면 반드시 결정해야 할 이 선택의 이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이는 번역 후보작들은 학교 수업에서 교육되고 "한
국시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시들인 경우가 많다. 김소월, 한
용운, 박목월, 서
정주를
비롯해 공식적으로 시인임을 인정받은 이들의 작품은 근대 한국시의 "규
범"을 이루고 있다.
교과서에 수록된 시들은 대체로 항일저항정신의
표출과 같은 국가주의적인 가치를 기본 주제의식으로 삼고 있다. 그
렇지 않은 경우라면 학생들이 존중하고
따라야 할만한 아름다움, 인간의 가치를 담아냈다고
여겨지는 작품에 해당한다. 이렇게 교과서를 통해
학습되는 시들은 물론 길이가 짧고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은 편이며,
친북시인을 비롯해 정치적 반체제 인사의 작품들은 제외되어 있다. 추측해보건대, 한
국에서는 "비판적 사고"를
그다지 비중 있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몇 세대가 흐르는 동안에도 이러한 시들이 뛰어난
시이며 외국 시에 견줄 만큼 가치 있는 시라는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자연히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시들이 "잘" 번역되기만 하면 한국시의 위대함을 분명히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번역의 품질이 어떻든, 「진달래꽃」이나
「님의 침묵」 같은 시가 외국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영어로 출판된 시와 한국어로 출판된 시를 비교할 수
있는 일반적인 척도가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다. 현재까지도 영시 세계에서 규범이 되는
시들은 10세기에
쓰인 앵글로-색슨의 『엑스터 서(Exter Book)』(방
랑자 등)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에는 초서와 셰익스피어 같은 형이상학파 시인과 19세
기 초반 낭만주의를 거쳐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
일랜드,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캐리비안, 호주, 인
도 등지를 기반으로 세분화되었다. 영어로 쓰인 시들은
최근까지도 최소한 호머와 베르질리우스, 단테, 괴테의 작품을 비롯해 상당수의 이탈리아, 프랑스, 독
일 문학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대부분의
유럽 작가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서양에서는 20세기부터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풍부하고 다양한 시가 창작되었으며, 오늘날 시인과
독자들은 옛 시인들의 "업적을 등에 업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문학 비평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은 자신의
저서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이처럼 경외할 만한 선구자들의 압도적인 그림자 속에서 새롭고도 독창적인
목소리를 구축해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독자층을
확보하고자 하는 젊은 시인들의 어려움을 짚어내기도 했다. 상황이 이러한 가운데 최근 서양의 시 독자들은 "서양" 문
화권 너머의 세계에서 탄생한 방대한 범위의 시와 소설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현대 한국시를 한국어 문화권 너머의 세계에까지 널리 알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렇게 영미문학세계에서 "세
계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영역에서 역동적인 일원이
되는 것이다. 영어로 번역된 세계 각국의 시는 주로
「아심토트(Asymptote)」, 「현대 번역시(Modern
Poetry in Translation)」, 「워
드 위드아웃 보더스(Words Without Borders)」
와
같은 저명한 문학 잡지에 소개되고 있다. 이 시들은
많은 주요 출판사를 통해 시집으로 묶여 출판되기도
한다. 매우 다양한 공간과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이 맞닥뜨린 삶의
고난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반영된 현상이라 하겠다. 그
런데 이때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국가적, 언어적
경계를 초월해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인을 찾는 것, 원
어와 국가라는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상태에서도, 번역
된 상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시를 쓰는 시인을
찾는 것이다. 특히나 오늘날 세계문화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와 같은 목소리가 대체로 여성의 목소리라는 점이다. 별도로 내가 한국시 번역가로서 느끼는 특정 어려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다. 그 어려움은 40년 가까이 한국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영국을 떠나온 지도 벌써 50년이 지났고, 그
동안 나는 한국 사람들로부터 "한국 사람 보다 더 한국
사람 같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 나는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1980년
5월 이후의 한국 역사를 직접 경험했고,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도 꽤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나
는 한국시에서 느껴지는 "한국스러움"이 다시 말해 한국시의 토양이 된 아픈
역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감각도
어느 정도는 갖고 있다. 그런데 한일합방의 치욕, 분단의 비극, 산
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트라우마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외부세계에는 대체로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그러한 역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시에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며, 실제로
나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신경림 시인의 『농무』나 고은 시인의 『만인보』 번역문에 해설을 덧붙였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내 고향인 영국, 유럽, 또는 서양 세계가 이제는 얼마간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고향을 떠나온 뒤로, 나는 그곳에서
매일같이 이루어진 사회적, 문화적 변화로부터 멀어져
왔다. 더이상
현대의 문학비평 담론에서 쓰이는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다
행히 몇몇 중요한 인물과 친분이 있기는
하지만, 문학계와 관련된 인맥도 넓지 않은 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해외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한국 시인이 누구일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그러한 시인을
홍보하고, 그들의 시집을 출판하고, 그들을 문학 행사에 초청해주는
등 필요한 도움을 줄 만한 주요 출판사에 연결고리도 없다. 말
하자면 데보라 스미스나 최돈미 번역가처럼
더이상 "저쪽" 세
상에 존재하는 문화의
구성원이 아닌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는 중요한
문제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는 서양 문단에 인맥을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한국의 독자와 평론가들이 일단 시집이 번역되어 출판되기만 하면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할만한
시인을 칭송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출판을
목표로 하는 외국에서 원문의 목소리를 대변할 이를 찾을 수 있는지에 따라, 젊고 독창적인 여러 한국 작가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런
작가들을 출판사와 평론가에게 열렬히 홍보해 줄 세계문학계의
전문 독자를 찾을 수 있는지에 따라 많은 것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한강 작가나 편혜영 작가처럼
한국에서 독보적인 평판을 자랑하는 것은 아닌 이들이 눈에 들어올지도 모른다. 한국의 훌륭한 여성 시인들을
떠올려보면 김혜순 시인에게 집중된 관심이 꽤 놀랍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녀
이외의 시인들을 홍보하는 일은 상당히 곤란해졌다. 김
혜순 시인이 그녀 세대의 "상징적인" 한국 여성 시인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다른 시인들이 들어설 자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이와 관련된 다른 측면의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다.
나는 한국 작가들이 오늘날 세계 각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생생하고 정확한 한국어
번역본으로 만나볼 기회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외국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특히나
어려운 일이다. 한국의
영문학과 커리큘럼에 소개되지 않은 젊은 작가들의 시를 번역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문학잡지 「아시아(ASIA)」
에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 소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들이 널리 읽히고 있는지, 각 작품을 한국어로
옮긴 번역문의 품질이 믿을만할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확언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지금껏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훌륭한 작품을
배출한 국가나 그 작품에 쓰인 언어와 친숙하지 않다. 작
년에 「워드 위드아웃 보더스」는 크로아티아, 노르웨이, 레바논, 스
페인, 포르투갈,
아랍어권 작품 가운데 영어로 번역된 (현대) 여성 작가의 시와 소설을 합해 총 31개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목록에 포함된 한국 작품으로는 "채식주
의자"가 유일했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은 '시는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가'라는 골치 아픈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
국 독자들은 어떤 번역에서든지 원문에의 "충실성"과 정확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충동을 갖고 있다. 번역된 시(혹
은 소설)가 원문에서 말하는 바를 전해주기를, 가능한 한 덧붙이거나 생략하는 부분 없이 완전히 동일하게
전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는 서양에서 추구하는 번역 방식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서양에서는 어떤 작품이
다른 국가에서 받아들여지도록 만드는 일에 있어서 "창조
적인 다시 쓰기"(부정적인 용어로 말하면 "길들이기")를
강조한다. 그런데 역시나 앞서 말했듯, 보통 한국 작가들은 글을 쓸 때 외국 작품을 본보기로
삼지 않는다. 간혹
실비아 플라스나 프리다 칼로 같은 외국 예술가들의 작품을 참고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한국 작가의 작품을
모델로 삼는다. 그 결과, 국적이 중요치 않은 범세계적 공동체에
속해있다고 자각해 수많은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영미권 시인들과 한국 시인들의 시 쓰기 방식에는
필연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게 된다. 결국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된 한국시는 어색하게 들리고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한번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한 북미 출신 미국인에게
내가
"정확성"에 집중해 고군분투하며 번역한
고은 시인의 시를 몇 편 보여주고
문체와 흐름을 교정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고은
시인의 부인께서 내 번역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렇게
번역하면 남편이 히피 시인처럼 보이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그것이 내 의도였지만, 그녀에게 고은
시인은 제멋대로인 히피족이 아닌 한국 시인인 만큼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점이었다. 그녀는 그의 시가 영어로
쓰여 있어도 한국어처럼 들리기를 원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미국의
번역가가 한국 소설에 등장하는 구어체를 미국 중서부지방 사람들의 사투리로 번역할 경우, 분명 문화코드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것이다. 그러나
번역문이 어떤 목소리를 가져야 하는지와 관련된 이
문제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대화가 자유롭게 변하는 소설에 비해 시에서 더 까다롭기 마련이다. 그런데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보면, 한국 시인의 목소리는
영국 또는 미국 시인의 목소리처럼 들릴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각 경험에 대응하는 방식이
서로 매우 상이하기 때문이다. 즉, 삶에 대해 말하는 방식 자체가 서로 다른 것이다. 이미지와 감정의 흐름도 다르고, 심지어 목소리의 어조도 다르며, 그 무엇보다도 제인 허쉬필드(Jane Hirshfield)나 캐롤
앤 더피(Carol Ann Duffy) 같
은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 내가 한국시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던 형태의 유머를 접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실
제로 서양의 시인들은 상당히 유머러스한
경우가 많으며, 독자들이 시를 읽으면서 큰 소리로
웃기를 기대한다. 서양에서
시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속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한국의 원로 시인들은 여전히 감정이 풍부한
바이올린 음악 소리를 배경으로, 흐느껴 우는 감상적인
목소리로 말을 걸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이 내 번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소리와 리듬을 통해 생성되는 시적 흐름을 충분히 구현해내면서도 원문에서 느껴지는 의미를
최대한 충실하게 반영하려 하기 때문에, 즉 영어로
소리 내 읽었을 때도 "시처럼" 읽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이러한 방식이 한국시를 번역하는
합리적인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그 이외의
방식으로는 작업할 수 없었다. 나는 번역을 할 때면
늘 내 번역의 오류를 검토해줄 사람을 찾고자 한다. 한
국어는
무척이나 어려운 언어이고, 내 생각에 나는 아직도
한국어를 완벽히 습득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또 어떻게
썼어야 마땅했는지 원작자보다 더 잘 알기에 시를 마음대로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번역가 시인들이
지닌 그런 자신만만함도 내게는 없다. 나의 "보수적인" 번
역 방식이 각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바와 그것이 말해지는 방식을 존중한다는 하나의 표현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영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번역
워크숍에서는 이와 완전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번역작업이
이루어진다. 워크숍 참가자들에게 권장되는 방식은
원작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상당히 근본적인 차원에서
원작을 다시 쓰는 것, "원작을 개선"하는
것이다. 문학 번역상 가운데 번역의 "정확성"과
원문에 대한 충실성이 심사에서 중요하게 간주되지 않거나 평가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떤 텍스트의 번역문이 출판되는지, 그것이 재미있게 읽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한국시는 서양 시와 다르다. 본보기로 삼는 작품과 관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양에서 인정받는 많은
시인은 매우 개인적인 목소리로, 극적으로 과장하는 일
없이 겸허하게, 대체로 가볍게, 자신의 약함과 실패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면, 내
가 읽어본 한국의 많은 젊은 시인들의 작품은 개인적인 색채가 덜하며,
전하려는
메시지는 별로 없이 언어를 잘 주물러 시를 만든다.
나는 한국인조차도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러한 시가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번역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령,
고은 시인의 『만인보』는 사람들이 쉽게
헤아릴 수 있는 인생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번역문으로도 읽기가 수월한 편이다. 정호승 시인의 시들은
보편적인 지혜, 이별과 상실을 마주한 자의 그리움
등을 곳곳에서 전달하고 있다. 한편, 강력한 어조의 페미니즘 시를 쓰는 김승희 시인의 작품들은
정확한 번역을 어렵게 만드는 "구
체적인" 언어로 쓰여있고, 고형렬 시인의 작품들은 독자로 하여금
환상과 현실을 나누는 경계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끔 한다. 그
밖에 이승희 시인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거리를 환기하며, 김수복 시인은 이에 더해 여러
기억을 들여다보고 탐구한다. 이를테면 이렇게나 다른
것이다. 따라서 번역가에게 가장 커다란 난제는
번역된 시들이 각각 독특한 목소리를, 각 시에 적합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 여타 다른 시와는
어떻든 다르게 들리도록 하는 것이라 하겠다. 모든
시는 한국어로 쓰여있든, 번역된 언어로 쓰여있든, 각각 고유한
가치와 고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그러한
시를 국경과 자국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전달하는
것이 번역가에게 주어진 핵심 과제이다. |